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서울대병원 수감 시절 김대중과 이희호는 비밀 쪽지로 소통했다. 사진은 이희호가 몰래 전해준 못으로 김대중이 새겨 쓴 쪽지로 모두 39장이 남아 있다.
이희호는 진주교도소로 보내는 편지에서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하기도 했다. “당신이 늘 말하는 바와 같이 ‘행함 없는 양심은 악의 편에 속한다’ 하는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사회를 새롭게 변혁시키는 행함으로 지상의 천국을 이루어나가야 할 줄 압니다.”(1977년 9월10일치 편지) 이희호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앙의 가르침도 되새겼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라도 다 할 수 있는 일이고 크리스천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것이니, 원수까지 사랑하는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1977년 9월25일치 편지)
김대중은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 사상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 이야기했다. “우리 국민과 마찬가지로 우리 집안도 지금 가장 힘든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옥중에 있는 나나, 밖에 있는 당신이나 아이들, 형제들이 이 고난의 시련을 정면으로 대하며 거기에 가장 효과적인 응전을 함으로써 후일에 이 기간을 일생의 가장 값있는 시절로 기억될 수 있게끔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1977년 5월28일치 편지) 김대중은 감옥 안에서 얻은 깨달음을 편지에 담기도 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패자의 운명 속에 태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운명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진리 속에 살다 죽은 사람만이 그 진리를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를 완성합니다. 진리란 우리의 양심이 받아들이는 인간의 길일 것입니다. 양심의 길이란 이웃사랑의 길이며 우리를 창조하고 우리를 사랑하며 독생자까지 보내시고 희생시킨 하느님의 길일 것입니다.”(1977년 8월29일 편지)
‘박동선 워싱턴 로비’ 코리아게이트
1977년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
망명한 전 중정부장 김형욱 ‘증언’
“디제이 납치, 박정희 재가없이 불가”
1977년 12월 김대중 서울대병원으로
‘3·1 사건’ 다른 구속자는 모두 석방
“남편도 석방되니 각서 쓰라 했대요”
박 정권 ‘인도적 조처’ 선전은 속임수
외부와 철통차단 ‘더 숨막히는 감옥’
줄줄이 구속된 비서들 옥바라지까지
영양실조·과로로 ‘관절염’ 평생 고통
1977년 12월19일 김대중은 진주교도소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왔지만, 기대와 달리 접견차단·창문봉쇄·서신제한·운동금지 등 철통감시로 감방보다 더 지독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진주 시절부터 옥바라지로 관절염을 앓게 된 이희호는 서울대병원 수발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그해 12월19일 새벽 김대중이 병상에 누운 채 서울대병원 특201호로 비밀리에 이송되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이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인 1977년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해에 한-미 관계를 뒤흔든 사건을 놓고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가 청문회를 열었다. 이 청문회에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증인으로 출석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건의 발단은 1976년 10월24일치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였다. <워싱턴 포스트>는 ‘한국 정부, 미국 정치인들에게 수백만달러 뇌물 제공’이라는 머리기사 제목 아래 열 면에 걸쳐 관련 사실을 상세히 보도했다. 요지는 ‘대통령 박정희의 지휘 아래 한국인 실업가 박동선과 한국 정보기관 요원들이 미국 상하원 의원과 정부 고관들에게 수년 동안 해마다 50만달러에서 100만달러에 이르는 뇌물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코리아게이트’라고 이름이 붙은 이 사건은 한·미 양국 정부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져가는 중에 제39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지미 카터가 당선됐다. 카터는 1977년 1월20일 ‘인권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하며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어 2월부터 미국 하원의 국제관계위원회에서 한-미 관계 조사권을 위임받은 소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 소위원회는 도널드 프레이저 위원장의 이름을 따 프레이저 위원회로 불렸다. 프레이저 위원회는 20여차례 청문회를 열어 증인 37명으로부터 증언을 들었다.
