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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의 반란과 한반도/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5. 4. 08:53

사설.칼럼칼럼

[세계의 창] 지정학의 반란과 한반도 / 진징이

등록 :2015-05-03 18:45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지구촌은 세계화와 지역 경제 블록화를 통해 새로운 세기를 장식하는 듯했다. ‘지정학의 세기’가 끝나고 ‘지경학의 세기’가 다가오는 듯했다. 그렇지만 지정학의 반란이라 할까, 미국의 ‘아시아 회귀’가 이루어지면서 바야흐로 새로운 지정학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오바마 정권 1기 출범 뒤 아시아를 순방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중-미 관계를 ‘동주공제’(同舟共濟·한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 관계)라고 했다. 발언의 배경은 미국발 경제위기였다. 중국은 협력했다. 중-미 관계에 장밋빛이 비치는 듯했다. 아들 부시 정부 시절 중-미는 최상의 밀월을 즐기기도 했다. 배경은 9·11 테러였다. 위기는 중-미 우호관계의 공간을 넓혀줬다. 중국 주도의 6자회담이 이뤄진 배경이기도 하다.

위기가 끝나면서 곧바로 갈등의 릴레이가 펼쳐졌다. 결국 중-미 관계는 동주공제가 아니라 ‘오월동주’라 해야 맞을 것 같다. 원수 관계인 오, 월 두 나라 사람들이 한배를 탔다가 세찬 풍랑을 만나 함께 협력했고, 위기가 끝나자 원 상태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겠다.

오바마 대통령이 내놓은 아시아 재균형 전략과 아시아 회귀 전략은 사실상 중국의 부상이라는 역학구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은 아·태 지역 해양세력을 중심으로 판을 새로 짜고 있다. 어찌 보면 1950년대 존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내놨던 공산권 봉쇄 해양라인(도련선·Island chain)을 재현하고 있다 하겠다. 그래서일까. 경제협력의 이름을 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티피피·TPP)이며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도 지정학의 색채가 덧씌워진다. 미국이 새 지정학적 위기를 몰고 온 것만은 분명하다.

근대사 이후의 역사를 보면 동북아에서 지정학이 강조되면 될수록 피해를 본 나라는 한반도였다. 동북아의 중요한 전쟁 거의 모두가 한반도 문제에서 비롯됐다. 동북아 지정학 게임의 축이 한반도였던 셈이다. 어찌 보면 오늘의 지정학 위기도 북핵 게임이 만들어 온 것일 수 있다.

이제 그 지정학이 다시 동북아를 강타할 태세다. 한반도가 이번에는 비껴갈 수 있을까. 당장 벌어지고 있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AD) 논쟁은 한국이 겪을 지정학적 갈등을 앞당겨 보여주고 있다. 윤병세 외교장관은 한국의 처지를 대국에 러브콜을 받는 ‘축복’ 상황이라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북한이 지정학적 열세를 지정학적 우세로 전환시켜 대국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다. 우연일까?

이제까지 한반도의 지정학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로 집약됐다. 이제 달라진 게 있다. 바로 ‘새우의 반란’이다. 한국은 이미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 한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참여를 ‘새우가 미-중 두 고래를 길들인 것’이라고도 한다. 분명한 것은 한국이 이제 적어도 중급 고래는 됐다는 것이다. 북한도 스스로를 ‘군사강국, 사상강국’이라 한다. 분명 새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열 상태의 남북한이 대결을 벌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축복이 아니라 다시 재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1880년대 청나라 주일공사 황쭌셴은 <조선책략>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親中, 結日, 聯美) 책략을 내놨다. 한반도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지정학 게임이 시작된 배경이라 하겠다. 게임의 결과는 참담했다. 교훈은 자명했다.

불행히도 지금의 한반도는 남, 북으로 분열돼 상대를 적국으로 설정하고 ‘이이제이’ 게임을 벌이고 있다. 고래를 불러 싸움을 시키는 격이라 할까. 남북한 스스로가 ‘새우’ 역을 자초하는 것은 아닐까?

황쭌셴은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자강(自强)을 도모할 것을 바랐다. 하지만 조선은 이이제이에만 관심을 보였다. 조선이 망한 데는 ‘자강도모’ 결여가 큰 역할을 했다.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
새로운 지정학 위기는 이미 한국에서 열띤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어찌 보면 이이제이 패턴의 연속이라 할까. 강대국 행보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에 위기가 보이는 것 같다. 한국이 가야 할 길은 북한과 화해, 협력하며 한반도의 자강을 도모하는 길이 아닐까.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