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정홍원, 이완구, 황교안, 황우여, 김기춘, 김진태.
한홍구 교수,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 특별기고
16일 조국, 김상봉, 김두식, 박노자 등 40~50대 지식인 33명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내란, 학살, 고문조작, 부정선거 등을 통해 헌법을 파괴하는 행위를 한 대표적인 사람들을 정리하는 <(가칭)반헌법행위자 열전>을 편찬하자는 제안을 시민사회에 던졌다. 2009년 해방 64년 만에 <친일인명사전>이 편찬된 것은 뜻깊은 일이지만, 수록 대상자 거의 대부분이 이미 죽은 다음에 책이 나왔다는 점에서 큰 아쉬움을 남겼다. <반헌법행위자 열전>의 수록 대상자는 상당수가 살아 있을 뿐 아니라, 몇몇은 아직도 현실 권력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편찬을 시작한다는 소식만으로도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오고 있다.
박근혜 정부 사람들
어렵게 이룬 과거청산 성과 유린 정홍원
‘초원복집 사건’ 담당 부장검사
불법선거 개입 김기춘과 각별인연 이완구
5공 국보위 내무 분과위 실무자
삼청교육대 설립에 핵심적 역할 황교안
법무장관 시절 채동욱 총장 찍어내
선거법 위반 원세훈 구속수사 방해 황우여
70년대 명동사건·80년대 학림사건
민주인사들 감옥행 담당판사 이 밖에
초원복집 사건 장본인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화려한 부활
담당검사 김진태는 검찰총장에 1998년 민주정권의 수립 이후 <독재인명사전>, <반민주행위자 사전> 등을 편찬해야 한다는 주장은 여러 차례 제기되었지만, 그 작업이 의미있는 수준에서 실제로 준비되었던 적은 없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같은 기구가 마땅히 떠맡아 했어야 할 작업이건만 여러가지 이유에서 엄두조차 내보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시절 과거청산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처음부터 가해자 처벌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는 너무도 얌전한 과거청산을 시도했을 뿐이다. 제대로 된 과거청산 없이 진행된 민주화는 사막에 세운 누각이었다. 수구정권이 들어서자 단순히 과거사위원회들이 폐지되거나 무력화되는 것을 넘어 민주주의 자체가 심각하게 파괴되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권을 지나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며 유신시대의 열혈 청년장교 남재준이 국가정보원장이 되고 유신정권 7년 동안 4년 반이나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지낸 김기춘이 비서실장이 되자 내란음모 사건이 터지고 조작간첩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민주주의가 유신시대로 뒷걸음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더니,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유신이 아닌 이승만 정권 시기로 역사가 후퇴하는 참담한 현실이 도래했다. 국정원의 간첩조작 사건은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증거 조작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국정원 직원이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 과거사위 시절 내 밑에서 국정원 쪽 조사관으로 일했던 자였기 때문이다. 국정원 과거사위는 과거 중앙정보부·안기부가 저지른 고문조작 사건 등을 반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였다. 거기 파견되어 일한 직원이 증거조작의 주역이 되었다는 사실은 국정원이 현 조직의 해체와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재구성 이외에는 달리 개혁의 방도가 없음을 웅변하는 일이다. 나 자신도 참으로 미련한 짓이라 자책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적 청산 없는 과거사 정리가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믿었던 천진함이다. 민주정권 시기 어렵게 이룩한 과거청산의 성과들은 수구정권에 영합하는 사법부에 의해 무참히 유린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마당에 과거사 관련 판결들이 뒤집어지는 거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전관예우 도장 값이 1년에 수십억이라는 대법관들이 사법살인을 당한 인혁당 피해자들에게 준 배상금 이자가 너무 많다고 토해내라고 한 판결은 과거의 전기고문, 물고문보다 더한 이자고문으로 피해 당사자들의 피눈물을 짜내는 일이다. 2010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유신 시절의 긴급조치가 유신헌법에 비춰 봐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유신공주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자 대법원은 당시의 수사관들에게 면죄부를 주어 긴급조치가 위헌이라는 과거의 판결을 사실상 뒤집어버렸다. 