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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한울님이다/ 곽병찬의 향원익청/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10. 7. 13:18

사설.칼럼칼럼

해월 추모비와 무위당의 통곡

등록 :2015-10-06 18:38수정 :2015-10-06 21:41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1990년 4월12일,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지방도로 옆 송골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졌다.무위당이 치악산 고미술동우회원과 함께 조성한 해월 추모비였다.그날 무위당은 온몸이 들썩이도록 오열했다.

“한울님을 섬기듯이 사람을 섬기라.”모심과 섬김. 세상이 평화에 이르는 길이요 사람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하지만 그때 권력자에겐 대역죄였다.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인간의 처지는 오히려 더 비천해졌다.상품이 되어버렸다.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온다고 하지 말고 한울님이 온다고 하라.”

해월 최시형은 ‘사람이 곧 한울’이라고 했다. 한울을 어찌 박대하고 멸시할까. 그는 모두가 서로 존경하고 존경받는 세상을 꿈꿨다. 권력은 노했다. 어찌 천한 것들이 하늘을 자처하는가! 권력은 그를 잡아 죽이려 했고, 그는 보따리 하나 메고 천지를 떠돌며 천한 이들을 섬기고 또 섬겼다.

120~130여년 전, 봉건 압제의 모순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차별과 억압, 천대와 경멸, 굴종과 증오가 임계점에 이르렀던 때였다. 그런 시대를 향해 해월은 말했다.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 사람이 곧 한울이다. 섬기고 또 또 섬기라,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또 존중하라.’

해월 시대로부터 100여년 뒤 무위당 장일순은 그렸다. 들꽃 속에서 웃음짓는 한울님을, 새가 지저귀며 전하는 한울님의 뜻을. 그런 해월과 무위당을 두고 박맹수 원광대 교수는 말했다. “100년 전 무위당이 해월이었다면, 100년 후 해월이 무위당이었다.” 무위당의 전생은 해월이었고, 해월의 현생이 무위당이라는 것이다.

1990년 4월12일,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지방도로 옆 송골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졌다. 무위당이 치악산 고미술동우회원과 함께 조성한 해월 추모비였다. 상단부 오석엔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라는 글이, 몸돌엔 “천지즉부모요 부모즉천지니, 천지부모는 일체라”라는 해월의 글이 무위당 글씨로 새겨졌다.

그날 무위당은 온몸이 들썩이도록 오열했다. 벗들은 그 까닭을 짐작했다. 가장 낮은 곳으로 천리만리 기어다니며 모심을 실천한 해월, 그는 경멸과 증오의 세상을 존경과 섬김의 세상으로 바꾸려 했다. 그런 해월을 소수 천도교 신자들만 동학 2대 교주로 숭모할 뿐, 누구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따르려 하지 않는다. 사후 92년이 되어서야 겨우 표석 하나 세워졌다!

그날 어쩌면 무위당에겐 예수와 겹쳐지는 해월의 체포 당시 모습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추모비에서 500여미터 떨어진 원진녀 가옥은 해월이 마지막으로 체포된 곳. 1898년 4월5일이었다. 해월은 평소처럼 새끼를 꼬면서 그를 체포하러 오는 관병을 기다리고 있었다. 2천여년 전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 병정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끌려간 해월은 종로통에서 교수대에 달렸고, 예수는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렸다.

마침 동학이 가장 기념하는 날 가운데 하나인 수운 최제우의 도통제일이었다. 전날 손병희 임순호 김연국 손병흠 등 애제자들이 향례를 위해 찾아왔다. 그러나 해월은 이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군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향례를 지내라.” 제자들은 따졌지만 해월의 답은 단호했다. “생각한 바 있으니 명을 어기지 말라.” 이튿날 아침 해월은 홀로 조촐하게 향례를 올렸다. 그 시각 여주에서 해월의 행선지를 알아낸 관군은 송골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전까지 해월은 필사적인 아니 신출귀몰한 도망자였다. 수운에게서 도통을 전수받는 1863년부터 1898년까지였으니 무려 36년 동안이었다.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 함경도 등 그가 머문 피난처는 200여곳이나 됐다. 수운이 처형당한 뒤 그랬고, 영해작변이 실패한 뒤 그랬고, 동학농민전쟁 뒤 그랬다. 하지만 구명도생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차별 없는 세상을 열어갈 ‘길’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1871년 영해작변 이후 23년간 피신하면서 해월은 혁명을 일으킬 만큼 교세를 키웠다. 차별 철폐에 대한 민중의 염원은 강했다.

그러나 피신 생활은 곤고했다. <도원기서>는 그 일단을 이렇게 전한다. 영해작변으로 피신할 때였다. “무릎이나마 간신히 펼 수 있는 바위를 찾아 이파리를 쓸어내고 자리를 만들고, 풀을 엮어 초막을 지었다. ~마시지 못하고 먹지도 못한 지가 열흘이요, 소금 한 옴큼도 다 떨어지고, 장 몇 술도 비어 버렸다.”