김대중이 갇혀 있던 서울대병원 특실병동 입구를 교도관과 정보부원들이 24시간 감시하며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청문회의 초점은 김형욱의 증언이었다. 망명 중이던 김형욱은 6월22일 청문회에 나와 1973년의 ‘김대중 납치사건’은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총지휘자가 되어 실행한 것이며, “그토록 중대한 공작이 박정희의 재가 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김형욱은 “김대중에 대한 박정희의 감정은 깊은 열등의식을 바탕으로 한 사적인 증오에 가까운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희호는 김형욱의 증언에 동의했다. “나는 김형욱씨의 발언 내용이 사실이라고 봅니다.” 청문회 뒤 김형욱은 미국에 유학 중이던 김경재와 함께 회고록을 집필해 박정희의 치부와 비행을 들추어냈다. 박정희 정권은 회유와 협박으로 김형욱을 한국으로 불러들이려고 했다. 김형욱은 1979년 10월1일 프랑스 파리로 갔다가 10월7일 의문의 실종을 당했다. 김형욱이 서울로 끌려온 뒤 청와대 지하실에서 박정희의 총에 사살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박정희의 죽음을 부른 10·26 사건이 나기 20일 전이었다.
1977년 6월22일 미국 망명 중인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73년의 ‘김대중 납치사건’은 중정부장 이후락이 박정희의 재가 속에 실행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김형욱은 79년 10월 파리에서 의문의 실종을 당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는 중정 요원들이 살해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이 투옥된 지 1년9개월째인 1977년 12월15일 이희호는 막내아들 홍걸과 함께 진주로 내려갔다. 겨울방학을 맞은 홍걸이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해서 함께 간 것이었다. 이희호는 홍걸과 여관에 투숙했다. 그날 밤 9시쯤 진주교도소에서 이희호를 찾는 전화가 왔다. 교도소장이 급히 만나자고 했다. 늦은 밤 교도소에 도착한 이희호에게 소장은 ‘병상(病狀) 조회 의뢰 신청서’를 써서 내일 아침 일찍 제출하되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동안 여러 번 신청서를 썼지만 한 번도 들어준 적이 없었어요.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여관에 돌아와 정성 들여 신청서를 썼지요.” 다음날 아침 이희호는 교도소에 서류를 냈다. “병원 비용을 우리가 책임진다는 각서를 쓰라고 했어요. 나는 바로 써주었어요. 그때는 남편이 병원으로만 옮겨져도 다행이라고 생각했거든요.”
12월19일 김대중은 진주교도소를 떠나 비밀리에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됐다. 이희호는 이날 오후 5시 서울구치소 소장의 연락을 받았다. 소장은 6시에 서울대병원 201호실로 가서 김대중을 면회하라고 했다. 앞으로 매일 낮 12시부터 2시까지,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면회할 수 있다는 말도 했다. “나는 소장의 말을 듣고 남편이 이 추운 겨울에 따뜻한 곳에 있게 됐다고 생각하고는 안도했어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3·1 사건으로 수감된 다른 구속자 가족들에게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게 속임수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12월25일 정부는 김대중만 빼고 3·1 사건 관련 구속자들을 모두 석방했다. 인도적 조처를 하는 척 병원으로 이감시켜 놓고 실제로는 석방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었다. 이희호는 일주일 뒤에야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달았다. 1978년 1월1일 저녁 안병무·박영숙 부부가 석방된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이희호도 초대받았다. “박형규 목사가 교도소를 다니며 남편을 포함해 전원이 석방되니 각서를 쓰라고 권유했다는 이야기를 거기서 처음 들었어요. 수감된 분들은 박 목사님의 이야기를 믿고 각서를 썼대요. 그래서 다들 석방될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는데, 나만 몰랐던 거예요.”