그리고 어제 대법원은 박근혜 당선의 일등공신 원세훈의 대선개입 사건 상고심에서 유죄의 주요 증거인 이메일 첨부파일의 증거능력을 부인하며 파기환송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은 검찰과 법원이 합작하여 증거를 찾지 않고 찾은 증거의 증거능력을 배척함으로써 면죄부를 받기 직전 상황이다. 가장 늦게 민주화된 사법부가 역시 권력의 바람에 가장 먼저 흔들린다. 아이들에게 가만있으라 해놓고 선장과 선원들이 앞장서 도망친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는 자연히 다리 끊고 도망간 이승만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 역사는 슬피디슬픈 세월호 사건보다 더 모질었다. 도망친 선장 이준석이야 남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며 죗값을 치러야 하겠지만, 돌아온 이승만은 포악한 학살자로 군림했다. 다리 끊겨 꼼짝 못하고 가만있을 수밖에 없었던 서울시민들은 이승만과 그 수족들에게 부역자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국회 프락치 사건, 반민특위의 와해와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은 단지 예고편이었다. 전 민족에게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은 반민족적 친일파에게는 복음이었다. 보도연맹 학살, 부역자 처벌, ‘공비’ 토벌 과정에서의 민간인 학살 등 각종 살육을 통해 친일파들은 반역의 과거를 빨갱이 사냥으로 윤색하면서 대한민국의 공안세력으로 안착했다. 제헌헌법은 우파인사들만 모여 만들었음에도 종북좌빨로 몰려 2014년 말 해산당한 통합진보당 강령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었지만 이제 국가보안법에 밀려 휴지 조각 신세가 되었다. 공안세력이란 새옷을 입은 악질 친일파들은 좌파는 물론이고 민족적 양심을 가진 우파들마저 학살한 뒤 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 ■ 총리가 된 법비(法匪)들 1960년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상태로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은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켜 4월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과연 어떤 자가 어린 김주열을 저토록 무참히 살해하고 그 시신을 바다에 유기했을까? 체포된 범인은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였다. 당시의 신문자료나 박정희 군사 정권이 발행한 <혁명재판사>는 박종표의 이력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지만, 사실 그는 반민특위에 잡혀갔던 악질 헌병 아라이 겐키치였다. 친일세력의 반민특위 습격으로 반민특위가 흐물흐물해지면서 무죄로 풀려난 박종표는 악질고등경찰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잡혀갔다가 풀려나면서 헌병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것처럼 신분을 세탁하여 경찰이 되었다. 만약 어떤 작가가 반민특위에 잡혀갔던 자가 풀려나 10여년 뒤 김주열을 죽였다고 소설을 썼다면 평론가들은 주제의식은 잘 알겠지만, 소설의 구성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고 비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은 역사요 현실이요 일상이 되어버렸다. 어디 박종표뿐이랴. 이명박 정부 후반부터 지금까지 역대 국무총리는 모두 <반헌법행위자 열전>의 수록 대상으로 심각하게 검토될 만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이명박 정권의 절반 가까운 기간 동안 총리 자리를 차지했던 김황식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당시 법정 최고형이 유기징역인 내란음모 사건에서 김대중에게 사형을 내릴 수 있게 한 신의 한 수를 둔 판사였다. 그다음 총리 정홍원은 박근혜 정권의 최고 실력자였던 김기춘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김기춘은 초원복집 사건이라는 불법 선거개입으로 감옥에 가야했고 절대로 공직을 맡을 수 없는 처지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처벌을 면하고 오뚝이처럼 부활했다. 정홍원은 그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부장검사였다. 담당검사 김진태는 현재 검찰총장이다. 그다음 총리 이완구는 국보위 내무분과위원회의 실무자로서 5·17 내란의 주요 부분이자 역대 최대 규모의 불법감금 사건인 삼청교육대의 설립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다음 현재의 총리인 황교안은 법무장관 시절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주도한 전 국정원장 원세훈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구속하려는 채동욱 검찰총장을 찍어내 국가기관의 선거부정을 은폐한 혐의가 대단히 짙다. 