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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일본문명의 유래
앞장에 언급한 바와 같이, 서양의 문명은, 그 인간의 교류에 여러 주장을 병립하여 점차 서로 근접하여, 마침내 합쳐서 하나가 되어, 그로써 그 사이에 자유를 존치시킨 것이다. 이것을 비유하면 금은동철 등과 같은 여러 원소를 용해하여 한 덩어리로 하여,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또 동과 철도 아니고, 일종의 혼합물을 만들어 스스로 그 균형을 이루어, 상호 서로 유지하여 전체를 보존하는 것과 같다. 되돌아보아 우리 일본의 형편을 살피면 이것과 크게 다르다. 일본의 문명도 인간의 교류에 있어서 본래 요소가 없을 수 없다. 군주든지 귀족이든지, 종교든지 국민이든지, 모두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존재하여 각각 한 종족이 되어, 각각 자신의 주장이 없는 것이 아니라도, 그 여러 주장이 병립할 수 없고, 서로 근접할 수 없고, 합쳐서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다. 이것을 비유하면 금은동철이라는 여러 품목이 있더라도, 그것을 용해하여 한 덩어리가 되는 일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만약 혹은 합쳐서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일이 있다할지라도, 기실 여러 품목의 비율을 평균하여 혼합한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한쪽이 무겁고 한쪽이 가벼워, 하나로써 다른 것을 없애고, 다른 것으로써 그 본색을 드러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 금은의 화폐를 만드는 데 10분의 1의 구리를 섞는 것도, 구리는 그 본색을 드러낼 수 없고, 그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순수한 금은화폐인 것과 같다. 이것을 사물의 편중이라고 칭한다. 대체로 문명의 자유는 다른 자유를 희생하여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권리를 허락하고 여러 권익을 얻게 하고, 여러 의견을 수용하여 여러 힘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여, 타인과 나의 균형 사이에 존재할 뿐. 그러므로 인간의 교류에 있어서, 혹은 정부, 혹은 국민, 혹은 학자, 혹은 관리, 그 지위가 어떠한지를 묻지 않고, 다만 권력을 지닌 자가 있으면, 설령 지혜의 힘에서도 완력에서도, 그 힘이라고 칭하는 것에 관해서는 반드시 제한이 없을 수 없다. 대체로 인류가 지닌 권력은 결코 순수할 수 없다. 반드시 그 중에 천성적인 악폐를 배태하여, 혹은 비겁하기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혹은 과격하기 때문에 사물을 해치는 일, 천하 고금의 실례에 의하여 볼 수 있다. 이것을 편중의 재앙이라고 칭한다. 권력을 쥔 자는 항상 스스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문명을 서양의 문명에 비교하여, 그 의미가 다른 바는 특히 이 권력의 편중에 관해서 볼 수 있다.
일본에서 권력의 편중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인간교류의 한 가운데에 침투하여 도달하지 않은 곳이 없다. 본서의 제2장에서, 한 나라 국민의 기풍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곧 이 권력의 편중도, 저 기풍의 한 가운데 한 가지 항목이다. 지금의 학자, 권력에 관한 일을 논하는 데는, 다만 정부와 국민만을 상대하여, 혹은 정부의 전제에 분노하고 혹은 국민의 발호를 나무라는 자 많다고 할지라도, 충분히 사실을 상세히 하여 세밀히 음미하면, 이 편중은 교류의 지대한 것부터 지극히 작은 것에 미치고, 대소를 묻지 않고 공적인 것과 사사로운 것에 구애되지 않고, 적어도 여기에 교류가 있으면 그 권력은 편중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의미를 묘사하여 말하면, 일본 한 가운데 1100개 저울을 걸어, 그 저울 크고 작든, 전부 모두 한 방향에 치우쳐 균형을 잃은 것 같고, 혹은 3각 4면의 결정체를 부수어, 1000으로 나누고 10000으로 나누어 마침내 가루로 되는 것도, 그 한 분자는 여전히 3각 4면 본색을 잃지 않고, 또 이 가루를 합쳐서 하나의 작은 조각으로 만들고 또 합쳐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도, 그 물체는 여전하여 3각 4면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 같다. 권력편중을 일반적으로 개괄하여 사사건건 미세함과 치밀함의 극에 통달하는 형편은 이와 같다고 할지라도, 학자가 특별히 이것에 주의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다만 정부와 국민 사이는 교류가 크고 공적인 것이어서 두드러지게 사람의 이목을 끌기 때문에, 그 논의도 이것을 목적하는 것이 많을 뿐. 이제 실제적으로 편중이 있는 곳을 설명하겠다. 여기에 남녀의 교제가 있으면 남녀 권력의 편중이 있고, 여기에 부모와 아들의 교류가 있으면 부모와 아들 권력의 편중이 있고, 형제의 교류에서도 이것이 있고, 어른과 아이의 교류에도 이것이 있고, 집안에서 나와 세간을 보아도 역시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스승과 제자 주인과 종, 빈부귀천, 신참 고참, 본가와 먼 혈족, 어느 것도 모두 그 사이에 권력의 편중을 존재하게 했다. 