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후 미군 위안소를 설치한 일본 정부
천황의 항복방송에 뒤이어 “적은 상륙하자마자 여자들을 연달아 겁탈할 것이다”라는 소문들이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내무성의 정보 분석을 통하여 일본 정부는 이 소문들과 자국 군대가 해외에서 한 행태 사이의 연관성을 즉각 인식했다. 경찰의 한 가지 내부 보고서가 표현한 바와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약탈과 강간을 말하는 많은 사람들은 전선에서 귀국한 사람들이다.” 도시에 사는 가족들은 여성들을 시골로 보내라는 촉구를 받았다. 여성들은 보다 유혹적인 여성 의류보다는 전시에 입던 헐렁한 몸뻬 바지를 계속해서 입으라는 말을 들었다. 어린 소녀들은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군은 성욕 충족을 요구할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되었다. 문제는 다만 누가 외국군의 성욕을 충족시킬 것인가? 이었다.
일본정부는 즉각 이 문제에 응답했다. 8월 18일, 내무성은 전국을 통하여 지역 경찰관들에 비밀 무선 통신을 보내어 점령군에 대한 특별하고도 배타적인 “위안 시설들”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런 시설들의 마련은 최대한 신중하게 실시되어야 했다. 그런 시설에 인원을 채우는 책임은 지역 경찰서장들이 떠맡아야 했는데 경찰서장들은 이미 포주노릇을 하는 지역 기업가들과 개인들을 동원해야 했다. 같은 날, 도쿄의 고위 경찰간부들은 도쿄-요코하마 지역에서 사업을 하던 “기업가들”을 만나서 그 기업가들이 같은 금액을 스스로 조성한다는 합의를 맺고 그들에게 5000만 엔을 재정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 부총리 고노에 후미마로(Konoe Fumimaro)는 이 긴급한 문제를 직접 담당할 것을 경찰청 장관에게 요구했다. “일본의 젊은 여성들을 보호해주시오”라고 전 총리이자 일본 왕자인 고노에 후미마로(Konoe Fumimaro)가 경찰청 장관에게 간원했다는 말이 있다. 수일 만에, 그러나, 새로운 접근방식이 취해질 것이다. 항복을 주선하기 위하여 마닐라에서 맥아더 장군과 그의 막료들을 만났던 일본군 장교들 중 한 명인 가와베 토라시로(Kawabe Torashiro) 장군은 도쿄로 돌아와서 이 시설들을 마련하는 데 일본 정부가 직접적으로 간여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 후, 정부의 역할은 주로 형식적으로 그 계획을 지원하고 자금 대출과 경찰 지원을 제공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그 일을 떠맡도록 요청을 받은 사업가들은 내무성, 외무성, 재무성, 경찰청 장관, 그리고 도쿄도부로부터 공식적 지원을 선언하는 회보를 이용하여 사금융의 투자를 모색했다. 9월 6일, 공공은행인 강교은행(Kangyo Bank)은 이 활동들을 위한 정부 대출금의 1회분으로 예상되는 3000여만 엔을 내놓았다. 재무성의 떠오르는 젊은 별인 이케다 하야토(Ikeda Hayato)는 정부의 지원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나중에 “순결을 보호하는 데 1억 엔도 값싸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가들은 황궁 앞에 모여서 “천황 만세!”를 외침으로써 이 이윤이 나는 기회를 제공하여 주어 국가에 봉사할 수 있도록 하여 감사하다는 표시를 공개적으로 했다.
일본의 “선량한” 여성들의 순결을 보호하는 완충장치 역할을 하는 적은 수의 여성들을 등록하는 것은, 서양 야만인들을 다루는 데 잘-확립된 정책이었다. 페리(Perry) 제독이 일본의 쇄국정책을 강제로 폐지한 직후 외국인들을 위하여 특별 유락 지역들이 설치되었고, 현대 신화에서 국가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한 젊은 여성은 이미 애국적 순교자로서 추앙들 받았다. 그녀의 이름은 오키치(Okichi)였고, 최초의 미국 영사로 1856년에 영사업무를 맡았던 타운젠드 해리스(Townsend Harris)에게 배우자로 배치되었다. 1945년의 뚜쟁이들은 그녀의 슬프고, 감각적인 모습을 자기들 자신의 업무를 정의(定義)하는 데 도용했다. 그들이 모집하는 여성들은 “현대의 오키치들”인 소와(昭和)의 도시인 오키치가 될 것이라고 그들은 선언했다.