대한민국의 총리 잔혹사는 총리후보자들의 연이은 낙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총리가 된 법비(法匪)들이 더 문제였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민주국가를 이끌어 갈 의지도 능력도 없는 수구정권이 공안세력에 의존하게 되면서 한결같이 법을 갖고 장난치는 법비들만 총리가 된 것이다. 천만 학생들의 교육을 책임진 교육부총리 황우여는 1970년대 김대중 대통령 등 민주인사들을 처벌한 명동사건의 판사이자, 1980년대 최악의 공안사건인 학림 사건의 판사이기도 했다. 천만 관객을 불러들인 영화 <변호인>은 고문과 조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여주었다. <변호인>에서는 영화의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고문수사관 차동영의 비중을 높였지만, 현실에서는 직접 고문을 한 수사관보다 때로는 고문을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지시했을 수도 있고, 대개는 고문을 묵인한 공안검사가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변호인>의 강 검사 같은 자의 맏형이 바로 유신 정권 7년 중 4년 반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지내며 본격적인 조작간첩 사건의 시대를 연 김기춘이다. <변호인>의 소재가 된 부림사건의 실제 검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주임검사 최병국은 대검 공안부장으로 전두환, 노태우 등은 성공한 내란이라고 봐주고 1996년 한총련 사건의 지휘자로 학생을 5천명 이상 연행했으며, 그 후 3선 의원으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을 지냈다. 부림사건에서 실제로 법정에 자주 나와 강 검사의 실제 인물이라 할 고영주는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민노당을 해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통합진보당 해산의 기획자였고, 일찍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해산을 주장해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밀어낸 주역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에 새누리당 쪽 위원으로 나가 있다. 아직 세월호 위원회 활동이 본격화되지 않아서 그렇지, 고영주는 세월호의 진실 인양을 막기 위해 공안세력이 파견한 대표 칼잡이다. 수십년이 지나 우리의 손자 손녀가 실화에 기초했다는 <변호인>을 보고 송 변호사와 차동영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온다면 우리는 무어라 답해야 할까? 대통령이 된 송 변호사는 정의를 세우려 왔다 갔다 하다가 잘 안되어 떨어져 죽었다고. 차동영이는 감옥 가지 않고 연금 따박 따박 받아먹다가 늙어 죽은 뒤 고문조작으로 훈장 받은 덕에 국립묘지국가유공자 묘역에 묻혀 있다고…. 헌법을 파괴한 자들이 거의 처벌받지 않고, 현실의 영화를 누려왔다. 저들을 현실의 법정에 세우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이유로, 또는 살아 있더라도 우리가 힘이 없어 저들을 이제라도 현실의 법정에 세울 수는 없겠지만, 저들이 역사의 법정마저 피해가게 할 수는 없다. <반헌법행위자 열전>은 늦었지만 저들 헌법 파괴자들의 행위를 기록하여 역사의 법정에 띄우는 고발장이 될 것이다. 헌법을 파괴하고 헌법정신을 유린한 자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법치를 이야기하고 헌법을 들먹이는 현실을 좌시할 수 없다. ■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보수 엘리트들도 우리의 역사에 헌법파괴자나 반헌법행위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반헌법행위자 열전>에는 각 권의 앞부분에 공직자로서 헌법과 양심과 상식을 지키려 했던 분들의 사례도 제시될 것이다. 이승만에 맞서 꼬장꼬장하게 사법부 독립을 지킨 김병로 대법원장, 검찰권을 수호하려다 이승만에 밉보여 검찰총장에서 서울고검장으로 강등된 김익진, 이승만과 검찰총장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뇌물을 받은 현직 장관을 기소한 최대교, 일제에 복무했던 자가 새 나라에서 공직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검사직을 사임한 엄상섭, 다리 끊고 도망간 자들이 피난 못 간 서울 시민을 단죄하는 재판놀음에서 온전한 정신과 양심으로 <재판관의 고민>을 저술한 유병진, 인혁당 조작 사건의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던진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 도시산업선교회와 노동자들을 불순세력으로 처리하라는 박정희의 압력을 거부한 유신 말기의 대검 공안부장 박준양…. 이런 분들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보수 엘리트들이다.
