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원래부터 소수, 이단, 주변의 입장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부분이 세계사 전체로 보는 것에서는 실제로 대단히 중요했다”며 “고려와 몽골 관계도 몽골을 원나라인 중국의 왕조처럼 봐서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지금 집필중 ⑧ 김호동 서울대 교수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중앙유라시아사의 세계적 권위자다. 출판계와 학계에서 두루 손꼽는 저자요, 중요 고전 판본을 비교·분석해가며 정밀하게 옮기고 주를 다는 철저한 번역자로 이름 높다. 열정적 강의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고 누리꾼들 가운데서도 그를 역사 연구의 ‘대칸’이라 일컫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 평가는 고맙지만 과장된 것도 있어요. 쉽지 않은 일이긴 하죠. 언어도 여럿 해야 하고, 작업도 전문적으로 파고들어야 하니까….”
10월 출간 예정으로 김 교수가 최근 원고를 넘긴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사계절)는 그의 엄밀한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역사적 사건과 변화의 흐름을 지도로 표현한 시리즈물로, 2004년부터 한국사 중국사 일본사 등이 나왔고 김 교수의 책으로 5권 전체가 11년 만에 완간된다. 중앙유라시아는 만주, 몽골, 중국, 신장, 티베트, 러시아, 인도 북부, 이란, 터키를 포함하는 방대한 지역이다. 동서 문명의 통로이자 ‘세계사’를 가능하게 한 교류의 장이었지만 ‘원재료’가 부족해 애를 먹었다.
“중국사나 서양사처럼 기존 지도가 풍부하지 않아서 지도 그리는 프로그램을 배워 직접 그렸어요. 경도와 위도를 따진 뒤 고대부터 근대까지 중앙유라시아 지명을 하나씩 넣기 시작했죠. 책에는 구체적으로 표시하기에 한계가 있지만 연구자로서 기존 지도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정확한 데이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시적 통찰을 중시하지만 먼저 매우 견실한 미시적 연구를 토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중앙유라시아사를 현지어로 공부한 첫 세대로서, 그의 자료 장악력과 독보적인 전문성은 스승들에게서 힘입은바 크다. 스승 민두기 교수의 권유로 중앙아시아사를 선택했고 1980년 미국 유학을 떠나 하버드대 조지프 플레처 교수를 만났다. 플레처 교수는 곧장 러시아어를 배우라고 했다. 그 뒤엔 페르시아어, 몽골어, 터키어, 위구르어 같은 ‘특수어’ 습득을 요구했다. 플레처 교수는 모국어인 영어를 빼고 14개 국어를 알고 있었고 김 교수 또한 10여개 국어를 익혔다. 이번 책을 집필하며 ‘컴퓨터 언어’까지 배운 셈이다.
1990년부터 번역서를 내기 시작해 박사학위논문을 기초로 집필한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1999) 이후로 거의 2~3년에 한권 꼴로 저서나 번역서를 냈다. 곧 그가 역주한 500여쪽짜리 <몽골제국기행>(까치)도 나올 예정이다. 1200년대 중반 몽골을 다녀간 두 유럽 수도사들의 기행문으로, 이들은 마르코 폴로보다 30~40년 앞서 몽골을 방문했다. ‘코리아’(카울리)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서구의 문헌이기도 하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몽골제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책입니다. 3000~4000㎞ 정도 거리를 두세달 만에 주파해 가는데 그 과정이 참… 적국으로 가는 두려움도 있었을 테고 간난신고가 컸죠. 청빈, 검약을 강조하는 선교회 수도사답게 맨발로 영하 20~30도 추위에 텐트 앞에 서 있자니, 대칸이 괴물처럼 쳐다보더라는 거죠. 그 장면을 읽으면서 800년 전이지만 역사 현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중앙유라시아사 세계적 권위자
현지어공부 첫 세대로 왕성한 활동
‘아틀라스’ ‘케임브리지 몽골제국사’ 집필 역사 에세이를 보면 한때 ‘문학청년’이던 그의 섬세한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황하에서 천산까지>가 대표적이다. 중국에 맞선 달라이라마와 티베트인들의 독립운동, 순교자들의 피와 눈물로 얼룩진 회족의 역사, 위구르인들의 독립투쟁 같은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는 이 책으로 “약하고 짓눌려온 민족들의 비가”를 들려주고 싶었다면서도 “어느 민족에게도 언제나 비통한 과거만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썼다. 역사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잃지 않는 것이다. 사실 그는 세계사의 통념을 뒤집는 시각으로 역사의 잃어버린 조각들을 맞춰왔다. 이를테면 세계사는 농경민과 유목민의 두 축으로 이뤄졌으며, 근대 유럽의 성공은 그리스·로마 문명의 결과라기보다 몽골시대가 낳은 ‘세계사’의 탄생 덕분이라는 것, 칭기스 칸은 정복을 위한 전쟁광이 아니라 유목세계의 군주로 보아야 한다는 것 등이다. 세계사는 민족이나 국가를 뛰어넘어 각각의 역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개된 총체적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그는 거듭 강조했다. “역사 연구는 주요 문명과 강대국 중심 ‘메이저 리그’니까요. ‘마이너한’ 부분을 알아야 세계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하나의 세계사를 보기 위해서는 중앙유라시아사가 중요하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파괴와 정복을 일삼는 몽골제국이라는 고정관념 대신 그는 제국 형성 뒤 일어난 수많은 교류와 통합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몽골인들은 일제나 중국처럼 자기들의 신앙이나 가치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았고 문화적·민족적으로 다원주의적이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요즘 2017년 완간을 목표 삼아 <케임브리지 몽골제국사>를 집필중이다. 