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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식이 남긴 것들/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9. 1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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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열병식이 남긴 것들 / 성연철

등록 :2015-09-10 18:56

 

중국의 열병식 준비가 한창이던 지난달 30일 길가 폐품수집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책상이 낡아서 처분하려고 하는데요, 오후에 좀 와서 가져가 주세요.”

“지금은 안 됩니다. 열병식 때문에 3일까지 나갈 수 없고 쉬어야 해요.”

폐품상은 열병식이 끝난 4일에야 다시 영업을 시작했다.

중국이 말 그대로 온 국력을 기울여 준비했던 항일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열병식이 마무리됐다. 잠시 멈춘 듯했던 베이징 시내는 일상의 평온을 되찾았다. 열병식 하루 뒤 비와 함께 찾아온 스모그는 이를 더욱 실감케 한다.

열병식은 흠잡을 데 없는 행사였다. 열병식 블루(Blue)라는 말마따나 청명한 하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보폭을 맞춰 행진한 1만2천여 중국군과 각종 신형 무기들은 중국의 ‘군사굴기’와 집권 중국 공산당의 힘을 세계만방에 과시했다. 반전도 곁들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열병식 기념사 말미에 “중국군을 향후 30만명 감축하겠다”고 깜짝 선언을 했다. 열병식이 그저 중국의 군사 근육을 뽐내는 위력 과시의 장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던 서방의 허를 찌른 셈이다. 안보 법제 제·개정을 통해 대외 군사적 팽창을 도모하는 아베 신조 일본 정권과도 차별화를 시도했다. 일본 안보 법제는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 인민들의 애국심을 한껏 고취시키는 효과도 거두었다.

하지만 열병식의 열기가 가신 지금, 중국이 맞닥뜨린 과제는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열병식은 자국민의 뿌듯함도 끌어올렸지만 동시에 세계 각국의 대중국 경계심도 끌어올렸다. 강대국의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는 위정자들에겐 유용한 도구지만 다른 나라들엔 근심거리다. 30만 병력 감축 카드로 의구심과 걱정을 불식시키기에는 열병식에 등장한 최신예 무기의 위력적 인상이 너무 강렬했다.

‘괌 킬러’, ‘항공모함 킬러’ 등의 별명을 지닌 장거리 미사일들은 동·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주변국은 물론 미국마저 긴장하게 한다. 시 주석은 “1억명이 숨진 2차대전 중에 중국인 희생자가 3500만명이나 된다”며 현 국제사회를 만든 중국의 공헌을 강조하고, “절대 패권, 팽창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강조했지만 우려를 달래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때마침 나온 미국 퓨리서치센터의 아시아 10개국 국민 대상 여론조사에서는 중국(57%)보다 일본에 대한 호감도(71%)가 더 높은 것으로 나온다.

중국 내부적인 과제도 쉽지 않다. 열병식은 요동치는 주식시장을 비롯한 중국 경기 침체와는 무관한 이벤트다. 베이징 시민을 비롯한 많은 중국 인민들은 기꺼이 열병식을 위해 불편을 감수했지만, 누구나 그렇듯 제 지갑이 가벼워지는 데는 인내심이 얕다. 여론의 지지를 얻었던 부정부패 척결 작업도 2년여를 지나면서 “그래, 속은 시원해요. 그런데 나한테 정작 돌아오는 건 뭐죠?”(한 택시기사)라는 물음표가 달리기 시작했다.

민심을 동요케 하는 대형 ‘인재’들을 방비하는 것도 과제다. 새해 벽두부터 터진 상하이 와이탄 압사 사고와 400여명의 사망자를 낸 6월 양쯔강 여객선 전복 사고, 160여명이 숨진 8월 톈진항 폭발 사고까지. 올해 중국은 ‘사고의 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다. 당국은 전가의 보도와 같은 유언비어 유포 단속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민심은 불안하다.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중국은 열병식에서 날씨마저 통제할 수 있다는 ‘전능’을 보여주었다. 시진핑 집권 1기 5년의 절반을 돌 때쯤 열린 열병식은 중국 지도부에 잠시 재정비의 시간을 주었다. ‘전능’을 어떻게 사용할지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성연철 베이징 특파원 sych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