과거청산 작업이 한창일 때 수구세력들은 왜 과거의 사실을 오늘의 잣대로 재단하느냐고 비판했다. 역사는 끊임없이 다시 쓰인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시각으로 끊임없이 재평가되는 것이 역사이기 때문에 과거의 사실을 오늘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결코 비판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반헌법행위자 열전>은 당시의 법률체계에서도 명백한 범죄행위인 내란, 학살, 고문조작, 부정선거 등만을 수록 대상으로 할 것이다.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은 보수와 진보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 평화, 인권 같은 보편적 가치를 기준으로 삼고 현실적으로는 헌법규범에 근거하여 우리 사회의 원칙을 세우는 일이다. 국가기관이 몰래 선거에 개입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룰에 관한 것인데 여기 보수와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있는가? 증거를 조작하거나 고문으로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모는 일을 막는 작업에 보수와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있는가? 나라를 지키라고 맡겨준 탱크와 대포를 거꾸로 몰아 헌법을 파괴하는 내란을 규탄하는데 보수와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있는가? 2010년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21세기의 주역이 될 미래 세대에게 주는 작은 선물 <반헌법행위자 열전>을 시민들과 같이 마련하고자 한다. 많은 참여와 함께 재정적인 후원을 부탁드린다.
한홍구 교수
(가칭)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위원회(준), badmen0815@gmail.com
후원계좌: 국민은행 006001-04-198120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어렵게 이룬 과거청산 성과 유린 정홍원
‘초원복집 사건’ 담당 부장검사
불법선거 개입 김기춘과 각별인연 이완구
5공 국보위 내무 분과위 실무자
삼청교육대 설립에 핵심적 역할 황교안
법무장관 시절 채동욱 총장 찍어내
선거법 위반 원세훈 구속수사 방해 황우여
70년대 명동사건·80년대 학림사건
민주인사들 감옥행 담당판사 이 밖에
초원복집 사건 장본인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화려한 부활
담당검사 김진태는 검찰총장에 1998년 민주정권의 수립 이후 <독재인명사전>, <반민주행위자 사전> 등을 편찬해야 한다는 주장은 여러 차례 제기되었지만, 그 작업이 의미있는 수준에서 실제로 준비되었던 적은 없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같은 기구가 마땅히 떠맡아 했어야 할 작업이건만 여러가지 이유에서 엄두조차 내보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시절 과거청산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처음부터 가해자 처벌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는 너무도 얌전한 과거청산을 시도했을 뿐이다. 제대로 된 과거청산 없이 진행된 민주화는 사막에 세운 누각이었다. 수구정권이 들어서자 단순히 과거사위원회들이 폐지되거나 무력화되는 것을 넘어 민주주의 자체가 심각하게 파괴되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권을 지나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며 유신시대의 열혈 청년장교 남재준이 국가정보원장이 되고 유신정권 7년 동안 4년 반이나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지낸 김기춘이 비서실장이 되자 내란음모 사건이 터지고 조작간첩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민주주의가 유신시대로 뒷걸음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더니,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유신이 아닌 이승만 정권 시기로 역사가 후퇴하는 참담한 현실이 도래했다. 국정원의 간첩조작 사건은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증거 조작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국정원 직원이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 과거사위 시절 내 밑에서 국정원 쪽 조사관으로 일했던 자였기 때문이다. 국정원 과거사위는 과거 중앙정보부·안기부가 저지른 고문조작 사건 등을 반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였다. 거기 파견되어 일한 직원이 증거조작의 주역이 되었다는 사실은 국정원이 현 조직의 해체와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재구성 이외에는 달리 개혁의 방도가 없음을 웅변하는 일이다. 나 자신도 참으로 미련한 짓이라 자책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적 청산 없는 과거사 정리가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믿었던 천진함이다. 