개번 매코맥 지음, 이기호·황정아 옮김/창비 펴냄(2008) 한국과 중국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놓고 일본과 다투고 있는 걸 나무라며 과거를 넘어서라고 충고했다는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 얘기를 듣자니 지난해 1월 자신의 <덩샤오핑 평전> 설명을 위해 서울에 왔던 에즈라 보걸(85)이 또 생각났다. <재팬 애즈 넘버원>(1979)이란 책으로 유명한 하버드대 교수 출신의 보걸은 당시 아베 정권 들어 극심해진 일본의 극우적 행태는 일본 내부 문제보다는 그런 일본에 과잉반응하는 중국과 한국 탓이 더 크다는 황당한 얘기로 실소를 자아냈다. 구미인들의 일본·일본풍 선호를 가리키는 속물주의적 ‘자포니즘’ 냄새를 물씬 풍기는 그런 얘기들이 아직도 쉽게 튀어나오다니. 웬디 셔먼 발언으로 파문이 일자 미국 정부가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그의 연설이 무엇을 겨냥했는지는 다음과 같은 언론 보도 내용을 보면 자명해진다. “(웬디 셔먼은) 일본을 오랫동안 국제법의 주도적 후원자이자 국외 개발의 관대한 기여자였다고 치켜세웠다. 또 이슬람국가(IS)에 의해 살해된 일본인 인질을 언급하면서 일본이 자위대의 적절한 역할에 관해 논의를 하고 있다고 소개한 뒤, 일본은 현대적 요구와 과거에서 어렵게 배운 교훈을 조화시키려 노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내 연설의 목적은 협력적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것”이라고 둘러댔지만 주변국들을 선한 일본을 괴롭히는 갈등 유발자로 상정한 그가 생각하는 협력관계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개번 매코맥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 아시아태평양학연구소 명예교수가 2007년에 출간한 <종속국가 일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신도(神道)의 가치관을 지키는 내셔널리스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워싱턴을 기쁘게 하기 위해 충성을 바치는 두 얼굴의 지도자 밑에서 21세기 일본 정부의 정체성은 난삽하게 찢기고 말았다. 미국의 요구에 응하려 하면 할수록 국내에서는 국가와 국기에 관련된 의식을 강조하고, 자랑스럽고도 ‘올바른’ 역사관을 추구하며, 국가정체성의 중심에 야스쿠니신사를 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일본 보수우익세력의 민족주의·국가주의 강화는 미국에 대한 자신들의 종속 심화를 감추거나 얼버무리기 위한 것으로, 그들이 일본 민족주의·국가주의를 떠들수록 일본의 대미 종속은 그만큼 더 심화돼 간다는 얘기다. 매코맥 교수가 자신의 책 제목에 붙인 ‘종속국가’라는 표현은 1970~80년대의, 그야말로 잘나가던 시절의 일본 자민당 정권 핵심부에 있던 인물 고토다 마사하루(後藤田正晴, 1914~2005)가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경찰관료 출신의 정치가로 자치·법무 대신과 관방장관 등을 역임했고 미야자와 총리 때는 부총리를 지내기도 한 고토다는 말년에 “일본은 미국의 속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이 일본 정통 보수주의자의 눈에도 2000년대 초의 일본은 이미 미국의 ‘속국’으로 비쳤던 것이다. 매코맥은 그걸 그대로 옮기기가 뭣해 ‘종속국가’로 바꿔놨다.
한승동 문화부 선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