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동맹 신격화에 대해선 비판적이었지만, 솔직히 주한미군 철수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건 북한의 일방적이고 현실성 없는 주장일 뿐이었고,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시절에나 있었던 옛날이야기 정도로 치부했다. 머뭇하는 사이, 그 전문가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느냐”고 재차 물었다. 느닷없는 질문에 정리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미-중 관계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보고 나서야 질문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주에 만난 워싱턴의 한 노교수로부터도 엇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약화로 생길 수 있는 힘의 공백에 대해 한국이 준비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힘의 공백의 대표적 상징은 주한미군 철수일 것이다. 4년 전 하와이에서 만난 전문가와 똑같은 문제의식이다.
미국의 한편에서 오가는 이런 논의들은 미국과 중국의 세력 교체를 염두에 둔, 미국 전문가 집단의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중국과 미국의 헤게모니가 직접적이고 일차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미-중 관계의 근본적 변화는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형태로 한반도에도 쓰나미급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그에 견줘보면, 한동안 한국 외교를 괴롭혔던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문제나 당장 현안으로 떠오른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항일전쟁 승리 기념 열병식 참석 문제는 고민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미-중 관계가 한반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할 때 갈등 양상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남중국해에서 우발적일지라도 무력 분쟁이 발생한다면, 중동에서 믈라카 해협을 거쳐 들어오는 한국의 원유 수송로가 막혀 에너지 대란이 벌어질 것이다. 미국의 적극적 군사적 개입이 없어도, 갈등의 전개 양상은 미-중 간 대립으로 번질 수밖에 없다. 미국은 한국에 어떤 식으로든 일정한 역할을 요구할 것이고, 중국도 한국을 최소한 중립화시키기 위해 총력전을 펼칠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평화적으로’ 세력 교체를 해도 마냥 낙관적인 미래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약해지면 이 지역 헤게모니를 중국에 넘기는 양국의 ‘빅딜’이 이뤄질 수도 있다. 실제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학계에서는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미국 역할을 축소하자는 주장이 나와 뜨거운 논쟁들이 벌어졌다. 축소론자들은 유럽과 중동뿐 아니라, 동아시아 쪽에서도 비용 절감을 위해 한국의 지상군을 철수하고 일본의 기지들도 크게 축소하자고 설파했다.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헤게모니를 넘겨받는다면 한반도에 어떤 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할까?
미국 학계가 예상하는 또 하나의 시나리오는 중국과 일본이 지역 내 경쟁관계를 청산하고 적극적 협력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시키는 것이다. 일본이 영국, 독일, 미국 순으로 패권국가와 밀착관계를 유지해온 근대 역사를 돌이켜보면 현실성이 전혀 없는 얘기도 아니다. 군사력으로 몸집을 키운 일본은 중국에 지분을 요구할 것이고, 한국의 외교적 공간은 지금보다 더욱 좁아질 수 있다.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