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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Wisdom) - 버트런드 러셀 -

이윤진이카루스 2012. 4. 16. 10:31

지혜의 본질은 현실이라는 굴레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해방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감각이 지닌 이기주의를 피할 수 없다. 시각과 청각과 촉각은 우리의 육체와 묶여있어서 객관화될 수 없다. 우리의 감정은 유사하게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아기는 배고픔과 불편을 느끼고 동시에 자신의 육체적 상태에 의하지 않고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세월과 함께 점차 아기의 지평은 넓어지고 그의 사고와 느낌이 덜 주관적이 되고 자신의 육체적 상태와 덜 관련될수록 그는 지혜의 성장을 이룩한다. 이것은 물론 정도(程度)의 문제이다. 세상을 완벽하게 공명정대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는 살아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공(時空)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사물들을 앎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느낌으로 그런 사물들에게 합당한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공명정대함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가능하다. 지혜의 성장인 것은 공명정대함으로 향한 이 접근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지혜가 교육될 수 있을까? 그리고 교육될 수 있다면 지혜 교육이 교육의 한 목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두 가지 질문 모두를 긍정으로 답변해야겠다.

  - 버트런드 러셀, ‘기억으로부터의 초상(Portraits from Memory)’, 175~6쪽 -

 

   I think the essence of wisdom is emancipation, as far as possible, from the tyranny of the here and the now. We cannot help the egoism of our senses. Sight and sound and touch are bound up with our own bodies and cannot be made impersonal. Our emotions start similarly from ourselves. An infant feels hunger or discomfort, and is unaffected except by his own physical condition. Gradually with years, his horizon widens, and, in proportion as his thoughts and feelings become less personal and less concerned with his own physical states, he achieves growing wisdom. This is of course a matter of degree. No one can view the world with complete impartiality; and if anyone could, he would hardly be able to remain alive. But it is possible to make a continual approach toward impartiality, on the one hand, by knowing things somewhat remote in time and space, and, on the other hand, by giving to such things their due weight in our feelings. It is this approach toward impartiality that constitutes growth in wisdom.

   Can wisdom in this sense be taught? And, if it can, should the teaching of it be one of the aims of education? I should answer both these questions in the affirmative.

                         - Bertrand Russell, 'Portraits from Memory', p17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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