몽골제국의 교류와 통합의 역사를 다룬 케임브리지대학출판부 역사시리즈로, 이스라엘 학자와 함께 책임을 맡아 “가장 일선에서 뛰는” 세계 40여명 학자를 필자로 위촉했다. ‘총체적 역사’(integrative history) 서술의 출발이자 몽골제국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인류사를 한단계 높일 대기획이다. “몽골제국사는 총체적 역사 서술의 시험대이자 종착역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도 세계와 단절되고 중국에 매몰될 이유가 없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다시 유라시아적 시각을 회복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지요. 중국을 넘어 세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터키쪽 문화와 연구 교류도 많아져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그는 후학에 대한 걱정을 거두지 못했다. 일본만 해도 이란의 대서사시 <제왕의 서>(Shahnameh)가 완역됐지만 우리는 페르시아어로 된 중요 고전들에 무관심하다. 동양사학에서도 중국 중심의 문화적 편향성이 심해 역사연구의 불균등 발전이라는 제도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연구를 할 인재를 키워야 하고 그들이 밥걱정 없이 연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후학을 위한 선학의 ‘터닦이’는 계속된다. 그는 곧 최초의 세계사인 <라시드 앗 딘의 집사> 4~5권 번역에 돌입할 예정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김호동 교수는 ‘칸’이라 불리는 사나이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내륙아시아 및 알타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중앙유라시아연구소 소장, 제23대 동양사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스웨덴 웁살라대 교환교수, 독일 뮌헨대 교환교수 등을 지냈다. 학부 시절에는 동양사학의 대가인 민두기·고병익 교수에게 배웠다.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한 플레처 교수는 김 교수가 박사논문 자료를 수집하려고 외국에 머무를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플레처 교수가 옛날 해당 분야 최고 권위자인 중동학의 프라이, 투르크학 프리착, 몽골학의 클리브스 세사람의 지식과 학맥을 이어받았으니 김 교수 또한 그들을 사숙한 셈이다. 대중강연이나 언론 연재에서도 그의 열정적인 이야기를 가끔 만나볼 수 있어, 올 초에도 석학들을 초청하는 ‘문화의 안과 밖’(네이버문화재단) 강연에서 연사로 나섰다. 그는 “대중성과 학문적 엄밀성의 조화는 언제나 고민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1860~70년대 신장 무슬림 봉기에 대해 박사논문을 쓰고 1986년 귀국한 뒤 중앙아시아 초원의 유목민족사와 14세기 이슬람화 이후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사회 연구에 집중했다. 2000년께부터 집중적으로 몽골제국사 연구에 몰두했다. “몽골제국의 크기가 엄청났고, 그간 훈련해온 다양한 언어와 지식을 활용해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나고 도전의식이 생겼다”고 그는 말했다. 몽골제국은 우리 역사와 관련해 의미 있는 연구 분야이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1999: 미국 스탠포드대학 출판부에서 ‘Holy War in China’라는 제목으로 2004년 출간) <황하에서 천산까지>(1999)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2002) <몽골제국과 고려>(2007)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2010)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공저·2007) 등이 있다. 주요 역서로는 <유목사회의 구조>(하자노프, 1990) <이슬람문명사>(버나드 루이스, 1994)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르네 그루세, 공역·1998)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2000) <부족지: 라시드 앗 딘의 집사1>(2002) <역사서설>(이븐 할둔, 2003) <칭기스 칸기: 라시드 앗 딘의 집사2>(2003) <칸의 후예들: 라시드 앗 딘의 집사 3>(2005) 등이 있다. 이유진 기자
현지어공부 첫 세대로 왕성한 활동
‘아틀라스’ ‘케임브리지 몽골제국사’ 집필 역사 에세이를 보면 한때 ‘문학청년’이던 그의 섬세한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황하에서 천산까지>가 대표적이다. 중국에 맞선 달라이라마와 티베트인들의 독립운동, 순교자들의 피와 눈물로 얼룩진 회족의 역사, 위구르인들의 독립투쟁 같은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는 이 책으로 “약하고 짓눌려온 민족들의 비가”를 들려주고 싶었다면서도 “어느 민족에게도 언제나 비통한 과거만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썼다. 역사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잃지 않는 것이다. 사실 그는 세계사의 통념을 뒤집는 시각으로 역사의 잃어버린 조각들을 맞춰왔다. 이를테면 세계사는 농경민과 유목민의 두 축으로 이뤄졌으며, 근대 유럽의 성공은 그리스·로마 문명의 결과라기보다 몽골시대가 낳은 ‘세계사’의 탄생 덕분이라는 것, 칭기스 칸은 정복을 위한 전쟁광이 아니라 유목세계의 군주로 보아야 한다는 것 등이다. 