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1965년 한일협정 회담 문서를 전면 공개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전쟁희생자한국유족회 등 관련 단체 5곳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한·일 양국이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갈등을 반복하는 것은 협정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문서 전면 공개를 요구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위안부 문제 해결 강조하며
사실상 한일관계 전제조건 내세워
올 들어 대화쪽으로 급선회
‘미국 정부의 재촉 탓’ 지적 나와
과거사 진전 없이 정상회담 땐
박근혜정부 ‘판정패’ 비판 불 보듯
사실상 한일관계 전제조건 내세워
올 들어 대화쪽으로 급선회
‘미국 정부의 재촉 탓’ 지적 나와
과거사 진전 없이 정상회담 땐
박근혜정부 ‘판정패’ 비판 불 보듯
최근 4년여 동안 최악의 갈등을 겪어온 한-일 관계가 양국 정상의 수교 50주년 행사 참석으로 개선의 실마리를 마련했다. 하지만 양국간 최대 현안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는 미국의 압력 등에 밀려 의미있는 화해를 이루지 못한 채 미봉책으로 마무리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일 양국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이명박 정부 집권 후반기와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4년여 동안 최근 한-일 외교사에 드물 정도의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후반기엔 위안부 문제 협상이 결렬되고 이명박 대통령이 2012년 8월 전격적으로 독도 방문을 하면서 양국 관계는 급격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도 2013년 2월 전임 정부가 남긴 ‘위안부 문제’라는 유산 위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상대가 합리적 역사 인식을 가진 민주당 정권이었던 데 견줘, 박 정권의 상대는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 인정과 식민지배·침략에 대한 사죄와 반성에 거부감을 공공연히 밝혀온 아베 신조 총리였다.
박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아베 총리를 상대로 ‘역사 공세’의 수위를 높였다. 그는 2013년 3·1절 연설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의 성의있는 조처를 강하게 요구했다. 특히 박 대통령은 조건 없는 한-일 정상회담 개최를 주장하는 일본 쪽 요구에 맞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정상회담 실현의 실질적인 ‘전제 조건’으로 내세웠다.
위안부 문제가 국내외적으로 쟁점화되면서 한국의 끈질긴 요구와 한-일 시민사회 등의 연대 등으로 일단 일본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는 수정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전세계의 저명한 역사학자 187명과 일본의 역사학자 1만여명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가 한국이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물어야 할 여성에 대한 전시 성폭력이자 인권 문제이며, 중요한 역사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는 국제적인 여론도 일정 정도 형성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를 한-일 관계와 양국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내건 박근혜 정부의 전략은 현실외교에선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선 일본 사회의 근본적인 역사 인식 틀이 바뀌어야 하는데, 이는 단기간에 해결이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를 정상회담 개최의 입구에 놓으면서 한-일 관계는 멈춰버리고, 역설적으로 한-일 관계 개선을 요구하는 미국의 압력은 갈수록 거세졌다.
이런 상황에서 6월 들어 갑작스럽게 나온 박근혜 대통령의 ‘위안부 협상 진전’ 발언과 한-일 관계 급진전은 한·일 양국간 대화의 축적된 결과물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압력에 밀려 나온 고육책으로 평가된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들에 대한 어떤 사전 설명도 없이, 취소되기는 했지만 방미를 코앞에 둔 11일치 미국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에 상당한 진전이 있다. 협상이 막바지 단계에 왔다”고 말한 것도, 미국을 상대로 한 발언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대중국 견제를 위한 한-미-일 삼각 안보협력 강화를 핵심 의제로 내세우고 있는데, 한-일 갈등은 이에 대한 최대 걸림돌로 여겨졌다.
실제 올해 들어 미국은 한-일 관계 개선을 최우선 외교 과제의 하나로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3월 웬디 셔먼 미 국무차관, 4월 애슈턴 카터 미 국방장관이 한국 쪽에 ‘미래’에 초점을 맞출 것을 강조한 것도 위안부 문제 등으로 더이상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지 말 것을 요구하는 미국 쪽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대일 과거사 문제에서 공조를 취했던 중국이 일본과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움직임도 한국의 대일 접근을 서두르게 만들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남미순방에 나선 4월말, 시진핑 중국 주석과 아베 총리는 전격적으로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과거사 문제로 으르렁거리던 중-일이 관계 개선의 가속도를 낼 경우, 한국은 동북아에서 외교적 고립에 처할 수 있다.
남은 과제는 한국이 위안부 피해자들과 국내 여론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결과를 이끌어내면서 한-일 정상회담에 나설지 여부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 정부의 ‘선조처’는 나오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성과 없이 한-일 정상회담에 나설 경우 4년간 이어진 외교전의 치욕적 ‘판정패’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최근 일본 언론에 보도된 양국간 협상 내용은 이명박 정부 시기에 일본이 제안했으나 한국이 거절한 이른바 ‘사사에 안’보다도 더욱 후퇴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22일 도쿄에서 특파원단을 만나 “여러 현안이 당장 해결되긴 쉽지 않겠지만, 이렇게 조금씩 대화를 해가면서 위안부 문제 등에 있어서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전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8월에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의 내용을 뺀 ‘아베 담화’ 등이 나올 경우, 박근혜 정부의 대일 외교와 외교 전반에 대한 비판이 거세질 가능성이 높다.
도쿄 워싱턴/길윤형 박현 특파원, 이용인 기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