더욱 한 걸음을 나아가 인간이 다소 종족을 이룬 바의 것에 관하여 보면, 봉건시대에 큰 번(藩)과 작은 번(藩)이 있고. 절에 본산(本山)과 말사(末寺)가 있고, 신사(神社)에 본사(本社)와 말사(末社)가 있어, 적어도 인간의 교류가 있으면 반드시 그 권력에 편중이 없음이 없다. 혹은 또 정부 가운데서도 관리의 지위와 계급에 따라 이 편중이 존재하는 것 매우 심하다. 정부의 관리가 평민을 대하여 위세를 떨치는 상황을 보면 이 권력이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이 관리가 정부의 가운데 있어서 상급자를 대할 때는, 그 억압을 받는 일이 평민이 관리를 대하는 것보다도 훨씬 심한 것이 있다. 비유건대 지방의 하급관리 등이 촌장을 함께 불러 일을 말할 때는 그 오만이 혐오스러울 것 같아도, 이 하급관리가 장관을 대하는 모양을 보면 역시 불쌍히 여기는 미소를 참고 있다. 촌장이 하급관리를 만나 무리하게 질타를 당하는 모양은 불쌍하더라도 마을에 돌아와 소작농을 무리하게 질타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 혐오스러울 것이다. 갑은 을에게 압제당하고 을은 병에게 제재를 받아, 강압과 억제의 순환, 끝이 있을 수 없다. 역시 기이한 광경이라고 할 수 있다. 본디 인간의 귀천과 빈부, 지혜와 어리석음과 강함과 약함의 부류는, 그 상황(컨디션: condition)에서 몇 단계도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이 단계를 존치시키는 것도 교류에 방해가 될 수 없다할지라도, 그 상황이 다른 것에 따라 겸하여 또 그 권리(라이트: right)도 다른 것이 많다. 이것을 권력의 편중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제 세간의 사물을 피상적으로 보면 권력을 가진 자는 다만 정부만 같아도, 충분히 정부가 어떤 것인지를 음미하여 그런 이유를 구하면, 조금 논의가 세밀한 것에 도달할 수 있다. 원래 정부는 국민이 모여 일을 하는 곳이다. 이 장소에 있는 자는 군주라 칭하고 관리라고 칭할 뿐. 그리고 이 군주와 관리는 태어나면서 요로에 있는 군주와 관리가 아니다. 설령 봉건시대에 관직을 세습하는 풍습이 있어도, 실제적으로 일을 맡은 자란 많게는 우연히 선발된 인물이다. 이 인물, 일단 정부의 지위에 오른다 해서, 갑자기 평소의 마음씨를 고칠 이치가 없다. 그 혹은 정부에 있어 권력을 자행하는 일이 있음은, 곧 평소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 증거에서는 봉건시대에서도 천민을 천거하여 정부의 요로에 고용한 일이 없지 아니할지라도, 그 인물의 소행을 보면 결코 기이한 것이 없다. 다만 이전의 행태에 따라 조금 일을 교묘하게 하는 것 밖에 없다. 그 교묘함은 곧 전횡의 교묘함이어서, 백성을 사랑하여 어리석게 하는 것이 아니면, 백성을 위협하여 위축되어 물러가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인물로 하여금 민간에 있도록 하면, 반드시 민간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촌에 있으면 촌에서 행동하고, 도시에 있으면 도시에서 행동하여, 도저히 우리 국민이 일반적으로 피할 수 없는 유행병이기에, 홀로 이 사람에 한하여 그것을 탈각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정부에 소속되면 그 사업이 성대하여 능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으로써,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유독 전횡의 근원이 아니고, 전횡하는 자들을 모이게 하는 중심이다. 전횡하는 자에게 자리를 빌려주어 평소의 본색을 드러내어 성대히 일을 시행하도록 하는 데 흡사 적당한 장소이다. 만약 그렇지 않아서 전횡의 근원이 특히 정부에 있다고 하면, 전국의 국민은 다만 관직에 있을 때만 이 유행병에 감염되어 전과 후는 과연 병이 없거나, 무례하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권력을 자행하는 것은 권력을 지닌 자의 공통적인 폐단이어서, 이미 정부에 있어 권력을 지니면 그 권력 때문에 스스로 현혹되어 더욱 이것을 가지고 노는 폐단도 있을 것이고, 혹은 또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전횡이 아니면 일을 수행할 수 없는 형국도 있을 것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인 국민에게서 평소의 교육과 습관에서 전혀 없는 바의 것을, 다만 정부의 지위에 알맞다고 해서 마음에 두어 업무에 시행하는 이유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 따르면, 권력을 자행하여 그 힘의 편중됨은 결코 정부뿐만 아니라, 이것을 전체 국민의 기풍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풍은 곧 서양 여러 나라와 우리 일본을 구별함에 두드러진 경계선이기에, 이제 여기에서 그 원인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할지라도, 그 일은 매우 어렵다. 서양인의 저서에 아시아 지역에 전횡이 횡행하는 원인은, 그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하기 때문에 인구가 과다하고, 지리는 산과 바다가 험악하고 광활한 것으로 인해 망상과 공포심이 심하다는 등에 있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 것도, 이 주장을 받아들여 직접적으로 우리 일본의 상황에 적용하여, 그로써 미심쩍은 점을 단정할 것인지, 아직 알 수 없다. 가령 이것에 의해서 미심쩍음을 단정하여도, 그 원인은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사람의 힘으로써 이것을 어떻게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다만 사건의 과정을 설명하고, 전횡이 이루지는 단계를 밝히고자 할 따름이다. 