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트루먼 독트린에서 1991년 소련 해체까지 냉전은 장장 44년이나 진행됐다. 그렇지만 그 시기 사회주의 주역인 소련과 중국은 1960년대부터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으며 동맹관계가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중국 지상군의 43%, 소련 지상군의 41%가 양국 접경지대에서 대치할 정도였다. 국지전도 치렀다. 전쟁에 대비해 양국의 군비지출도 대폭 증가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 자본주의 진영이 폭발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루던 시기에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중국과 소련, 중국과 베트남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동유럽은 소련의 탱크에 짓밟히기도 하였다. ‘사회제국주의’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자본주의 진영과는 냉전을 치르고 자기 진영끼리는 열전을 치렀다. 왜 그랬을까? 관계가 정상적인 국가관계가 아닌 ‘형제관계’로 이뤄졌기 때문이 아닐까. ‘형님’ ‘동생’ 관계가 토라지면 곧 반목하고 감정싸움에 휘말려들었다. 그러니 확실한 동맹관계도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중국과 소련이 전 40여년 동안 협력관계였던 기간은 사실상 1950년대 십년뿐이라 하겠다. 60년대 초부터는 근 30년을 원수관계로 보냈던 것이다. 이는 70년대 초 중국과 미국이 한배를 탄 배경이기도 하다.
중-북 관계 역시 순탄치 않았다. 한국전쟁 와중에는 양국 군대의 지휘권 문제, 철도 관리권 등 문제로 갈등도 빚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에 ‘연안파’가 숙청되면서 양국 관계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그 갈등은 1958년 중국군이 북한에서 철수하면서 봉합된다. 중국의 문화혁명 기간 양국 관계는 또다시 큰 진통을 겪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국지전까지 겪은 중-소 관계가 이 갈등을 봉합한다. 중국은 소련과의 대결에서 북한의 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냉전시기 이랬던 중-북-러 관계가 과연 오늘에 와서 새로운 ‘북방삼각’을 만들며 신냉전을 치를 수 있을까.
푸틴의 러시아는 ‘강한 러시아’라는 구호를 내걸고 냉전에서 잃은 거대한 지정학적 손실을 만회하려 한다. 미국이나 서방과의 대결도 마다하지 않는 듯하다. 급기야는 나토와 서로 핵위협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미-러가 신냉전에 돌입했고 바야흐로 세계적 범위의 대결과 충돌로 나아간다는 설도 있다.
북한은 사실상 신냉전이 따로 없다. 한시도 냉전을 멈춘 적이 없다. 미-소 대결이 북-미 대결로 바뀌었다고 한다. 북한에는 중, 러와 미국의 신냉전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중국도 계속 미국에 흔들림당하고 있다. 미국과 강하게 대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니 중, 북, 러 모두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그렇지만 삼국 관계는 냉전시기에도 끈끈히 엮이지 못했던 관계다. 작금의 북-중 관계는 또다시 얼어붙었고 북한 매체에서 중국은 사라지고 러시아가 떠오르고 있다. 냉전시기 중, 소를 드나들던 모양새 그대로이다. ‘북방삼각’으로의 회귀가 어불성설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도 냉전시기에는 형식적으로라도 공동의 이데올로기, 공동의 정치목표, 공동의 적이 있었다. 이젠 그것도 없다.
냉전시기 중국은 러시아의 몰락을 지켜봤다. 대결의 끝이 어딘지를 보았다. 투키디데스 함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잘 안다. 누가 뭐라 해도 소련의 전철은 밟지 않을 것이다.
냉전시기였던 1955년 8월부터 1970년 2월까지 전후 15년 동안 중국은 미국과 136차례의 대사급 회담을 열어왔다. 치열하게 싸우면서 대화했다. 결과 제135차 회담은 중-미 관계의 전환점이 됐다. 중국은 바로 그 정신으로 미래의 중-미 관계를 신형 대국관계로 만들려고 한다. 성공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그 과정에서 중국도 미국도 신냉전을 피해 서로 바뀌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