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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실패한 것/ 유봉학 한신대 명예교수/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11. 3. 08:31

사설.칼럼칼럼

[시론] 박 대통령께 드리는 정조시대 역사의 교훈 / 유봉학

등록 :2015-11-02 18:41

 


올바른 역사관과 역사교육을 부르짖는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확신에 차 있었다. 잘못된 역사관과 비정상적 역사교육에 매서운 질타가 이어졌다.

마침 연설 전날인 10월26일은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지 36년이 되는 날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서일까,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자고 하는 대통령의 표정은 한껏 격앙되어 있었다.

그래, 무엇이 ‘올바른 역사관’이며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올바른 역사교육’이지? 평생을 여기에 매달려온 이들에게는 언제나 어려운 문제고 그래서 역사학자라면 신중할 수밖에 없는 문제임에도 대통령은 거침이 없었다.

문득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 앞에 몸부림쳤던 그 아들 정조대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렵사리 임금이 된 정조는 아버지를 복권시키고자 했다. 그러자면 역사의 진실을 밝혀 사도세자의 죄명을 벗겨내야 한다.

사도세자를 죽인 사람이 그 아버지 영조였음은 분명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여러 신료들, 그리고 정조 자신도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설명과 변명이 있을 뿐, 왜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의 진실은 당시엔 알기 어려운 문제였다. 객관적인 역사의 진실은 200년 후 오늘에 와서야 역사학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경사(經史)에 통달한 학자군주였기에 정조는 일단 역사의 진실 앞에서 신중했다. 당사자인 자신의 생각을 내세워 역사를 바로잡는다고 나서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그는 알았다. 그렇기에 1776년 임금이 되자 정조는 우선 탕평책을 내세워 신료들의 화합을 도모하고 그들과 겸허히 소통하며 신뢰를 얻고자 했다. 결국 13년의 노력 끝에 그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아버지 묘소를 수원의 천하명당 자리로 옮기고 국왕에 버금가는 지위로 높이기에 이른다.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명한 화성을 1796년 개혁의 시범도시로 멋지게 완성한 것도 이런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한 개혁군주로서 정조의 한계는 그 뒤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도세자 추존에 조급해진 정조는 신료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지도력을 강화하고자 스스로 정치 지도자이자 학문적 지도자라는 ‘군사’(君師)를 자처하면서 휘하 관료 학자들의 학문까지도 지도하려 들자 조정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올바른 학문’(정학·正學)과 ‘잘못된 학문’(사학·邪學)을 자의적으로 나눔으로써 신료들과의 소통과 화합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정조의 리더십은 오히려 위기에 봉착했고 개혁은 추진력을 잃게 된다.

정조가 등용했던 신료들의 냉담해진 태도에 정조는 배신감을 토로한다. 이는 정조에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었고 병환으로 이어졌다. 1800년 5월 그믐날 정조는 극도의 긴장 속에 신료들의 무조건적인 순종을 거듭 요구했지만, 신료들의 냉담한 반응에 직면했다. 6월초 병석에 든 정조는 자신의 가슴속에 화기가 생긴 것은 신하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원망하면서 급기야 6월28일 오후 서거하기에 이른다.

유봉학 한신대 명예교수
유봉학 한신대 명예교수
정치 지도자가 역사학자들과의 소통 없이 독단적으로 ‘올바른 역사관’과 ‘잘못된 역사관’을 나누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90%의 대한민국 역사학자가 좌경 내지 좌편향’이라고 선전하면서, 극소수 역사학자(?)들과 만드는 ‘올바른 역사교과서’가 과연 ‘올바른 역사관’을 제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역사 앞에 겸허했던 위대한 개혁군주, 정조대왕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적 교훈을 우리 대통령이 성찰의 자료로 삼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유봉학 한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