그 단계가 일단 밝혀지면 역시 이것에 대응하는 조치도 있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 일본이라는 나라도 개벽의 초기에 있어서는, 세계 중의 다른 여러 나라와 같이, 약간의 백성으로 한 무리를 이루어, 그 한 무리의 안에서 완력이 매우 강하고 지혜의 힘을 최대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가 있어 기배하거나, 혹은 다른 지방에서 와서 정복하여 그 우두머리가 된 일이리라. 역사에 의하면 신무천황(神武天皇)이 서쪽에서 군사를 일으킨 일이 있다. 한 무리의 백성을 지배함은 본래 한 사람의 힘으로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그 우두머리에 딸려 사무를 보는 자가 없을 수 없다. 그 인물은, 혹은 우두머리의 친척, 혹은 친구 안에서 뽑아, 함께 힘을 모아, 스스로 정부의 체제를 이룬 것이리라. 일단 정부의 체제를 이루면. 이 정부에 속한 자는 백성을 다스리는 자이고, 백성은 그 다스림을 받는 자이다. 이것 때문인가 처음에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구별이 생겨, 다스리는 자는 위이고 주인이고 또 내부이고, 다스림을 받는 자는 아래이고 객(客)이고 또 바깥이다. 상하와 주객과 내외의 구별, 명백하게 볼 수 있다. 생각건대 이 양자는 일본의 인간 교류에 있어서 매우 두드러진 경계선 이루어, 흡사 우리 문명의 두 가지 요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류한 종족이 적지 않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도달한 바는 이 두 가지 요소에 돌아가, 하나도 독립하여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 자가 없다.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서로 나뉘다)
사람을 다스림은 그 일이 본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이 다스리는 자의 무리에 가입하는 자는 반드시 완력과 지혜의 힘을 겸비하고 또 다소간의 재산이 없을 수 없다. 일단 몸과 마음이 힘이 있고, 또 이것에 부유함을 겸비할 때는, 반드시 사람을 통제하는 권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권력을 지닌 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왕실은 이 권력자의 위에 서서, 그 힘을 모아서 국내를 다스리고, 전쟁을 해서 이기지 않음이 없고, 정벌하여 항복시키지 않음이 없다. 또 다스림을 당하는 백성도, 왕실의 유래가 유구한 이유로써 더욱 복종하고, 신공(神功)왕후 시대부터 누차 외국으로 출정한 일도 있고, 국내에 위력을 보이고 혜택을 베풀어 국내를 돌아보아 근심이 없었던 것 미루어 알 수 있다. 이후 문화가 점차 열려, 양잠과 조선술, 직조와 바느질 기계 및 농기구, 의학서와 유교서 및 불교서적, 기타 문명의 여러 사항들이, 혹은 조선으로부터 전해지고, 혹은 자국에서 발명하여, 인간의 생생한 모습은 점차 성대함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이 문명의 제반 상항을 시행하는 권력은 모두 정부의 한 손에 달려, 백성은 다만 그 내용에 따를 뿐. 게다가 전국의 토지, 백성의 신체까지도, 왕실의 사유와 다르지 않음이 없다. 이 상황을 보면 다스림을 받는 자는 다스리는 자의 노예와 다르지 않다. 후세에 이르기까지도 어(御)국가, 어전지(御田地), 어백성(御百姓) 등의 명칭이 있다. 이 어(御)라는 글자는 정부를 존경한 말이어서, 일본의 논밭도 백성의 신체도 모두 정부가 소유한 물건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닌토구(仁徳) 천황이 민간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짐은 이미 부유하다고 했다는 것도, 분명히 백성을 사랑하는 본심에서 나와, 백성의 부유함은 오히려 내가 부유함 것과 같다는 의미이어서, 정말이지 마음을 비운 침착하고 인자한 군주라고 칭할 수 있을지라도, 천하를 한 가족으로 간주하여 이것을 사유화하는 기상을 살펴서 볼 수 있다. 이 추세에서 천하의 권력은 모두 왕실에 돌아가고, 그 힘, 항상 한편에 편중되어, 그로써 왕조시대의 말기에 다다랐다. 생각건대 권력의 편중은 앞에 언급한 것과 같이 지극히 큰 것에서부터 지극히 세세한 것에 이르러, 인간의 교류를 천만가지로 나누면 천만가지의 단계로 된 편중이 나타나고, 모아서 백으로 만들면 백가지 단계의 편중이 나타나, 이제 왕실과 백성의 두 가지 단계로 나누면, 편중도 역시 이 사이에 생겨나, 왕실의 한 편에 편중되는 것이다. (국력은 왕실에 편중된다)
켄페(源平: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 두 가문이 일어나는 데 이르러 천하의 권력은 무사가문에 돌아가고, 이것에 의하여 혹은 왕실과 균형을 이루어, 인간교류의 추세가 일변할 수 있을 것 같다하여도, 결코 그렇지 않다. 켄페(源平)든지, 왕실이든지, 모두 이 다스리는 자 가운데의 부분이어서, 국권이 무사가문에 돌아감은 다스리는 자 가운데서 이 부분에서 저 부분으로 힘을 옮겼을 뿐.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관계는 여전하여 상하 주객의 추세를 갖추어, 조금도 옛날과 다른 것이 없다. 