직업 매춘부들이 현대 오키치가 되기를 망설이는 것으로 판명되자 일본 정부는 놀랐다. 한 가지 설명의 의하면 그들은 전시 선전에서 악마적 인물들로 일반적으로 묘사된 미국인들이 자신들에게 상처를 입힐 지나치게 큰 성기들을 달고 있다고 두려워했다. 특별 위안 시설들을 조직하는 사람들은 그리하여 도쿄 도심의 긴자 지역에 “새로운 일본 여성들에게”라는 대형 간판을 설치함으로써 일반 여성들을 모집하는 일을 떠맡았다. 이 간판에는 “전후를 담당하는 시급한 국가적 시설의 한 부분으로 우리는 점령군을 위안하는 중대한 임무에 참여할 새로운 일본 여성들의 능동적인 협력을 구하고 있다”라고 다소 모호하게 광고했다. 그 광고는 또한 “18세에서 25세 사이의 여성 사무직원. 의식주가 제공되는” 일자리라고 말했다.
이 광고에 현혹된 여성들 대부분은 초라한 행색으로 면접을 받기 위하여 도착했다. 몇몇은 심지어 신발도 신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홍등가의 “물장사”에 경험이 없어서 대부분 자신들의 실제 임무가 무엇인지를 알고는 떠나버렸다. 남은 여성들 가운데서, 몇몇은 식사와 주거의 보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국가를 위하여” 자신들의 몸을 바친다는 호소에 의하여 이끌렸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결국 일생동안 그들에게 주입된 애국적 자기-희생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8월 27일경, 도쿄에 있는 1,360명의 여성이 오락 및 놀이 협회(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의 약자인 R.A.A로 곧 알려지게 될 조직에 (일본어로 특수 위안 시설 협회) 등록했다.
다음날, 점령군의 소규모 선발대들이 최초로 도찰할 바로 그 때, R.A.A.의 개업식이 황궁 앞 광장에서 열렸다. 이 때, 다음과 같은 “맹서”가 수사적인 일본어로 표현되어 발표되었다:
우리 가족은 3000년 동안 산과 계곡, 강과 초목처럼 변함없이 견디어
왔을지라도, 한 시대의 종말을 기록한 1945년 8월 15일의 거대한 변혁
이후 우리는 무한하고, 찢어지는 슬픔과 끝없는 비애로 괴로워하며
위험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추락하려 한다....
때가 와서 명령이 주어지고, 우리의 영업 영역으로써 우리에게는
전후 관리를 위한 시급한 국가적 시설의 한 부분으로서 점령군을
위안하는 어려운 임무가 배당되었다. 이 명령은 무겁고 막중하다. 그리고
성공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결하여 우리의 신념이 우리를 이끄는 곳으로 나아가서
수 천 명의 “우리 시대의 오치키들”의 희생의 통하여 전후 사회적 질서의
근저에서 보이지 않은 지하의 기둥이 또한 되면서 사나운 파도를 막는
방파제를 구축하여 우리 민족의 순수성을 지켜 보살핀다....
이 선언을 끝내면서 한 마디 한다. 우리는 점령군에게 아첨을 하고
있는 게 절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진실성과 타협하거나 우리의 영혼을
팔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불가피한 예의를 표하여 우리의 임무 중
한 부분을 성취하여 우리 사회의 안전에 기여하는 데 조력하고 있다.
우리는 감히 다음과 같이 외친다: 우리는 국체를 옹호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바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이것을 재차 확인한다. 이것이
우리의 선언이다.
도쿄 R.A.A.에 달려왔던 물장사에 종사하던 일곱 직업 협회들 또한 선언서를 집단적으로 내었다. “1억 인의 순수 혈통을 보호함으로써 국체를 유지하는 위대한 정신”에 엄숙한 존경을 표한 다음에, 이 애국적 뚜쟁이들은 거의 숨 막힐 정도로 민첩하게 이 급격하게 변하는 시대의 안이하고 새로운 수사여구에 뛰어들었다. R.A.A.를 통하여 그들은 “우리는 [연합군 점령군]과 우리 국민 사이의 상호이해를 촉진하여 사람들의 교류의 순조로운 발전에 기여하고 평화로운 세상의 건설을 고취하기를 희망한다”고 선언했다.