민주정권 시기 어렵게 이룩한 과거청산의 성과들은 수구정권에 영합하는 사법부에 의해 무참히 유린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마당에 과거사 관련 판결들이 뒤집어지는 거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전관예우 도장 값이 1년에 수십억이라는 대법관들이 사법살인을 당한 인혁당 피해자들에게 준 배상금 이자가 너무 많다고 토해내라고 한 판결은 과거의 전기고문, 물고문보다 더한 이자고문으로 피해 당사자들의 피눈물을 짜내는 일이다. 2010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유신 시절의 긴급조치가 유신헌법에 비춰 봐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유신공주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자 대법원은 당시의 수사관들에게 면죄부를 주어 긴급조치가 위헌이라는 과거의 판결을 사실상 뒤집어버렸다. 그리고 어제 대법원은 박근혜 당선의 일등공신 원세훈의 대선개입 사건 상고심에서 유죄의 주요 증거인 이메일 첨부파일의 증거능력을 부인하며 파기환송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은 검찰과 법원이 합작하여 증거를 찾지 않고 찾은 증거의 증거능력을 배척함으로써 면죄부를 받기 직전 상황이다. 가장 늦게 민주화된 사법부가 역시 권력의 바람에 가장 먼저 흔들린다. 아이들에게 가만있으라 해놓고 선장과 선원들이 앞장서 도망친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는 자연히 다리 끊고 도망간 이승만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 역사는 슬피디슬픈 세월호 사건보다 더 모질었다. 도망친 선장 이준석이야 남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며 죗값을 치러야 하겠지만, 돌아온 이승만은 포악한 학살자로 군림했다. 다리 끊겨 꼼짝 못하고 가만있을 수밖에 없었던 서울시민들은 이승만과 그 수족들에게 부역자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국회 프락치 사건, 반민특위의 와해와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은 단지 예고편이었다. 전 민족에게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은 반민족적 친일파에게는 복음이었다. 보도연맹 학살, 부역자 처벌, ‘공비’ 토벌 과정에서의 민간인 학살 등 각종 살육을 통해 친일파들은 반역의 과거를 빨갱이 사냥으로 윤색하면서 대한민국의 공안세력으로 안착했다. 제헌헌법은 우파인사들만 모여 만들었음에도 종북좌빨로 몰려 2014년 말 해산당한 통합진보당 강령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었지만 이제 국가보안법에 밀려 휴지 조각 신세가 되었다. 공안세력이란 새옷을 입은 악질 친일파들은 좌파는 물론이고 민족적 양심을 가진 우파들마저 학살한 뒤 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 ■ 총리가 된 법비(法匪)들 1960년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상태로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은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켜 4월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과연 어떤 자가 어린 김주열을 저토록 무참히 살해하고 그 시신을 바다에 유기했을까? 체포된 범인은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였다. 당시의 신문자료나 박정희 군사 정권이 발행한 <혁명재판사>는 박종표의 이력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지만, 사실 그는 반민특위에 잡혀갔던 악질 헌병 아라이 겐키치였다. 친일세력의 반민특위 습격으로 반민특위가 흐물흐물해지면서 무죄로 풀려난 박종표는 악질고등경찰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잡혀갔다가 풀려나면서 헌병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것처럼 신분을 세탁하여 경찰이 되었다. 만약 어떤 작가가 반민특위에 잡혀갔던 자가 풀려나 10여년 뒤 김주열을 죽였다고 소설을 썼다면 평론가들은 주제의식은 잘 알겠지만, 소설의 구성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고 비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은 역사요 현실이요 일상이 되어버렸다. 어디 박종표뿐이랴. 이명박 정부 후반부터 지금까지 역대 국무총리는 모두 <반헌법행위자 열전>의 수록 대상으로 심각하게 검토될 만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이명박 정권의 절반 가까운 기간 동안 총리 자리를 차지했던 김황식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당시 법정 최고형이 유기징역인 내란음모 사건에서 김대중에게 사형을 내릴 수 있게 한 신의 한 수를 둔 판사였다. 그다음 총리 정홍원은 박근혜 정권의 최고 실력자였던 김기춘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김기춘은 초원복집 사건이라는 불법 선거개입으로 감옥에 가야했고 절대로 공직을 맡을 수 없는 처지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처벌을 면하고 오뚝이처럼 부활했다. 정홍원은 그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부장검사였다. 담당검사 김진태는 현재 검찰총장이다. 