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낙론 대학자들이 사도세자 성균관 입학식에 대거 참석한 이유/ 이경구/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7. 3. 12:55

문화

낙론 대학자들이 사도세자 성균관 입학식에 대거 참석한 이유

등록 :2015-07-02 18:55수정 :2015-07-03 08:30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⑦ 2차 논쟁 시작되다

1742년(영조 18) 음력 3월 성균관에서 거행된 사도세자의 입학례에서 영조는 탕평비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탕평비에 새겨진 ‘周而弗比’(주이불비)와 ‘比而弗周’(비이불주)는 <논어>에 나오는 말로서, 공(公)을 따르는 군자와, 사(私)를 따르는 소인의 처세를 지적한 것이다. 사진은 현재 성균관대학교 정문 안쪽에 있는 탕평비문의 탁본.
1742년(영조 18) 음력 3월 성균관에서 거행된 사도세자의 입학례에서 영조는 탕평비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탕평비에 새겨진 ‘周而弗比’(주이불비)와 ‘比而弗周’(비이불주)는 <논어>에 나오는 말로서, 공(公)을 따르는 군자와, 사(私)를 따르는 소인의 처세를 지적한 것이다. 사진은 현재 성균관대학교 정문 안쪽에 있는 탕평비문의 탁본.
세월은 다시 흘렀다. 영조 20년(1744) 무렵, 소론 온건파 위주의 탕평에서 노론이 주도하는 탕평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그 물줄기를 바꾸는 데 큰 힘을 보탠 이들은 노론 중에서도 낙론의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영조의 탕평을 긍정하면서 노론에 유리한 명분을 굳히고자 했다. 그러나 노론의 호론 학자들은 낙론의 성과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탕평 자체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호론과 낙론의 차이는 작은 사건으로 인해 2차 논쟁으로 불붙었다.

영조와 낙론의 인연

영조 16년(1740) 무렵 영조는 노론에 전향적 태도를 보였다. 노론이 염원한 김창집과 이이명의 복권을, 소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승인한 것이다. 그러자 노론 중에서도 낙론 학자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김창집은 낙론의 시조인 김창협·김창흡 형제의 맏형이므로 낙론 학자들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출사할 수 있었다.

영조 18년 3월26일(음력)에는 왕세자(사도세자)의 입학식이 성균관에서 거행되었다. 세자 또한 공자의 제자임을 알리는 중요한 행사였다. 영조는 이날을 탕평의 안착을 알리는 계기로도 활용했다. 영조는 친히 ‘공평하고 치우치지 않는 것이 군자의 공정함이요, 치우치고 공평하지 않은 것이 소인의 사사로움이다’(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라는 글을 써서, 비석에 새기라고 명령하였다. 지금도 성균관에 남아 있는 유명한 ‘탕평비’가 이렇게 세워졌다.

탕평비각.
탕평비각.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세자의 입학식에 명성 높은 학자가 빠져서야 되겠는가. 낙론의 학자로 이름 높던 어유봉과 조상경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참여하자, 영조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당론을 주장하던 이들이 조금 늦었지만 이제야 풀어졌구나’라는 시를 지어주었고, 왕실의 체면을 세워준 어유봉에게는 삼로오경(三老五更)의 예를 베풀겠다고도 했다. 삼로오경의 예란 나라의 어른처럼 우대한다는 뜻이다.

영조가 보였던 구애의 저변에는, 영조와 낙론 사이의 인연도 무시 못할 요인으로 깔려 있었다. 어머니의 신분이 한미했던 영조는 부친 숙종의 또 다른 후궁이었던 영빈 김씨의 양아들을 자처하기도 했었다. 영빈 김씨는 노론사대신의 수장이었던 김창집의 5촌 조카딸이었다. 영조와 낙론의 인연은 후에도 면면히 이어졌다. 영조가 승하하기 열흘 전에 낙론을 대표하는 김창흡과 이재에게 시호(諡號)를 내린 일은 그 인연의 대미라고 할 수 있다.

영조 “이제야 풀어졌구나” 기뻐해
영조의 노론에 대한 전향적 태도 배경엔
탕평책에 적극 개입한 낙론 역할 커
호론은 노론의 독재 주장
이제 논쟁은 초기와는 다른 양상으로
초점 단순화→이분법과 독선으로

1817년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의 입학례를 그린 <왕세자입학도첩>의 한 장면(경남대학교박물관 소장).
1817년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의 입학례를 그린 <왕세자입학도첩>의 한 장면(경남대학교박물관 소장).

낙론 박필주의 성과와 한계

세자 입학식이 열린 다음해에 박필주가 영조를 만났다. 박필주는 김창협·김창흡 형제의 수제자였다. 탕평을 반대하며 출사를 거부했던 낙론 학자들이 잇달아 조정에 나오니, 영조 또한 기대가 컸다. 아니나 다를까 박필주는, 영조가 소원했던 이들까지 차별 없이 등용했으니 “이러한 거룩한 덕은 고금에 없었다”고 탕평을 칭찬하였다. 고무된 영조는 “(탕평이) 틀렸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 말을 들으니 시끄러운 소리들이 잦아들겠다”고 응답했다.

박필주는 이윽고 속내의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지은 죄가 무거운 이들마저 법망에서 빠져나간다면 그 또한 잘못입니다.” 죄가 무거운 이들이란 탕평의 일각을 지탱하는 소론 일부를 지칭하였다. 분위기는 일순간에 냉각되었다.