수 백 명의 미군들이 그날 재빨리 도쿄 오오모리 구역에 있는 R.A.A. 시설로 왔는데 그 시설에는 적은 수의 대부분 경험이 없는 모집된 여성들이 모여 있었다. 침대도 매트리스도 방 칸막이도 없어서 성행위는 모든 곳에서, 심지어 복도에서도 노출된 채 일어났다. 나중에 그 장면에 대한 일본 측 설명들은 소위 미국 문화의 “진정한 색깔들”을 드러낸 수치심이 없는 “동물적 교접”에 대하여 언급하며 분노하는 경향을 보인다. 지역 경찰서장은 울었다고 전해진다.
R.A.A.에 모집된 한 순진한 여성은 나중에 자신이 겪은 첫날의 공포를 회상했는데, 그날 그녀는 23명의 미군을 받으라는 요구를 받았다. 한 평가서에 의하면 R.A.A. 여성들은 하루에 15명에서 60명의 미군을 받았다. 이전에 타이피스트였던 19세의 여성은 즉각 자살했다. 몇몇 여성들은 망연자실하여 도망쳤다. 그러나 9월 중순경 “사람들의 교류”에서의 이 기괴한 관행이 다소 일상적이 되어버렸다. 9월 13일자 일기에서 작가 다카미 준(Takami Jun)은, 현란한 기모노를 입고 – 오페레타의 주인공 같았다고 택시운전사는 말했다 – 한 위안 시설 밖에서 미군을 맞이하는 한 여성을 본 것을 보고한 택시운전사와의 대화를 기록했다. 그녀는 펄쩍 뛰어 미군의 목에 팔을 감고 하로라고 - “헬로” - 말했다. 그것은 일본 남성에게는 절망적인 광경이었다.
공습으로 도쿄의 대부분이 재로 변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위안 시설들이 제공될 수 있던 지역이 많지 않았다. 9월 하순이 되자, 도쿄부 위생청장이던 요사노 미쓰루(Yosano Mitsuru) 박사는 (유명한 여성주의자이자 시인인 요사노 아키코[Yosano Akiko]의 장남) 미군사령부에 소환되어, 미군 장교들, 백인 하사관들, 그리고 흑인 하사관들이 사용하기로 예약된 별도의 구역들로 매춘부들을 배당하는 데 조력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처음에 흑인병사들이 이용하기로 한 여성들은 공포에 질렸다고 – 그 여성들이 많은 흑인 병사들이 자신들을 백인 병사들보다 더 친절하게 대우한다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 전해졌다. 인종과 인종적 계급구조에 대한 일본인들의 세세한 편견 속에서, 어떤 일본인들은 그런 상대적 친절은 흑인 미군들이 일본여성들과 사귀면서 일본인들을 “백인들”로 간주한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 “오락 및 놀이” 센터들은 도쿄에서 급속도로 확대되었고 – 한 설명에 의하면 곧 33개소가 되었다 – 약 20개의 다른 도시로 거의 같은 속도로 퍼져나갔다. 당연히도 그 센터들은 미군들 사이에 인기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것들 가운데서 그 센터들은 값이 쌌다. R.A.A. 매춘부와 짧게 시간을 보내는 가격은 15엔 즉, 1달러였는데 일본 시장에서 담배 반 갑의 가격과 거의 같았다. 그 가격의 두 세배이면 미군들은 매춘부들과 하룻밤을 지낼 수 있었다. 이 서비스로 인하여 강간과 성추행이 예방된 것은 아니지만, 점령군의 거대한 규모를 고려하면 강간사건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 일본정부가 바라던 바였지만.
