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사람과 사물을 중시하는 조선의 철학/ 이경구의 호락논쟁 이야기/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12. 25. 09:58

문화

아내는 낙론, 남편은 호론 “부부가 대단한 기세로 싸웠다”

등록 :2015-12-24 21:05

 

김홍도가 만년에 그린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개인소장). 19세기 다양한 양상으로 존재했던 선비들처럼 여러 각도에서 감상이 가능하다. 주변에 널린 파초·산호·도자기·보검 등에서는 골동 취미를, 맨발로 비파를 타는 모습에서는 구속을 벗어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왼편 상단의 글은 ‘紙窓土壁 終身布衣 嘯其中’(지창토벽 종신포의 소영기중)으로 ‘종이창 낸 흙벽에서 여생을 벼슬하지 않고 시나 읊으며 살리라’는 뜻이다. 정조가 죽고 난 후 영락하고 1806년경에 사망한 김홍도 말년의 쓸쓸함도 느껴진다.
김홍도가 만년에 그린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개인소장). 19세기 다양한 양상으로 존재했던 선비들처럼 여러 각도에서 감상이 가능하다. 주변에 널린 파초·산호·도자기·보검 등에서는 골동 취미를, 맨발로 비파를 타는 모습에서는 구속을 벗어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왼편 상단의 글은 ‘紙窓土壁 終身布衣 嘯其中’(지창토벽 종신포의 소영기중)으로 ‘종이창 낸 흙벽에서 여생을 벼슬하지 않고 시나 읊으며 살리라’는 뜻이다. 정조가 죽고 난 후 영락하고 1806년경에 사망한 김홍도 말년의 쓸쓸함도 느껴진다.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19) 세 가지 유산
학자들의 주장에서 학파 사이의 논쟁으로, 정파와 결합하고 역적으로 단죄되기까지. 첫 장면에서 거의 100여년이 지나자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호락논쟁은 거의 끝났다. 남은 장면들은 무엇이 있을까. 학파는 크게 축소되었지만 개인들은 여전히 논쟁과 관련한 저술을 계속하였다. 그 저술들까지 감안하면 논쟁은 20세기 초까지 지속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회적인 생명은 거의 다했다. 생명이 소진된 곳에서는 껍데기뿐인 명예에 매달리는 씁쓸한 풍경도 있었다. 그 한편에서 유학의 틀을 넘어서는 사유가 자라고 있었다. 호락논쟁은 그렇게 지속되거나 왜곡되었으며, 새로운 싹을 움트게 하는 토양이 되었다.

개인 논설의 성행과 한계

19세기에도 유학은 여전히 왕성했다. 식지 않는 학문의 열기를 김정희는 이렇게 소개했다. “근일 이래 유명한 유학자들이 무리를 지어 나왔다. 고학(古學)이 성행하니 오래전에 끊어졌던 실마리를 다시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집마다 자기 학설을 펴고 사람마다 자기 의견을 낸다. 제각기 문호(門戶)를 내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일이 요즘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사람마다 의견을 내고 논쟁을 벌이는 모습. 유학의 여러 주제가 여전히 사람들의 담론을 지배하는 모습이기도 했고, 유학 교육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무명의 학자가 길러지고 군소의 학파들이 명멸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호락논쟁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학파가 서로 대립하는 일은 거의 끝났지만 미발심체론(未發心體論),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등에 대한 저술은 오히려 늘어났다.

저변화를 주도한 것은 무명 학자들이었다. 김정희의 제자였던 조희룡은 무명의 학자들이 얼마나 유학에 정진했는지를 증언한다. “김완이란 자가 있는데 성명(性命)의 학문에 정통하고 애써 다시 부흥시키고자 했다. 그의 학문은 양명학이었는데 자기의 견해를 더해 크게 일가를 이루었다. 수천에 이르는 논설을 지었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일가를 이루었고 지은 글도 많았지만 전하지 않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그나마 조희룡의 증언을 빌려 이름이나마 남은 것이 다행이랄까. 이름도 전하지 못한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19세기 호락논쟁은 무명 학자만의 전유물도 아니었다. 정약용, 홍석주, 김매순 등의 대가들도 적잖은 품평을 했고 기정진, 이철영, 전우 등은 호락논쟁의 주제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견해를 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이전과는 크게 달라진 무엇인가가 있었다. 다시 김정희의 편지를 빌려 그 요소를 확인해보자.