단지 다른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앞서서 고닌(光仁) 천황은 호키(宝亀)시대에 천하에 명령을 내려 병사와 농부로 나누어, 백성에게서 부유하고 무력이 있는 자를 뽑아 병역에 쓰고, 초췌한 자로 하여금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명령의 취지에 따르면, 백성 중에 부유하고 강한 자는 무력으로써 약소한 자를 보호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는 농사에 힘써 무사에게 공급하는 것이라면, 가난하고 약한 것은 더욱 가난과 약함에 빠지고, 부강은 더욱 부유함과 강함으로 나아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경계선이 더욱 확연하여, 권력의 편중은 더욱 심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여러 서적을 생각건대, 요리토모(頼朝)가 60여주의 총사령관이 되어, 나라마다 치안관을 두고, 장원(荘園)에는 책임자를 임명하여, 그로써 종전의 지방관과 장원관리관의 권한을 약화시킨 이후, 여러 나라의 무사들 가운데서 혈통도 있고 인품도 지닌 자는 치안관과 장원책임자의 직에 임명하고, 이하의 사람은 고케닌(御家人)이라 칭하여 지방관과 장원책임자의 지배를 받고, 모두 막부의 부하가 되었고, 혹은 백일교대(百日交代: 지방 관리들이 백일마다 교대로 수도에 와서 인질로 근무하는 것)로 가마쿠라(鎌倉)에 숙영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호조(北条)시대에도 대개 동일한 형편이어서, 나라 안 어디에도 무사가 없는 곳이 없다. 조큐(承久)의 난에 야스토키(泰時)가 18 기병으로 가마쿠라(鎌倉)를 세운 것은 5월 22일의 일인데, 같은 달 25일까지 사흘간에 관동지역의 병사를 모두 모아, 도합 19만 기병이 되었다 한다. 이것에 의하여 생각하면, 여러 나라의 무사인 자는 평소부터 출진하려는 준비에 바빠, 본디 농업에 힘쓸 여가가 있을 수 없고, 분명히 다른 백성의 힘에 의지하여 먹고 산 일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병역과 농업의 경계선이 더욱 명백하게 정해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무사의 수도 점차 증가한 것이리라. 요리토모(頼朝)의 시대에는 대체로 관동의 섬기는 무사가문으로써 여러 나라를 수비하는 데 배치하여, 3, 5년의 교대였는데, 그 후 무기한으로 대대로 세습적으로 봉록을 받는 직책이 되고, 호조(北条)가 망하고 아시카가(足利)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 치안관이라는 자, 번갈아 서로 병탄하고, 혹은 흥하고 혹은 망하고, 혹은 토호에게 쫓기고. 혹은 신하에게 빼앗겨, 점차 봉건적 추세를 이루었던 것이다. 왕조시대 이래의 형편을 개괄적으로 말하면, 일본의 무사, 처음에는 국내의 처소에 분산하여 각자 권력을 휘둘러, 그로써 왕실의 명령에 복종한 것은,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이르기까지 점차 합쳐서 몇 개의 소집단을 이루어, 처음으로 다이묘(大名)과 쇼묘(小名)의 칭호가 생겼다. 아시카가(足利) 시대에 이르러서는 또 합쳐서 몸체가 큰 것을 이루었어도, 그 몸체와 다른 몸체를 합칠 수 없다. 즉 오닌(応仁) 이후 난세여서, 무사가 최고로 번성한 시대이다. 이와 같이, 무사의 세계에는 이합집산이 일어나고 진퇴영고(進退栄枯)가 있어도, 백성의 세계에서는 하등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한다. 다만 농업에 힘써 무사의 세계에 보낼 뿐이다. 그러므로 백성의 눈으로 보면, 왕실도 무사의 가문도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무사의 세계에 치세와 난세와 흥망이 있는 것은, 백성을 위해서는 흡사 날씨와 기후의 변화가 있음과 다르지 않다. 다만 말없이 그 과정을 볼 따름이다.《무사의 가문이 흥해서 신정정치의 미혹을 일소한 소득은 제2장 35쪽에 (이와나미[岩波] 문고 구판 33항) 논했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주장에, 천하의 대세는 아홉 번 변하여 무사가문의 시대가 되고, 무사 가문의 세대 또한 다섯 번 변하여 도쿠가와(徳川)의 시대에 이르렀다고 하여, 그 외에 여러 연구가들의 주장도 대동소이하여도, 이 주장은 다만 일본에서 정권을 잡는 사람의 신진교대(新陳交代)한 모양을 보고 몇 번이라고 할 따름인 것이다. 모두 이때까지 일본에서 이루어진 역사는 오직 왕실의 계보를 탐구한 것이거나, 혹은 임금과 재상과 벼슬아치의 득실을 논하는 것이거나, 혹은 전쟁과 승패의 이야기를 기록하여 강역사(講釈師: 이야기꾼 혹은 야담가)의 전쟁이야기와 비슷한 것이거나, 대체로 이런 항목 밖에 없다. 드물게 정부와 관계가 없는 것이 있다면 불교도의 거짓말과 허망한 주장뿐, 역시 볼 필요가 없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일본의 역사는 없고 일본정부의 역사가 있을 뿐이다. 학자의 부주의여서 나라의 큰 결함이라고 할 수 있다. 아라이(新井) 선생의 독사여론(読史余論)이라는 것도 곧 이런 부류의 역사여서, 그 책 가운데 천하의 추세가 변한다고 되어있어도, 실은 천하의 대세가 변함이 아니고, 천하의 추세는 일찍이 이미 왕조시대에 정해져, 다스리는 사람과 다스림을 받는 사람 두 가지 요소로 구별하고, 군사와 농업으로 나누는 데 이르러 더욱 그 경계선을 분명히 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왕조시대의 말기에 후지와라(藤原) 가문, 권력을 독점하여, 혹은 상황(上皇), 정치를 자문하는 일이 있어도, 다만 왕실 내부의 일이어서 본디 세상의 형편과 관계가 있을 수 없다. 다이라(平) 가문이 망하고 미나모토(源) 가문이 일어나서, 새로이 가마쿠라(鎌倉)에 정부를 열어도, 호조(北条)가 신하로 국가의 명령을 집행함도, 아시카가(足利)가 남조(南朝)에 대항하여 역적으로 불리는 것도, 오다(織田)와 도요토미(豊臣)와 도쿠가와(徳川)가 각각 일본을 통솔하여 지배했다 하는 것도, 지배하는 데 다만 유능하고 졸렬함이 있을 뿐. 