세계사는 민족이나 국가를 뛰어넘어 각각의 역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개된 총체적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그는 거듭 강조했다. “역사 연구는 주요 문명과 강대국 중심 ‘메이저 리그’니까요. ‘마이너한’ 부분을 알아야 세계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하나의 세계사를 보기 위해서는 중앙유라시아사가 중요하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파괴와 정복을 일삼는 몽골제국이라는 고정관념 대신 그는 제국 형성 뒤 일어난 수많은 교류와 통합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몽골인들은 일제나 중국처럼 자기들의 신앙이나 가치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았고 문화적·민족적으로 다원주의적이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요즘 2017년 완간을 목표 삼아 <케임브리지 몽골제국사>를 집필중이다. 몽골제국의 교류와 통합의 역사를 다룬 케임브리지대학출판부 역사시리즈로, 이스라엘 학자와 함께 책임을 맡아 “가장 일선에서 뛰는” 세계 40여명 학자를 필자로 위촉했다. ‘총체적 역사’(integrative history) 서술의 출발이자 몽골제국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인류사를 한단계 높일 대기획이다. “몽골제국사는 총체적 역사 서술의 시험대이자 종착역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도 세계와 단절되고 중국에 매몰될 이유가 없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다시 유라시아적 시각을 회복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지요. 중국을 넘어 세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터키쪽 문화와 연구 교류도 많아져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그는 후학에 대한 걱정을 거두지 못했다. 일본만 해도 이란의 대서사시 <제왕의 서>(Shahnameh)가 완역됐지만 우리는 페르시아어로 된 중요 고전들에 무관심하다. 동양사학에서도 중국 중심의 문화적 편향성이 심해 역사연구의 불균등 발전이라는 제도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연구를 할 인재를 키워야 하고 그들이 밥걱정 없이 연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후학을 위한 선학의 ‘터닦이’는 계속된다. 그는 곧 최초의 세계사인 <라시드 앗 딘의 집사> 4~5권 번역에 돌입할 예정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김호동 교수는 ‘칸’이라 불리는 사나이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내륙아시아 및 알타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중앙유라시아연구소 소장, 제23대 동양사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스웨덴 웁살라대 교환교수, 독일 뮌헨대 교환교수 등을 지냈다. 학부 시절에는 동양사학의 대가인 민두기·고병익 교수에게 배웠다.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한 플레처 교수는 김 교수가 박사논문 자료를 수집하려고 외국에 머무를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플레처 교수가 옛날 해당 분야 최고 권위자인 중동학의 프라이, 투르크학 프리착, 몽골학의 클리브스 세사람의 지식과 학맥을 이어받았으니 김 교수 또한 그들을 사숙한 셈이다. 대중강연이나 언론 연재에서도 그의 열정적인 이야기를 가끔 만나볼 수 있어, 올 초에도 석학들을 초청하는 ‘문화의 안과 밖’(네이버문화재단) 강연에서 연사로 나섰다. 그는 “대중성과 학문적 엄밀성의 조화는 언제나 고민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1860~70년대 신장 무슬림 봉기에 대해 박사논문을 쓰고 1986년 귀국한 뒤 중앙아시아 초원의 유목민족사와 14세기 이슬람화 이후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사회 연구에 집중했다. 2000년께부터 집중적으로 몽골제국사 연구에 몰두했다. “몽골제국의 크기가 엄청났고, 그간 훈련해온 다양한 언어와 지식을 활용해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나고 도전의식이 생겼다”고 그는 말했다. 몽골제국은 우리 역사와 관련해 의미 있는 연구 분야이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1999: 미국 스탠포드대학 출판부에서 ‘Holy War in China’라는 제목으로 2004년 출간) <황하에서 천산까지>(1999)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2002) <몽골제국과 고려>(2007)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2010)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공저·2007) 등이 있다. 주요 역서로는 <유목사회의 구조>(하자노프, 1990) <이슬람문명사>(버나드 루이스, 1994)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르네 그루세, 공역·1998)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2000) <부족지: 라시드 앗 딘의 집사1>(2002) <역사서설>(이븐 할둔, 2003) <칭기스 칸기: 라시드 앗 딘의 집사2>(2003) <칸의 후예들: 라시드 앗 딘의 집사 3>(2005) 등이 있다. 이유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