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대통령의 7시간은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 정윤회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만 확인됐을 뿐이다. 그렇게 엇나간 운명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비극을 불렀고 마침내 ‘성완종 리스트’로 돌아왔다. 마치 도미노 조각이 연쇄적으로 쓰러지듯이.
콘크리트라던 지지율에 쫘악 금이 갔다. 몇 방울 되지 않는 눈물에 영혼마저 깃들지 않았음을 눈치챈 민심은 티끌이 되어 흩어졌다. 6월 지방선거는 참패였다. 유독 더 아픈 건 충청이다. 면도칼 날을 얼굴로 받으면서도 “대전은요?”라고 챙겼던 곳이다. 어머니에 대한 향수로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다 지다니! 1995년 지방선거 도입 이후 처음 벌어진 일이다. 세월호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니 총리는 누가 뭐래도 충청 출신이어야 했다. 문창극은 청주 출신이었다. 그런데 세월호 아이들의 저주였을까. 기자 혼자 인터넷을 뒤져 찾아낸 ‘친일 발언’을 난다 긴다 하는 청와대 전문가들이 놓쳤다. 바로 한달 전 ‘안대희 낙마’가 있었기에 더 뼈아팠다. ‘수첩인사’라느니 ‘협량인사’라는 비아냥에 시달려야 했다.
여론이 돌아서니 당도 대통령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세월호 이후 치러진 당내 선거란 선거에선 모조리 ‘비박’이 당선됐다. 정의화, 김무성, 유승민. 다들 대통령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총리는 이완구일 수밖에 없다. 충청 출신인데다 당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다. 세월호 갈림길에서 잘못 내디딘 발걸음이었기에 이완구는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인화물질은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도화선에 불을 붙인 이는 엉뚱하게도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숨소리도 내지 않던 그가 대담하게도 자서전을 내며 현직 대통령을 비판했다. <동아일보>와 한 인터뷰에서는 거의 ‘호통’ 수준으로 꾸짖는다. 다 세월호의 여파다. ‘촛불’로 기가 꺾였던 그였기에 세월호에 시달리는 대통령을 보니 입이 근질거린 게다. 아뿔싸 ‘역린’을 건드렸다. 대통령이 폭발한 것이다. ‘비리 덩어리’를 들어내겠다며 이를 갈았다. 이완구를 시켜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그도 계면쩍었을 게다. 총리 후보 청문회에서 온갖 허물이 드러났고 그걸 김치찌개로 덮으려다 혼쭐이 난 게 엊그제였으니. 이완구는 쑥스러웠을 뿐이지만 성완종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사정을 당해야 할 사람이 사정하겠다고 소리지르고 있어. 이완구는 사정 대상 1호입니다.”
연쇄반응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대통령의 세월호 냉대→지지율 추락→충청 총리 집착→당내 기반 붕괴→이명박의 비판→부패와의 전쟁→성완종 리스트. 많은 고리 가운데 하나만 빠지더라도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대통령이 처음에 ‘내 탓이오’를 외치며 팽목항에서 사흘 낮 사흘 밤만 보냈어도, 총리가 이완구만 아니었어도, 총리 대신 차라리 법무부 장관이 나섰더라면…. 성완종은 산으로 올라가며 <경향신문> 기자의 새벽잠을 깨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 ‘예정된 운명’을 바라보며 세월호 아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숨진 단원고 학생 246명 가운데 사망신고가 된 아이는 대여섯뿐이라고 한다. 아이들의 영혼은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우리 곁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김의겸 디지털부문 기자
성완종은 그날 새벽 기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맑은 사회를 앞장서 만들어주시고 꼭 좀 보도해 달라.” 나는 이 말이 세월호가 가라앉는 마지막 순간 보낸 카톡 문자와 자꾸만 겹쳐 들린다. “엄마 내가 말 못할까봐 보내 놓는다. 사랑해…”
김의겸 디지털부문 기자 kyu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