자체의 인기와 승리자들로부터의 초기 지원에도 불구하고, R.A.A.는 점령 초기 몇 개월 동안만 존재했다. 1946년 1월, 점령군 당국은 모든 “공적인” 매춘의 폐지를 명령하면서 그 매춘이 비민주적이고 여성의 인권을 침해한다고 선언했다. 사사로이 당국은 그 동기가 미군들 사이에서 만연하여 증가하는 성병이었음을 인정했다. 몇 개월 후 매춘의 폐지가 발효될 때 쯤, R.A.A. 여성의 거의 90%가 검사를 받고 성병 감염의 양성반응을 보였다. 같은 기간에, 미 8군의 한 단위부대의 부대원 70%가 매독에 감염되었고 임질은 50%였다. 페니실린에 대한 최초의 미국 특허권이 그해 4월에 일본 제약회사에게 팔린 것은 그런 질병들을 주로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R.A.A.에 의하여 모집된 여성들은 퇴직금도 없이 해고되었지만 “국가에 봉사하여” 자신들의 순결은 아닐지라도 “순결에 대한 방어막”이었다는 고무적인 말을 들었다. 공식적인 공창(公娼) 폐지가 물론 매춘 자체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 사업은 더 개인적으로 수행되었을 따름이다 – 그리하여 성병은 자연히 통제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세의 변화는 정말로 귀중한 순간들을 낳았다. 외국인들을 위하여 특별히 만들어진 새로운 위안 시설 밖, 전통적으로 게이샤들이 모이는 “화류계” 인가를 받은 한 구역에서 공창(公娼)의 마지막 날이 유곽의 미국 국기가 붙은 벽 앞에 기모노를 입은 젊은 여성들이 서서 익숙한 축하의 만세 합창을 하면서 자신들을 팔을 들어 올리는 사진 속에 기억할만하게 기록되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수행하면서 일본 관리들은 인권에 대하여 드물고 특별히 뛰어난 공감을 보였다, 1946년 12월에, 내무성은 여성들도 매춘부가 될 권리를 지닌다고 선언했고 이것이, 그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지속적으로 영위할 것임을 모든 당사자들이 이해한 “적선(赤線: red-line)” 구역을 지정한 배경의 표면적인 이유가 되었다. (적선[赤線: red-line] 지정은 경찰이 사용하는 도시 지도 위의 표시들로부터 유래했다; 청색으로 표시된 지역에서는 그런 행위가 허용되지 않았다.) 다음해, “제3국” 출신이 많았던 55,000에서 70,000명으로 추정되는 여성들이 상근이나 시간제근무로 이 지역에서 일했다.
- 존 W. 다우어(John W. Dower) 저, “패배 수용하기(Embracing Defeat)”, 2000년, 124~132쪽. -
In the wake of the emperor’s surrender broadcast, rumors spread like wildfire that “the enemy, once landed. will violate women one after another.” The Home Ministry’s intelligence analysis immediately recognized the
link between these rumors and the behavior of their own forces abroad. As one internal police report put it,
“many of those who speak of pillage and rape, unsettling people’s minds, are returnees from the war front.”
Urban families were urged to send their womenfolk to the countryside. Women were advised to continue to
wear the baggy monpe pantaloons of the war years rather than more enticing feminine attire. Young girls were cautioned not to appear friendly. Still, it was taken for granted that the foreigners would demand sexual
gratification. The question was simply: who would provide it?
The government lost no time in answering this question. on August 18, the Home Ministry sent a secret
wireless message to regional police officials throughout the country instructing them to prepare special and
exclusive “comfort facilities” for the occupation army. Such preparations were to be made with maximum
discretion. Responsibility for staffing such facilities should be assumed by local chiefs of police, who were to mobilize local entrepreneurs and individuals already engaged in providing sexual services. on the same day,
high police officials in Tokyo met with “entrepreneurs” operating in the Tokyo-Yokohama area and promised
them 50 million yen in financial backing, with the understanding that they should raise a similar amount
themselves.
on the following day, Vice Premier Prince Konoe Fumimaro asked the national police commissioner to
personally take charge of this urgent matter. “Please defend the young women of Japan,” the prince, a former prime minister, is said to have implored him. Within a matter of days, however, a new approach would be taken. General Kawabe Torashiro, one of the officers who had met with General MacArthur and his staff in Manila to arrange the surrender, returned to Tokyo and urged that the government not become directly involved in
managing these facilities.