김대중이 들어간 병실은 말이 병실이지 감옥보다 더 숨이 막히는 곳이었다. 창문을 모두 막고 쇠창살로 친데다 불투명 유리창에 푸른색 비닐을 붙여서 밖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햇빛 한 줌, 바람 한 점 들어올 수 없었다. 교도소에서는 하루에 한 번 운동시간을 이용해 땅을 밟고 햇볕을 쏘이고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병원 감방은 외부도 없고 계절도 없는 공간이었다. 병실에 대한 통제는 더 철저했다. 병실 앞방을 교도관과 정보부원이 차지하고 앉아 24시간 감시했다. 병실 밖 복도에 이중 칸막이를 설치해 경찰 여러 명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했다. 칸막이 문에는 와이셔츠 단추만한 시찰경과 가로 7.5㎝, 세로 5㎝의 시찰구를 뚫어 밖의 동정을 살폈다.
교도관들은 이희호가 가져간 음식물과 소지품을 일일이 검사했다. “병실로 들어가면 교도관 두 명이 따라 들어와서 우리의 행동을 감시하고 대화를 듣고 일일이 기록했어요.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정말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요. 감옥에서보다 더 자유가 없었어요. 가족에게 편지도 쓰지 못하게 했고, 외부 우편물도 금지했지요.” 병실은 밀폐된 고문실이나 다름없었다. 김대중은 왼쪽 귀에서 소리가 난다고 이명 현상을 호소했다. 의사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다. “남편이 그렇게 밀실에 갇혀 있는데도 신민당은 항의 한마디 하지 않았어요.” 김대중은 1978년 3월28일 탈당계를 내고 신민당을 떠났다.
1978년 새해 벽두에는 동교동 비서들이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다. 1월1일 새해를 맞아 김대중이 없는 동교동 집에 많은 사람들이 세배를 하러 찾아왔다. “손님들과 비서들이 남편을 너무 오랫동안 못 봤다고 세배를 하고 싶다면서 병원으로 갔어요. 나도 남편 점심을 준비해 뒤따라갔지요.” 100여명이 서울대병원 201호실이 있는 복도 앞에 모였다. 서울구치소 부소장이 나와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비서 김옥두가 201호실 가까운 데서 세배라도 하게 해달라고 부소장에게 부탁했다. 부소장은 “법무부 교정국장한테 연락해서 곧 알려주겠다”고 하더니 한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동대문경찰서 서장과 정보과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서장과 형사들은 별일 없다는 교도관의 설명을 듣고서야 돌아갔다. 뒤늦게 부소장이 나타났다. 김옥두는 부소장에게 “왜 기다리라고 해놓고는 경찰을 들여보냈느냐”고 항의했다. 며칠 뒤 경찰이 김옥두를 부르더니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했다.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한화갑도 함께 구속했다. 세배하러 간 것이 죄가 돼 김옥두는 1년의 실형을 살고 한화갑도 8개월이나 투옥됐다. “우리 집에는 김형국 비서만 남게 됐는데, 결국 김형국 비서도 그해 6월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돼 성동구치소에 수감됐어요. 나는 비서들이 갇힌 영등포구치소와 성동구치소를 찾아다니며 면회하고 영치금을 넣었어요. 그 무렵에 ‘상도동(김영삼) 비서들은 국회로 가고 동교동(김대중) 비서들은 형무소로 간다’는 말이 생겨났지요.”
이희호는 그때 몸이 열이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쁘게 뛰었다. 오전에 점심을 준비해 낮 12시에 병원에 들러 두 시간쯤 있다 집으로 갔다. 오후에 석간신문을 보고 메모해 두었다가 다시 저녁을 준비해서 다섯 시쯤 병원으로 가져갔다. 일곱 시에 병원에서 나오면 바로 구속자 가족 모임에 들렀다. “모임에 안 나가면 구속자 가족들이 소홀히 대한다고 할까봐 빠지지 않고 나갔지요. 목요기도회, 금요기도회, 성당기도회에 부지런히 다녔어요. 예배를 보고 대책을 논의하다 보면 밤이 늦어 식사를 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어요.”