천하의 형세는 여전하여 옛날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호조(北条)와 아시카가(足利)에서 즐거웠던 것은 도쿠가와(徳川)도 그것을 기뻐했고, 갑(甲)이 근심했던 것은 을(乙)도 그것을 근심하여, 그 기뻐함과 근심함에 대처하는 방법도 갑과 을에 있어서 조금도 다른 바가 없다. 비유건대 호조(北条)와 아시카가(足利)의 정부에서 오곡이 풍부하게 익어 백성이 유순함을 기뻐하는 심정은, 도쿠가와(徳川)의 정부도 그것에서 같다. 호조(北条)와 아시카가(足利)의 정부에서 두려워하는 바의 모반자의 종류는, 도쿠가와(徳川) 시대에서도 그 종류가 다르지 않다. 회고하여 저 유럽 여러 나라의 형편을 보면 크게 의미가 다른 바가 있다. 그 국민 사이에 종교적 교설에 관한 새로운 주장이 점점 유행하면 정부도 역시 그것에 따라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에는 봉건적 귀족만을 두려워했지만, 세간의 상공업이 점차 번성하여 중산층에서 권력을 지닌 자가 있기에 이르면, 역시 이것을 기뻐하고 혹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유럽의 각 국가에서는 그 국가의 추세가 변하는 데 따라서 정부도 역시 그 취지를 바꾸지 않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오직 일본은 그렇지 않다. 종교적 교설도 학문도 상업도 공업도 모두 정부 안에서 농락당하는 것이어서, 그 변동을 근심할 필요가 없고, 또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만약 정부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언제나 그것을 금지할 수 있다. 유일한 걱정은 같은 부류 중에서 일어나는 자가 있어 정부가 신진교대(新陳交代)하는 것을 두려워할 뿐.《같은 부류 중에서 일어나는 자라는 것은 다스리는 자 중에서 일어나는 자를 말한다》그러므로 건국 2500여 년간, 나라의 정부라는 것은 동일한 모양의 일을 반복하여, 그 모양이 흡사 한 권의 책을 반복해서 여러 번 읽은 것과 같고, 같은 제목의 연극을 몇 번이고 공연하는 것과 같다. 아라이(新井) 씨가 천하의 대세 아홉 번 변하고 또 다섯 번 변했다고 하는 것은, 곧 이 연극을 아홉 번 공연하고 또 다섯 번 공연했다는 것일 뿐. 혹은 서양인의 저서에, 아시아주의 여러 나라에서도 변혁과 소동이 일어남은 유럽과 다르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 변란 때문에 나라의 문명을 진척시키는 일이 없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생각건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신구 교체하여도 국가의 추세는 변하는 일이 없다)
위와 같이 정부는 때때로 변혁을 번갈아 일으키는 일이 있어도, 국가의 형편은 곧 그렇지 않아, 그 권력은 항상 한 편에 편중되어, 흡사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사이에 높고 큰 장벽을 만들어 그 통로를 끊은 것 같다. 형태가 있는 완력도 형태가 없는 지혜와 덕행도, 학문도 종교도, 모두 다스리는 자의 무리에 참여하여, 그 무리들은 번갈아 서로 의지하여 각각 권력을 늘이고, 재산도 여기에 모이고 재능도 여기에 모여, 영욕(榮辱)도 여기에 있고 염치도 여기에 있고, 멀리 상류의 지위를 차지하여 하류 백성을 지배하여, 치세와 난세와 흥망, 문명의 진보, 모두 다스리는 자가 아는 바이고, 다스림을 받는 자는 전혀 마음에 이것을 관여하지 않고, 태연히 길가의 일을 보고 듣는 것 같다. 비유건대 옛날부터 일본에 전쟁이 일어났다. 혹은 고에츠(甲越)의 접전이라 하고, 혹은 죠코쿠(上國: 수도 지역)와 관동(關東)의 전투라고 하고, 그 명칭을 들으면 양국이 서로 적대하여 싸우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전투는 다만 양국의 무사와 무사의 싸움이어서, 백성은 전혀 이것에 관계하는 일이 없다. 원래 적국이라는 것은 전국의 백성이 일반적인 마음으로써 서로 적대하는 것이어서, 설령 스스로 무기를 휴대하고 전장을 향하지 않아도, 자기 나라의 승리를 원하고 적국의 불행을 기원하고, 사사건건 하찮은 일에 이르기까지도 적과 아군의 의미를 잊지 않는 것이야, 진실로 적대적인 두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백성이 지닌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은 이 부근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전쟁에 있어서는 옛날부터 그런 사례를 보지 못한다. 전쟁은 무사와 무사의 싸움이지, 백성과 백성의 싸움이 아니다. 가문과 가문의 싸움이지, 나라와 나라의 싸움이 아니다. 두 가문의 무사, 전쟁을 시작할 때는, 백성이 그것을 방관하여, 적에게서도 아군에게서도 다만 강한 자를 두려워할 뿐. 그러므로 전쟁에 즈음하여, 쌍방의 깃발의 색깔을 따라서, 어제 아군의 군수품을 운송한 자도 오늘은 적의 군량미를 질 수 있다. 승패가 결정되어 전쟁을 끝내는 때는, 백성은 소동이 진정되어 장원책임자가 바뀌는 것을 볼 따름. 그 승리를 영예로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 패배를 모욕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혹은 새로운 장원책임자의 정치적 명령이 관대하여 연공미(年貢米: 매년 세금으로 내는 쌀)가 높은 것을 감액하는 일이라도 있으면 이것을 우러러 기뻐할 따름. 그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말하겠다. 고호조(後北条) 국은 관동 8주이다. 