Thereafter, the government’s role consisted primarily of formally endorsing the project and providing it with loans and police support. The businessmen encouraged to undertake the task solicited private investment with a circular announcing official support from the Home Ministry, Foreign Ministry, Ministry of Finance, national
commissioner of police, and Tokyo municipal government. on September 6, the official Kangyo Bank advanced upwards of 30 million yen as the presumed first installment on a government loan for these activities. Ikeda Hayato, a rising young star in the Ministry of Finance who was instrumental in arranging government backing, was later quoted as saying that “a hundred million yen is cheap for protecting chastity.” The entrepreneurs
publicly expressed their gratitude for this lucrative opportunity to serve the nation by gathering in front of the
imperial palace and shouting “Long live the emperor!”
Enlisting a small number of women to serve as a buffer protecting the chastity of the “good” women of
Japan was well-established policy in dealing with Western barbarians. Special pleasure quarters had been set up for foreigners immediately after Commodore Perry forced the country to abolish its policy of seclusion, and in modern mythology one young woman who gave her body for the nation had already been glorified as a
patriotic martyr. Her name was Okichi, and she had been assigned as a consort for Townsend Harris, the first American consul, who assumed his duties in 1856. The procurers of 1945 appropriated her sad, sensual image in defining their own task. The women they were assembling, they declared, would be Showa no Tojin Okichi, “the Okichis of the present era.”
To the government’s surprise, professional prostitutes proved reluctant to become latter-day Okichis. By one account, they were fearful that the Americans, commonly portrayed as demonic figures in wartime propaganda, possessed oversized sexual organs that could injure them. The organizers of the special comfort facilities thus undertook to recruit ordinary women by posting a large signboard addressed “To New Japanese Women” in the Ginza district of downtown Tokyo. “As part of urgent national facilities to deal with the postwar,” this read,
somewhat vaguely, “we are seeking the active cooperation of new Japanese women to participate in the great
task of comforting the occupation force.” The solicitation also mentioned openings for “female office clerks,
aged between eighteen and twenty-five. Housing, clothing, and food supplied.”
Most of the women attracted by this advertisement arrived for their interviews shabbily dressed. Some, it is said, were even barefoot. The great majority had no experience in the “water trade” of the red-light districts,
and most left when informed what their actual duties would be. Among those who remained, some claimed to
be attracted not so much by the assurance of food and shelter as by the appeal to give their bodies “for the
country.” This was, after all, essentially the same message of patriotic self-sacrifice that had been drilled into them all their lives. By August 27, 1,360 women in Tokyo had enlisted in what soon would become known in
English as the R.A.A., short for 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 (Tokushu Ian Shisetsu Kyokai in
Japanese).
The next day, just as the first small contingents of occupation forces were arriving, an inaugural ceremony
for the R.A.A. was held in the plaza in front of the imperial palace. on this occasion, the following “oath”
couched in ornate Japanese, was read:
Although our family has endured for 3,000 years, unchanging as
mountains and valleys, the rivers and grasses, since the great
rending of August 15, 1945, which marked the end of an era, we
have been wracked with infinite, piercing grief and endless sorrow, and are
about to sink to the bottom of perilous, boundless desperation....
The time has come, an order has been given, and by virtue
of our realm of business we have been assigned the difficult
task of comforting the occupation army as part of the urgent
national facilities for postwar management. This order is heavy
and immense. And success will be extremely difficult....
And so we unite and go forward to where our belief lead us,
and through the sacrifice of several thousands of “Okichis of
our era” build a breakwater to hold back the raging waves and
defend and nurture the purity of our race, becoming as well an
invisible underground pillar at the root of the postwar social order....
A word as we conclude this proclamation. We absolutely are
not flattering the occupation force. We are not compromising our
integrity or selling our souls. We are paying an inescapable courtesy, and
serving to fulfill one part of our obligations and to contribute to the
security of our society. We dare say it loudly:
we are but offering ourselves for the defense of the national polity. We
reaffirm this. This is our proclamation.
A statement was also issued by the seven professional associations engaged in the water trade who were to run the Tokyo R.A.A. collectively. After paying solemn homage to “the great spirit of maintaining the national polity by protecting the pure blood of the hundred million,” these patriotic procurers moved with almost
breathtaking agility into facile new rhetoric of these rapidly changing times. Through the R.A.A., they declared, “we hope to promote mutual understanding between [the Allied occupation forces] and our people, and to
contribute to the smooth development of people’s diplomacy and abet the construction of a peaceful world.”
Several hundred GIs on that day quickly found their way to an R.A.A. facility in Tokyo’s Omori district,
where a small number of mostly inexperienced recruits had been gathered. Neither beds, futons, nor room
partitions were yet available, and fornication took place without privacy everywhere, even in the corridors.