1977년 12월25일 정부는 김대중만 빼고 ‘3·1 사건’ 관련 구속자들을 모두 석방했다. 이희호는 일주일 뒤인 78년 1월1일 안병무·박영숙 부부가 마련한 석방 축하 만찬에 가서야, 남편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시킨 박정희 정권의 속임수를 알았다. 사진은 앞서 76년 12월29일 2심에서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이해동 목사(왼쪽)에게 이희호가 축하의 악수를 건네는 모습. 사진 이해동 목사 제공
결국 이희호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남편이 진주교도소에 있을 때는 겨울에도 안방에 불을 넣지 않았어요. 남편은 여름에도 좀 쌀쌀하면 내복을 입어야 할 정도로 추위를 타는 체질이거든요. 영하로 내려가는 감방에서 떨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집에서 따뜻하게 지낼 수가 없었어요.” 1977년 12월 초 이희호는 냉방에 꿇어 엎드려 기도를 하다 정신을 잃었다. 식구들이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는 이희호를 발견하고 급히 간호사를 불렀다. 그 뒤로 몸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김대중이 서울대병원에 갇힌 뒤엔 쉴 틈이 더 없었다. 1978년 1월 중순부터 무릎과 발이 붓고 손가락이 구부러지고 손목에 통증이 일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니 관절염이었다. 영양실조와 과로가 원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쉴 수가 있어야지요. 아픈 채로 병원을 다니고 구속자 모임에 나갔지요. 약을 지어 먹고 몇 달이 지나서야 부기가 빠졌어요.” 그 후로도 이희호는 꿇고 앉는 데 불편을 느꼈다. 관절염은 지병이 됐고, 고비마다 병이 도졌다.
이희호는 하루 두 차례 김대중을 면회했지만 매번 교도관이 옆에 붙어 말을 기록하는 통에 바깥의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비밀 쪽지 대화였다. 이희호가 집에서 메모해 간 종이를 병실 안 화장실의 두루마리 휴지 구멍 속에 끼워 두면 나중에 김대중이 메모를 확인했다. 바깥소식이나 신문 보도 요약이었다. 어느 날 이희호는 못을 구해 면회 중에 남편에게 몰래 전했다. 김대중은 못으로 껌 종이나 포장지에 글씨를 꾹꾹 눌러쓴 뒤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 안에 넣었다. 자국만 있는 글씨라 바로 읽을 수 없었다.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쪽지를 주머니 속이나 양말 속에 숨겨서 가지고 나왔어요. 집으로 와서 흰 글씨 쪽지를 옮겨 적었는데 잘 보이지 않아 시간이 무척 걸렸어요. 그래서 홍업이가 그 일을 맡아서 했지요. 남편이 그때 못으로 쓴 쪽지 39장이 지금도 남아 있어요.”
나중에 이희호는 볼펜심을 남편에게 전달하는 데도 성공했다. 김대중은 쪽지 메모를 통해 바깥의 민주인사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김대중이 못으로 쓴 쪽지 메모 중 하나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민주회복은 국민의 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며 비폭력 적극 투쟁의 방식을 취해야 한다. (…) 간디나 킹 목사가 한 바와 같이 비폭력으로, 그러나 끈질기게 계속 투쟁해야 한다. 전 국민의 0.1%인 3만5000명만 자진 투옥되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구속은 그것을 두려워할 때 권력자의 무기이지 두려워하지 않는 민중에게는 아무 효과가 없다.”(1978년 9월23일 쪽지) 김대중은 “역리와 부패로 민심을 잃은 정권”이 오래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1978년 6월20일 이희호는 필리핀 상원의원 베니그노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프랑스 신부를 통해 보내온, 위로와 격려를 담은 편지였다. 당시 필리핀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정권 아래 있었고, 베니그노 아키노는 마르코스 독재에 맞서 싸우다 감옥에 갇혀 있었다. “코라손 아키노 여사와는 알지 못하는 사이였는데, 그런 편지를 보내왔어요. 아마 그쪽에서 언론보도를 보고 우리 사정을 알고 있었던가 봐요.” 이희호는 감사의 마음을 담은 답장을 써 프랑스 신부 편에 보냈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뒷날 미국 망명 시절에 역시 망명 중이던 아키노 부부와 상봉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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