일단 도요토미(豊臣)와 도쿠가와(徳川)가 적대하여 패망이 발생하면, 패망 후 곧바로 8주를 지배한 자는 원수인 도쿠가와(徳川)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어떤 인물이기에 일시에 8주의 많은 적을 복종시킬 수 있는가? 생각건대 8주의 백성은 적도 아니고 아군도 아니고, 호조(北条)와 도요토미(豊臣)의 전쟁을 구경한 사람들이다. 도쿠가와(徳川)가 관동으로 옮겨 후에 적의 잔당을 진압하여 토벌했다는 것은, 다만 호조(北条) 가문의 남은 신하들을 토벌했을 뿐인 일이어서, 농부들과 상인들 등의 처리에 이르러서는 흡사 손으로써 머리를 만지는 즉시 안도하였던 것이다. 이것 등등의 사례를 헤아리면 옛날부터 하나하나 열거할 겨를이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도 아직 변한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본은 옛날부터 아직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만약 이 전체 국가로써 외국을 적대하는 등의 일이 일어나면, 일본 가운데의 백성에게서 설사 무기를 휴대하고 출진하지 않아도 싸우는 일에 심적으로 관여하는 자를 전사(戰士)라고 칭하고, 이 전사(戰士)의 수와 저 소위 구경꾼의 수를 비교하여 누가 많을 것인지, 미리 헤아려 알 수 있다. 일찍이 내가 주장 바에, 일본에서는 정부가 있되 국민은 (네이션: nation) 없다고 한 것도 이런 의미이다. 본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전쟁에 의하여 타국의 토지를 합병하는 일이 여러 차례 있어도, 이것을 합병하는 일이 매우 쉽지 않고, 비상한 병력으로써 압도하거나, 어쩌면 그 토지의 백성과 약속하여 얼마간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을 우리 국토에 편입시킬 수 없다고 한다. 동양과 서양의 백성이 그 기풍을 달리하는 것으로써 알 수 있다. (일본의 백성은 국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巻之五
第九章 日本文明の由来
前章に云へる如く、西洋の文明は、其人間の交際に諸説の並立して漸く相近づき、遂に合して一と為り、以て其間に自由を存したるものなり。之を譬へば金銀銅鉄等の如き諸元素を鎔解して一塊と為し、金に非ず、銀に非ず、又銅鉄に非ず、一種の混和物を生じて自から其平均を成し、互に相維持して全体を保つものゝ如し。顧て我日本の有様を察すれば大に之に異なり。日本の文明も其人間の交際に於て固より元素なかる可らず。立君なり貴族なり、宗教なり人民なり、皆古より我国に存して各一種族を為し、各自家の説なきに非ざれども、其諸説並立するを得ず、相近づくを得ず、合して一と為るを得ず。之を譬へば金銀銅鉄の諸品はあれども、之を鎔解して一塊と為すこと能はざるが如し。若し或は合して一と為りたるが如きものありと雖ども、其実は諸品の割合を平均して混じたるに非ず。必ず片重片軽、一を以て他を滅し、他をして其(その)本色を顕はすを得せしめざるものなり。猶かの金銀の貨幣を造るに十分一の銅を混合するも、銅は其本色を顕はすを得ずして、其造り得たるものは純然たる金銀貨幣なるが如し。之を事物の偏重と名く。抑も文明の自由は他の自由を費して買ふ可きものに非ず。諸の権義を許し諸の利益を得せしめ、諸の意見を容れ諸の力を逞ふせしめ、彼我平均の間に存するのみ。或は自由は不自由の際に生ずと云ふも可なり。故に人間の交際に於て、或は政府、或は人民、或は学者、或は官吏、其地位の如何を問はず、唯権力を有する者あらば、仮令ひ智力にても腕力にても、其力と名るものに就ては必ず制限なかる可らず。都て人類の有する権力は決して純精なるを得べからず。必ず其中に天然の悪弊を胚胎して、或は卑怯なるがために事を誤り、或は過激なるがために物を害すること、天下古今の実験に由て見る可し。之を偏重の禍と名く。有権者常に自から戒めざる可らず。我国の文明を西洋の文明に比較して、其趣の異なる所は特に此権力の偏重に就て見る可し。
日本にて権力の偏重なるは、洽ねく其人間交際の中に浸潤して至らざる所なし。本書第二章に、一国人民の気風と云へることあり。即ち此権力の偏重も、かの気風の中の一箇条なり。今の学者、権力の事を論ずるには、唯政府と人民とのみを相対して、或は政府の専制を怒り或は人民の跋扈を咎る者多しと雖ども、よく事実を詳にして細に吟味すれば、此偏重は交際の至大なるものより至小なるものに及び、大小を問はず公私に拘はらず、苟も爰に交際あれば其権力偏重ならざるはなし。其趣を形容して云へば、日本国中に千百の天秤を掛け、其天秤大となく小となく、悉く皆一方に偏して平均を失ふが如く、或は又三角四面の結晶物を砕て、千分と為し万分と為し遂に細粉と為すも、其一分子は尚三角四面の本色を失はず、又この砕粉を合して一小片と為し又合して一塊と為すも、其物は依然として三角四面の形を保つが如し。権力偏重の一般に洽ねくして事々物々微細緻密の極にまで通達する有様は斯の如しと雖ども、学者の特に之に注意せざるは何ぞや。唯政府と人民との間は交際の大にして公なるものにて著しく人の耳目に触るゝが故に、其議論も之を目的とするもの多きのみ。今実際に就て偏重の在る所を説かん。爰に男女の交際あれば男女権力の偏重あり、爰に親子の交際あれば親子権力の偏重あり、兄弟の交際にも是あり、長幼の交際にも是あり、家内を出でゝ世間を見るも亦然らざるはなし。師弟主従、貧富貴賎、新参故参、本家末家、何れも皆其間に権力の偏重を存せり。尚一歩を進めて人間の稍や種族を成したる所のものに就て之を見れば、封建の時に大藩と小藩あり、寺に本山と末寺あり、宮に本社と末社あり、苟も人間の交際あれば必ず其権力に偏重あらざるはなし。或は又政府の中にても官吏の地位階級に従て此偏重あること最も甚し。政府の吏人が平民に対して威を振ふ趣を見ればこそ権あるに似たれども、此吏人が政府中に在て上級の者に対するときは、其抑圧を受ること平民が吏人に対するよりも尚甚しきものあり。譬へば地方の下役等が村の名主共を呼出して事を談ずるときは其傲慢厭ふ可きが如くなれども、此下役が長官に接する有様を見れば亦愍笑に堪へたり。名主が下役に逢ふて無理に叱らるゝ模様は気の毒なれども村に帰て小前の者を無理に叱る有様を見れば亦悪む可し。甲は乙に圧せられ乙は丙に制せられ、強圧抑制の循環、窮極あることなし。亦奇観と云ふ可し。固より人間の貴賎貧富、智愚強弱の類は、其有様(コンヂ-ション)にて幾段も際限ある可らず。此段階を存するも交際に妨ある可らずと雖ども、此有様の異なるに従て兼て又其権義(ライト)をも異にするもの多し。之を権力の偏重と名るなり。