Later Japanese accounts of the scene tend to be irate, speaking of shameless “animalistic intercourse” that
showed the “true colors” of so-called American civilization. The local police chief is said to have wept.
one naive recruit to the R.A.A. later recalled the terror of her first day, when she was called on to service
twenty-three American soldiers. By one estimate, R.A.A. women engaged between fifteen and sixty GIs a day. A nineteen-year-old who previously had been a typist committed suicide almost immediately. Some women
broke down and deserted. By mid-September, however, this grotesque exercise in “people’s diplomacy” had
become more or less routine. In his diary entry for September, 13, the writer Takami Jun recorded a
conversation with a taxi driver who reported seeing a woman in a flashy kimono – like something from an
operetta, he said – greeting an American soldier outside one of the comfort facilities. She leaped up, threw her arms around his neck, and said Harō - “Hello.” It was, for Japanese men, a depressing scene.
Since the greater part of Tokyo had been incinerated in the air raids, initially there were not many areas
where comfort facilities could be provided. In the latter part of September, Dr. Yosano Mitsuru, the head of the municipal government’s hygiene department (and eldest son of Yosano Akiko, a celebrated feminist and poet), was summoned by GHQ and asked to help apportion the prostitutes into separate districts to be reserved for use by U.S. officers, white enlisted men, and black enlisted men. Initially, women designed for use by black
soldiers were said to have been horrified – until they discovered that many black GIs treated them more kindly than the whites did. In their meticulous preoccupation with race and racial hierarchy, some Japanese concluded that such relative kindness derived from the fact that black soldiers had been socialized to regard them as
“whites.”
Such “recreation and amusement” centers expanded rapidly in Tokyo – there were soon thirty-three by one
account – and spread almost as quickly to some twenty other cities. Not surprisingly, they proved popular
among U. S. servicemen. They were, among other things, inexpensive. The price for a short visit with an
R.A.A. prostitute was 15 yen, or one dollar – about the same as half a pack of cigarettes on the Japanese
market. Two or three times that amount purchased an entire night of personal diplomacy. Although these
services did not prevent rape and assault, the incidence of rape remained relatively low given the huge size of
the occupation force – much as the government had hoped.
Despite its popularity and intial support from the victors, the R.A.A. did not survive the early months of the occupation. In January 1946, occupation authorities ordered the abolition of all “public” prostitution, declaring
it undemocratic and in violation of women’s human rights. Privately, they acknowledged that their major
motivation was an alarming rise in venereal disease among the troops. By the time the prohibition went into
effect a few months later, almost 90 percent of the R.A.A. women tested positive for infection. Around the
same time, syphilis was detected in 70 percent of the members of a single unit of the U. S. Eighth Army, and
gonorrhea in 50 percent. It was largely to combat such diseases that the first U. S. patents for penicillin were
sold to Japanese companies in April of that year.
The women who had been recruited by the R.A.A. were sent off without severance pay, but with uplifting
speeches to the effect that they had “served the country” and been a “dike of chastity,” albeit not their own.
Ending formal public prostitution did not, of course, mean the end of prostitution itself. The trade simply was
carried out more privately – and venereal disease naturally remained difficult to control. Nonetheless, the
transition did have its precious moments. Outside the new comfort facilities that had been created exclusively
for the foreigners, in one licensed quarter of the traditional geisha-centered “floating world,” the last day of
public prostitution was memorably recorded in a photograph of kimono-clad young women standing before
an American flag affixed to the wall of their brothel and throwing up their arms in the familiar bansai cheer of celebration.
In responding to SCAP’s orders, Japanese bureaucrats revealed a rare and unusually fine appreciation of
human rights. In December 1946, the Home Ministry declared that women had the right to become prostitutes, and this became the ostensible rationale behind designating “red-line” districts in which it was understood by
all parties that they would continue to ply their trade. (The “red-line” designation came from markings on the
city maps used by the police; in areas outlined in blue, such activity was not allowed). In the years that
followed, an estimated fifty-five thousand to seventy thousand women, many of “third country” origin,
worked these areas as full-time or part-time prostitutes.
- “Embracing Defeat” by John W. Dower, 2000, p 124~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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