고난 속에서 깨달음과 의지는 깊어지는 법. 용화동 시절 해월은 시천주(侍天主, 사람마다 한울을 모시고 있다) 교리를 인즉천(人卽天, 사람이 곧 한울)으로 발전시켰다. “사람은 곧 한울님이라, 사람은 평등하며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사람으로써 귀천을 나누는 것은 한울님의 뜻에 어긋남이라, 일체의 귀천을 철폐하라.”

1870년대 주요 피난처였던 영월 직동은 매봉산 백운산 두위봉 등 해발 1000m 이상 산들로 둘러싸인 벽지였다. 그곳에서 해월은 실천윤리를 확립했다. “덕으로써 사람을 교화하는 것이 순천이라면 힘으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은 역천이다.” “사람이 폭력과 분노로 대하거든 인자함과 용서로써 대하고, 상대가 힘과 돈으로 억누르려거든 공정과 정의로써 대하라.”

요체는 비폭력 평화였고, 그 바탕은 사사천(事事天) 물물천(物物天), 3경(敬) 사상이었다. ‘일마다 한울을 모시는 것이요, 생명마다 한울님이니 한울을 공경하고(敬天), 사람을 공경하고(敬人), 만물을 공경하면(敬物) 세상이 화순해진다.’

약자에 대한 섬김은 특별했다. 당대의 가장 약한 이는 여성과 어린이였다. 1884년 말, 청주 북이면 한 제자 집에 들렀을 때 베 짜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베를 짜는가.” “제 아내입니다.” “누가 베를 짜는가.” “제 아내입니다.” “한울님이 베를 짜고 있느니.”

해월은 1890년 초 <내칙>과 <내수도문>을 반포한다. “과거에는 부인을 억압했으나, 이제 부인이 도통하여 사람을 살리는 일이 많을 것이다. 이는 사람이 모두 어머니의 포태에서 나서 자라는 것과 같다.” 어린이에 대해서는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한울님을 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제자 의암(천도교 3대 교주)은 스승의 뜻을 꽃으로 피웠다. 천도교는 1908년 여성전도회를 조직했고, 여성 월간지 <부인> <신여성>을 창간했다. 의암의 사위 소파 방정환은 1923년 9월부터 전국을 누비며 동화대회 등을 열어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줬다. 이 땅의 여성운동과 어린이운동의 뿌리는 서구가 아니라 동학이었다.

1894년 12월24일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명한 그는 다시 험난한 피난길에 오른다. 음성 구계리, 황새말, 매산을 거쳐 강원도 인제 느릅정이에 머물며 함경도와 평안도 등지로 장사를 겸한 포덕에 나섰다. 1년 뒤 원주 치악산 수레너미(현재 횡성군 안흥면 강림리)에 오두막을 짓고 머물다가 또 충주 음성 청주 상주 여주 등지를 떠돌며 제자를 길렀다.

체포되기 1년 전인 1897년 4월5일 이천군 설성면에서 그는 전대미문의 제례법을 공식화한다. “부모의 영령은 자식에게 남아 있다. 제사를 받들고 위를 베푸는 것은 자식을 위하는 것이 본위이다. 평상시 식사하듯이 나를 중심으로 위와 음식을 진설하고, …부모의 유업과 유지를 생각하면서 맹세하는 것이 옳다.” 벽을 향하던 제사(향벽설위)를 나를 향한 제사(향아설위)로 바꿨다. 한울을 모신 이가 중심이었다. 동서양의 다른 모든 제례와 전례는 산 자가 죽은 자에게, 인간이 신에게 올린다.

다시 여주 전거론으로 옮겨 머물던 중 관병의 급습을 당한다. 용케 빠져나와 양평, 홍천 등지를 거쳐 1898년 1월 송골로 피신했지만, 4월5일 체포됐다. 해월은 한양 서소문 감옥에 갇혔다. 혼자서는 일어서기도 힘든 큰칼을 목에 찼다. 서울 공평동 평리원으로 재판을 받으러 오가는 동안, 나졸이 도와주는데도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곤 했다. 6월2일에야 큰칼을 벗고 교수대에 올랐다.

“한울님을 섬기듯이 사람을 섬기라.”(事人如天) 모심과 섬김. 세상이 평화에 이르는 길이요 사람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하지만 그때 권력자에겐 대역죄였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인간의 처지는 오히려 더 비천해졌다. 상품이 되어버렸다.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는 게 상품. 상품은 쓰고 버려진다. 존중과 섬김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곽병찬 대기자
곽병찬 대기자
무위당은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한 그 현실이 참담했을 터이고, 그것이 통곡으로 터져 나왔을 것이다. 무위당은 추모비 제막 후 4년이 지나 세상을 떠났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