今世間の事物を皮相すれば有権者は唯政府のみの如くなれども、よく政府の何物たるを吟味して其然る由縁を求めなば、稍や議論の密なるものに達す可し。元来政府は国人の集りて事を為す処なり。此場所に在る者を君主と名け官吏と名るのみ。而して此君主官吏は生れながら当路の君主官吏に非ず。仮令ひ封建の時代に世位(せいゐ)世官(せいかん)の風あるも、実際に事を執る者は多くは偶然に撰ばれたる人物なり。此人物、一旦政府の地位に登ればとて、忽ち平生の心事を改るの理なし。其或は政府に在て権を恣にすることあるは、即ち平生の本色を顕はしたるものゝみ。其証拠には封建の時代にても賎民を挙て政府の要路に用ひたることなきに非ずと雖ども、其人物の所業を見れば決して奇なるものなし。唯従前の風に従て少しく事を巧にするより外ならず。其巧は即ち擅権(せんけん)の巧にて、民を愛して愚にするに非ざれば、之を威して退縮せしむるものなり。若し此人物をして民間に在らしめなば、必ず民間に在て此事を行ふ可し。村に在らば村にて行ひ、市に在らば市にて行ひ、到底我国民一般に免かる可らざるの流行病なれば、独り此人に限て之を脱却することある可らず。唯政府に在れば其事業盛大にしてよく世間の耳目に触るゝを以て、人の口吻にも掛ることなり。故に政府は独り擅権の源に非ず、擅権者を集会せしむるの府なり。擅権者に席を貸して平生の本色を顕はし盛に事を行はしむるに恰も適当したる場所なり。若し然らずして擅権の源は特に政府に在りとせば、全国の人民は唯在官の間のみ此流行病に感じて前後は果して無病なる乎、不都合なりと云ふ可し。抑も権を恣にするは有権者の通弊なれば、既に政府に在て権を有すれば其権のために自から眩惑して益これを弄ぶの弊もあらん、或は又政府一家の成行にて擅権に非ざれば事を行ふ可らざるの勢もあらんと雖ども、此一般の人民にして平生の教育習慣に絶てなき所のものを、唯政府の地位に当ればとて頓に之を心に得て事に施すの理は万々ある可らざるなり。
右の議論に従へば、権を恣にして其力の偏重なるは決して政府のみに非ず、之を全国人民の気風と云はざるを得ず。此気風は即ち西洋諸国と我日本とを区別するに著しき分界なれば、今爰に其源因を求めざる可らずと雖ども、其事甚だ難し。西人の著書に亜細亜洲に擅権の行はるゝ源因は、其気候温暖にして土地肥沃なるに由て人口多きに過ぎ、地理山海の険阻洪大なるに由て妄想恐怖の念甚しき等に在りとの説もあれども、此説を取て直に我日本の有様に施し、以て事の不審を断ず可きや、未だ知る可らず。仮令ひ之に由て不審を断ずるも、其源因は悉皆天然の事なれば人力を以て之を如何ともす可らず。故に余輩は唯事の成行を説て、擅権の行はるゝ次第を明にせんと欲するのみ。其次第既に明ならば亦これに応ずるの処置もある可し。抑も我日本国も開闢の初に於ては、世界中の他の諸国の如く、若干の人民一群を成し、其一群の内より腕力最も強く智力最も逞しき者ありて之を支配する歟、或は他の地方より来り之を征服して其酋長たりしことならん。歴史に拠れば神武天皇西より師を起したりとあり。一群の人民を支配するは固より一人の力にて能(よく)す可きことに非ざれば、其酋長に附属して事を助る者なかる可らず。其人物は、或は酋長の親戚、或は朋友の内より取て、共に力を合せ、自から政府の体裁を成したることならん。既に政府の体裁を成せば、此政府に在る者は人民を治る者なり、人民は其治を被る者なり。是に於てか始て治者と被治者との区別を生じ、治者は上なり主なり又内なり、被治者は下なり客なり又外なり。上下主客内外の別、判然として見る可し。蓋し此二者は日本の人間交際に於て最も著しき分界を為し、恰も我文明の二元素と云ふ可きものなり。往古より今日に至るまで交際の種族は少なからずと雖ども、結局其至る所は此二元素に帰し、一も独立して自家の本分を保つものなし。(治者と被治者と相分る)
人を治るは其事固より易からず。故に此治者の党に入る者は必ず腕力と智力と兼て又多少の富なかる可らず。既に身心の力あり、又これに富有を兼るときは、必ず人を制するの権を得べし。故に治者は必ず有権者ならざるを得ず。王室は此有権者の上に立ち、其力を集めて以て国内を制し、戦て克たざるはなし、征して降さゞるはなし。且被治者なる人民も、王室の由来久しきの故を以て益これに服従し、神后の時代より屢外征の事もあり、国内に威福の行はれて内顧の患なかりしこと推して知る可し。爾後人文漸く開け、養蚕造船の術、織縫耕作の器械、医儒仏法の書、其他文明の諸件は、或は朝鮮より伝へ、或は自国にて発明し、人間生々の有様は次第に盛大に及ぶと雖ども、此文明の諸件を施行するの権は悉皆政府の一手に属し、人民は唯其指揮に従ふのみ。加之全国の土地、人民の身体までも、王室の私有に非ざるはなし。此有様を見れば被治物は治者の奴隷に異ならず。後世に至るまでも御国、御田地、御百姓等の称あり。此御の字は政府を尊敬したる語にて、日本国中の田地も人民の身体も皆政府の私有品と云ふ義なり。仁徳天皇民家に炊煙の起るを見て朕既に富めりと云ひしも、必竟愛人の本心より出て、民の富むは猶我富むが如しとの趣意にて、如何にも虚心平気なる仁君と称す可しと雖ども、天下を一家の如く視做して之を私有するの気象は窺ひ見る可し。此勢にて天下の権は悉く王室に帰し、其力、常に一方に偏して、以て王代の末に至れり。蓋し権力の偏重は前に云へる如く至大より至細に至り、人間の交際を千万に分てば千万段の偏重あり、集めて百と為せば百段の偏重あり、今王室と人民との二段に分てば、偏重も亦此間に生じて、王室の一方に偏したるものなり。(国力王室に偏す)
源平の起るに及んで天下の権は武家に帰し、之に由て或は王室と権力の平均を為し、人間交際の勢一変す可きに似たれども、決して然らず。源平なり、王室なり、皆是れ治者中の部分にて、国権の武家に帰したるは治者中の此部分より彼部分に力を移したるのみ。治者と被治者との関係は依然として上下主客の勢を備へ、毫も旧時に異なることなし。啻に異なることなきのみならず、曩(さき)に光仁天皇宝亀年中天下に令を下だして兵と農とを分ち、百姓の富て武力ある者を撰て兵役に用ひ、其羸弱(るいじやく)なる者をして農に就かしめたりとあり。此令の趣意に従へば、人民の富て強き者は武力を以て小弱を保護し、其貧にして弱き者は農を勉めて武人に給することなれば、貧弱は益貧弱に陥り、富強は益富強に進み、治者と被治者との分界益判然として、権力の偏重は益甚しからざるを得ず。諸書を案ずるに、頼朝が六十余州の総追捕使と為りて、毎国に守護を置き、荘園に地頭を補し、以て従前の国司荘司の権を殺ぎしより以来、諸国の健児の内にて筋目もあり人をも持つ者は守護地頭の職に任じ、以下の者は御家人と称して守護地頭の支配を受け、悉皆幕府の手の者と為りて、或は百日交代にて鎌倉に宿衛するの例もありと云ふ。北条の時代にも大抵同じ有様にて、国中処として武人あらざるはなし。承久の乱に泰時十八騎にて鎌倉を打立たるは五月二十二日のことなるが、同二十五日まで三日の間に東国の兵尽く集りて、都合十九万騎とあり。是れに由て考れば、諸国の武人なる者は平生より出陣の用意に忙はしく、固より農業を勉るの暇ある可らず、必ず他の小民の力に依て食ひしこと明に知る可し。兵農の分界愈明に定りて、人口の増加するに従ひ武人の数も次第に増したることならん。頼朝の時には概ね関東伺候の武家を以て諸国の守護に配し、三、五年の交代なりしが、其後いつとなく譜代世禄の職と為り、北条亡びて足利の代に至ては、此守護なる者、互に相併呑し、或は興り或は廃し、或は土豪に逐はれ或は家来に奪はれ、漸く封建の勢を成したるなり。王代以来の有様を概して云へば、日本の武人、始は国内の処在に布散して一人一人の権を振ひ、以て王室の命に服したるもの、鎌倉の時代に至るまでに漸く合して幾個の小体を成し、始て大小名の称あり。足利の代に至りては又合して体の大なるものを成したれども、其体と体と合するを得ず。即ち応仁以後の乱世にて、武人の最も盛なる時なり。斯の如く、武人の世界には合離集散あり進退栄枯あれども、人民の世界には何等の運動あるを聞かず。唯農業を勉めて武人の世界に輸するのみ。故に人民の目を以て見れば、王室も武家も区別ある可らず。武人の世界に治乱興敗あるは、人民のためには恰も天気時候の変化あるに異ならず。唯黙して其成行を見るのみ。《武家興て神政府の惑溺を一掃したるの利益は第二章三十五葉(岩波文庫旧版三三頁)に論じたり》