그다음 총리 이완구는 국보위 내무분과위원회의 실무자로서 5·17 내란의 주요 부분이자 역대 최대 규모의 불법감금 사건인 삼청교육대의 설립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다음 현재의 총리인 황교안은 법무장관 시절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주도한 전 국정원장 원세훈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구속하려는 채동욱 검찰총장을 찍어내 국가기관의 선거부정을 은폐한 혐의가 대단히 짙다. 대한민국의 총리 잔혹사는 총리후보자들의 연이은 낙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총리가 된 법비(法匪)들이 더 문제였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민주국가를 이끌어 갈 의지도 능력도 없는 수구정권이 공안세력에 의존하게 되면서 한결같이 법을 갖고 장난치는 법비들만 총리가 된 것이다. 천만 학생들의 교육을 책임진 교육부총리 황우여는 1970년대 김대중 대통령 등 민주인사들을 처벌한 명동사건의 판사이자, 1980년대 최악의 공안사건인 학림 사건의 판사이기도 했다. 천만 관객을 불러들인 영화 <변호인>은 고문과 조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여주었다. <변호인>에서는 영화의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고문수사관 차동영의 비중을 높였지만, 현실에서는 직접 고문을 한 수사관보다 때로는 고문을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지시했을 수도 있고, 대개는 고문을 묵인한 공안검사가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변호인>의 강 검사 같은 자의 맏형이 바로 유신 정권 7년 중 4년 반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지내며 본격적인 조작간첩 사건의 시대를 연 김기춘이다. <변호인>의 소재가 된 부림사건의 실제 검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주임검사 최병국은 대검 공안부장으로 전두환, 노태우 등은 성공한 내란이라고 봐주고 1996년 한총련 사건의 지휘자로 학생을 5천명 이상 연행했으며, 그 후 3선 의원으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을 지냈다. 부림사건에서 실제로 법정에 자주 나와 강 검사의 실제 인물이라 할 고영주는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민노당을 해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통합진보당 해산의 기획자였고, 일찍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해산을 주장해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밀어낸 주역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에 새누리당 쪽 위원으로 나가 있다. 아직 세월호 위원회 활동이 본격화되지 않아서 그렇지, 고영주는 세월호의 진실 인양을 막기 위해 공안세력이 파견한 대표 칼잡이다. 수십년이 지나 우리의 손자 손녀가 실화에 기초했다는 <변호인>을 보고 송 변호사와 차동영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온다면 우리는 무어라 답해야 할까? 대통령이 된 송 변호사는 정의를 세우려 왔다 갔다 하다가 잘 안되어 떨어져 죽었다고. 차동영이는 감옥 가지 않고 연금 따박 따박 받아먹다가 늙어 죽은 뒤 고문조작으로 훈장 받은 덕에 국립묘지국가유공자 묘역에 묻혀 있다고…. 헌법을 파괴한 자들이 거의 처벌받지 않고, 현실의 영화를 누려왔다. 저들을 현실의 법정에 세우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이유로, 또는 살아 있더라도 우리가 힘이 없어 저들을 이제라도 현실의 법정에 세울 수는 없겠지만, 저들이 역사의 법정마저 피해가게 할 수는 없다. <반헌법행위자 열전>은 늦었지만 저들 헌법 파괴자들의 행위를 기록하여 역사의 법정에 띄우는 고발장이 될 것이다. 헌법을 파괴하고 헌법정신을 유린한 자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법치를 이야기하고 헌법을 들먹이는 현실을 좌시할 수 없다. ■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보수 엘리트들도 우리의 역사에 헌법파괴자나 반헌법행위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반헌법행위자 열전>에는 각 권의 앞부분에 공직자로서 헌법과 양심과 상식을 지키려 했던 분들의 사례도 제시될 것이다. 이승만에 맞서 꼬장꼬장하게 사법부 독립을 지킨 김병로 대법원장, 검찰권을 수호하려다 이승만에 밉보여 검찰총장에서 서울고검장으로 강등된 김익진, 이승만과 검찰총장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뇌물을 받은 현직 장관을 기소한 최대교, 일제에 복무했던 자가 새 나라에서 공직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검사직을 사임한 엄상섭, 다리 끊고 도망간 자들이 피난 못 간 서울 시민을 단죄하는 재판놀음에서 온전한 정신과 양심으로 <재판관의 고민>을 저술한 유병진, 인혁당 조작 사건의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던진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 도시산업선교회와 노동자들을 불순세력으로 처리하라는 박정희의 압력을 거부한 유신 말기의 대검 공안부장 박준양…. 이런 분들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보수 엘리트들이다.
한홍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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