실망한 영조는 한참 뜸을 들인 뒤, 자기가 이미 선포한 처분을 흔들지 말라고 하였다. 아무리 명망 높은 학자라도 역린(逆鱗)을 건드릴 수 없는 법. 박필주는 한발 물러섰고, 이후 영조를 만났을 때는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몇 년 후 박필주는 영조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도 그는 영조의 처분을 찬양한 뒤에 일부 수정을 요구하였고, 노론에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냈다. 영조는 몇 달 후에 소론의 좌장인 우의정 조현명을 면직시키고, 경종 대에 노론을 핍박한 소론 대신들의 관작을 추탈하였다.

탕평비.
탕평비.
하지만 호론 학자들은 박필주의 성과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애초부터 호론과 낙론 학자들은,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절충하는 영조의 탕평 방식을 한목소리로 비판하였다. 절충 이전에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조가 얼마나 시비를 잘 판정할 것인가와 상대 붕당을 어느 정도나 용인할 것인가라는 점에서는 이견을 보였다.

여기서 호론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보았다. 영조의 탕평은 기만이므로 세상은 아직 출사할 만한 곳이 못 되었다. 또 영조가 만약 시비를 가려 노론의 주장을 승인한다면 그것은 노론의 독재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호론의 논리는 출발과 결론이 사실상 ‘탕평 반대’였다. 따라서 박필주의 출사는 잘 봐줘도 두루뭉술한 접근에 불과했다.

그러나 낙론은 영조에게 일정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영조 초반의 절충은 어쩔 수 없었으나, 영조는 차츰 노론에 힘을 실어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노론이 옳았다는 명분을 차츰 확보한다면 언젠가는 주도권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박필주의 사례는 그 점에서 성공이었다.

‘한천시’(寒泉詩) 논쟁

한편, 박필주가 영조를 만날 무렵 작은 사건 하나가 터졌다. 김창협·김창흡 형제, 어유봉, 박필주 등 낙론 1세대를 이어 2세대를 대표하는 학자는 이재(李縡)였다. 그는 경기도 용인에 자리잡은 한천정사(寒泉精舍)에서 문호를 크게 확장했다.

이재의 제자 가운데 최석이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꽤나 자부심이 강했던 듯, 1746년(영조 22) 8월에 충청도에 사는 호론의 대학자 한원진을 방문했다. 그리고 인물성론(人物性論)을 토론하고자 했다. 한원진은 병이 있다고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러자 최석은 스승 이재에게 돌아가 한원진이 자신을 일부러 피했다고 알렸다.

이재는 제자의 경거망동을 꾸짖는 한편, 호론을 대표하는 한원진의 학설을 평가하는 시를 지었다. 한원진은 큰 역량을 지닌 호걸스런 선비라고 칭찬했지만, 인간의 기질(氣質)을 너무 강조했다고도 하였다. 낙론의 전형적인 논리를 들어 한원진을 에둘러 비판한 것이었다. 이 시는 2차 논쟁의 큰 발단으로 번졌기 때문에, ‘한천’이란 이재의 호를 따서 그냥 ‘한천시’로 불리게 되었다.

한원진은 이듬해에 이 시를 읽었고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곧바로 반박하는 시를 지었는데 내용이 아슬아슬한 수위를 넘나들었다. 이재가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차이를 잘 모르고, 유교와 불교의 분별에 모호했다는 등으로 비판한 것이다. 유학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성인(聖人)을 잘 모른다 하고, 이단으로 취급되던 불교와 논리가 비슷하다 한다면, 비판받는 당사자는 대화 상대가 아니라 부정되어야 할 존재로 전락될 수 있었다. 논쟁의 발단을 제공한 최석에 대해서는 ‘남을 이기려는 마음’이 있다고도 했다. 공부 이전에 수양이 덜되었다는, 다소 모욕스런 소리였다.

한원진의 반박이 나왔을 때 이재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래서 낙론 쪽에서는 최석과 박성원 등 이재의 제자들이 스승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들의 비판 또한 이전과는 수위가 달라졌다. 한원진 이론의 뼈대인 ‘기질지성에 대한 강조’를 비판한 것은 아직 그를 유학자로 인정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비판은 점차 한원진이 ‘분별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사람의 개과천선(改過遷善)을 부정한다’는 식으로 정리되었다. 이 정리는 한원진을, 인간의 성선(性善)을 강조했던 맹자의 배반자로 몰아가는 거친 비판이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이제 논쟁은 개인 차원에서 벌어졌던 초기 양상과는 많이 달라졌다. 학파가 바야흐로 공고해졌고, 논점은 차츰 명료해졌다. 학파는 자체의 운동논리로 움직였고, 명료함은 초점의 단순화를 동반하였다. 그러자 풍부한 내용과 미세한 차이는 생략된 채, 상대방을 ‘유학의 옹호자냐 아니냐’ 하는 판정대로 쉽게 올리는 풍조가 생겨났다. 단순화와 손쉬운 판정은, 노론이 남인·소론과 벌였던 사상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 경직된 메커니즘을 극복하지 못하자 그것은 노론을 향해서도 부메랑이 되었다. 지금도 종종 접할 수 있는 사상의 어두운 얼굴, 바로 이분법과 독선이었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