新井白石の説に、天下の大勢九変して武家の代と為り、武家の世又五変して徳川の代に及ぶと云ひ、其外諸家の説も大同小異なれども、此説は唯日本にて政権を執る人の新陳交代せし模様を見て幾変と云ひしのみのことなり。都てこれまで日本に行はるゝ歴史は唯王室の系図を詮索するもの歟、或は君相有司の得失を論ずるもの歟、或は戦争勝敗の話を記して講釈師の軍談に類するもの歟、大抵是等の箇条より外ならず。稀に政府に関係せざるものあれば仏者の虚誕妄説のみ、亦見るに足らず。概して云へば日本国の歴史はなくして日本政府の歴史あるのみ。学者の不注意にして国の一大欠典と云ふ可し。新井先生の読史余論なども即ち此類の歴史にて、其書中に天下の勢変とあれども、実は天下の大勢の変じたるに非ず、天下の勢は早く既に王代の時に定まりて、治者と被治者との二元素に区別し、兵農の分るゝに及て益この分界を明にして、今日に至るまで一度びも変じたることなし。故に王代の末に藤原氏、権を専にし、或は上皇、政を聴くことあるも、唯王室内の事にて固より世の形勢に関係ある可らず。平家亡びて源氏起り、新に鎌倉に政府を開くも、北条が陪臣にて国命を執るも、足利が南朝に敵して賊と称せらるゝも、織田も豊臣も徳川も各日本国中を押領して之を制したれども、其これを制するに唯巧拙あるのみ。天下の形勢は依然として旧に異ならず。故に北条足利にて悦びしことは徳川も之を喜び、甲の憂ひしことは乙も之を憂ひ、其喜憂に処するの法も甲乙に於て毫も異なることなし。譬へば北条足利の政府にて五穀豊熟人民柔順を喜ぶの情は、徳川の政府も之に同じ。北条足利の政府にて恐るゝ所の謀反人の種類は、徳川の時代にても其種類を異にせず。顧て彼の欧洲諸国の有様を見れば大に趣の異なる所あり。其国民の間に宗旨の新説漸く行はるれば政府も亦これに従て処置を施さゞる可らず。昔日は封建の貴族をのみ恐れたりしが、世間の商工次第に繁昌して中等の人民に権力を有する者あるに至れば、亦これを喜び或は之を恐れざる可らず。故に欧羅巴の各国にては其国勢の変ずるに従て政府も亦其趣を変ぜざる可らずと雖ども、独り我日本は然らず、宗旨も学問も商売も工業も悉皆政府の中に籠絡したるものなれば、其変動を憂るに足らず、又これを恐るゝに足らず、若し政府の意に適せざるものあれば輙ち之を禁じて可なり。唯一の心配は同類の中より起る者ありて、政府の新陳交代せんことを恐るゝのみ。《同類の中より起る者とは治者の中より起る者を云ふ》故に建国二千五百有余年の間、国の政府たるものは同一様の仕事を繰返し、其状恰も一版の本を再々復読するが如く、同じ外題の芝居を幾度も催ふすが如し。新井氏が天下の大勢九変又五変と云ひしは、即ち此芝居を九度び催ふし又五度び催ふしたることのみ。或る西人の著書に、亜細亜洲の諸国にも変革騒乱あるは欧羅巴に異ならずと雖ども、其変乱のために国の文明を進めたることなしとの説あり。蓋し謂れなきに非ざるなり。(政府は新旧交代すれども国勢は変ずることなし)
右の如く政府は時として変革交代することあれども、国勢は則ち然らず、其権力常に一方に偏して、恰も治者と被治者との間に高大なる隔壁を作て其通路を絶つが如し。有形の腕力も無形の智徳も、学問も宗教も、皆治者の党に与みし、其党与互に相依頼して各権力を伸ばし、富も爰に集り才も爰に集り、栄辱も爰に在り廉恥も爰に在り、遥に上流の地位を占めて下民を制御し、治乱興廃、文明の進退、悉皆治者の知る所にして、被治者は嘗て心に之を関せず、恬として路傍の事を見聞するが如し。譬へば古来日本に戦争あり。或は甲越の合戦と云ひ、或は上国と関東との取合と云ひ、其名を聞けば両国互に敵対して戦ふが如くなれども、其実は決して然らず。此戦は唯両国の武士と武士との争にして、人民は嘗て之に関することなし。元来敵国とは全国の人民一般の心を以て相敵することにて、仮令ひ躬から武器を携て戦場に赴かざるも、我国の勝利を願ひ敵国の不幸を祈り、事々物々些末のことに至るまでも敵味方の趣意を忘れざるこそ、真の敵対の両国と云ふ可けれ。人民の報国心は此辺に在るものなり。然るに我国の戦争に於ては古来未だ其例を見ず。戦争は武士と武士との戦にして、人民と人民との戦に非ず。家と家との争にして、国と国との争に非ず。両家の武士、兵端を開くときは、人民之を傍観して、敵にても味方にても唯強きものを恐るゝのみ。故に戦争の際、双方の旗色次第にて、昨日味方の輜重(しちよう)を運送せし者も今日は敵の兵糧を担ふ可し。勝敗決して戦罷むときは、人民は唯騒動の鎮まりて地頭の交代するを見るのみ、其勝利を栄とするに非ず、又其敗北を辱とするに非ず。或は新地頭の政令寛にして年貢米の高を減ずることもあらば之を拝して悦ばんのみ。其一例を挙て云はん。後北条の国は関八州なり。一旦豊臣と徳川に敵対して敗滅を取り、滅後直に八州を領したる者は讐敵なる徳川なり。徳川家康如何なる人傑なればとて一時に八州の衆敵を服するを得んや。蓋し八州の人民は敵にも非ず味方にも非ず、北条と豊臣との戦争を見物したるものなり。徳川の関東に移りし後に敵の残党を鎮撫征討したりとは、唯北条家の遺臣を伐ちしのみのことにて、百姓町人等の始末に至ては恰も手を以て其頭を撫で即時に安堵したることなり。是等の例を計れば古来枚挙に遑あらず。今日に至ても未だ其趣の変じたるを見ず。故に日本は古来未だ国を成さずと云ふも可なり。今若し此全国を以て外国に敵対する等の事あらば、日本国中の人民にて仮令ひ兵器を携へて出陣せざるも戦のことを心に関する者を戦者と名け、此戦者の数と彼の所謂見物人の数とを比較して何れか多かる可きや、預め之を計て其多少を知る可し。嘗て余が説に、日本には政府ありて国民(ネ-ション)なしと云ひしも是の謂なり。固より欧羅巴諸国にても戦争に由て他国の土地を兼併すること屢これありと雖ども、其これを併すること甚だ易からず、非常の兵力を以て抑圧する歟、若しくば其土地の人民と約束して幾分の権利を附与するに非ざれば、之を我版図に入るゝこと能はずと云ふ。東西の人民其気風を殊にすること以て見る可し。(日本の人民は国事に関せ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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