“심(心), 성(性)에 대한 대목은 일찍이 호론과 낙론에서 서로 시비를 따졌던 글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누가 썼던 글인지 기억나지도 않고, 또 당시에는 나도 모르게 밥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웃었지요. 그대는 어찌 그 뱉어낸 찌꺼기를 다시 담으려 하는지요. 이 대목은 아예 손대지 않는 게 어떨는지요. 막히고 걸리는 데가 많으니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될 거외다.”

김정희는 서양 사정 등에 비교적 밝았고 세상 변해가는 이치를 꿴 후에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제창하였다. 그런 그에게 호락논쟁은 이미 시의성을 잃어버린 죽은 담론이었다.

19세기 황혼 맞은 호락논쟁
정치·사회적 생명력 잃었으나
저술과 논쟁 기록은 늘어
학파 없이 저마다 시시비비
바야흐로
유학의 실용성 묻는 실학 대두

위군자(僞君子)의 가도학(假道學)

호락논쟁이 사회성을 잃었지만 그 찌꺼기라도 우려먹는 행태는 호락논쟁 역사에서 가장 기막힌 장면이었다. 19세기 서울의 문인으로 <지수염필>이란 섬세한 수필을 남긴 홍한주는 이런 사실도 알려주었다.

“근자에 윤광현이란 사람이 있다. 집안은 한미한데 스스로 유학에 통달했다며 호학(湖學)을 주장하니 따르는 사람이 자못 많았다. 아내 또한 학식이 있어 글도 잘하고 예학(禮學)에도 밝았다. 학문은 남편보다 나았는데 낙학(洛學)을 주장했다. 부부가 견해가 달라 한번 논쟁이 붙으면 대단한 기세로 서로 싸우곤 했다.”

당시에 여자가 예학과 성리학에 조예를 가지는 경우는 드물었을 터이니, 학자 부부의 탄생은 정말로 이채롭다. 그런데 부부가 각기 호론과 낙론을 지지하고, 대단한 기세로 논쟁을 벌이기까지 했다니. 이 글로 미루어보건대 아마 논쟁이 붙으면 학문이 더 뛰어난 부인이 우위를 차지했을 듯하다. 한국 철학사에서 이보다 더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이 있을까. 무명의 여성 학자까지 등장한 것을 보면 호락논쟁에 참여한 무명 선비들의 열정은 이만저만이 아닌 듯하다. 포복절도할 목격담은 계속 이어진다.

‘참판 유진오가 젊은 시절에 용산의 읍청루에서 참외를 먹으며 놀고 있었다. 홀연 해진 삿갓에 긴 도포를 입은 사람이 정자에 올랐는데 대여섯 제자가 뒤를 따랐다. 그 사람이 강을 바라보다 “강이 넓고도 넓도다” 하니, 제자들이 손을 모아 “과연 그렇습니다” 하고는, 바랑에서 필묵을 꺼내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강이 넓고도 넓다”라고 말씀하시다’라고 썼다. 제자들이 스승 말을 그대로 따라 적는 게 매양 이러했다. 유진오가 희롱삼아 참외를 건네며 “강이 넓은들 뭐 대수겠소. 이 참외 맛있게 먹는 것만도 못하지요” 하였다. 그 사람은 이마를 찌푸리고 “있을 곳이 못 되는구먼” 하고 자리를 뜨니, 제자들도 황급히 줄줄이 따랐다. 뒤에 들으니 그 스승이란 자가 바로 윤광현이었다.’

윤광현과 제자들의 행태는, 영화 <넘버3>에서 보스 송강호의 엉터리 말을 그의 똘마니들이 금과옥조처럼 받아적던 요절복통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가히 그 스승에 그 제자들이다. 홍한주는 이들을 두고 가짜 군자인 ‘위군자’(僞君子)요, 학문을 팔아먹는 ‘가도학’(假道學)이라 평했다.

홍한주는 세태를 풍자하기 위해 웃음거리로 치부할 수 있는 사건을 전했다. 하지만 나는 또다른 감회가 느껴지기도 한다. 껍데기만 남아버린 호락논쟁이란 거인, 생명력을 상실한 그에게 달려드는 것들이란 해체를 책임진 파리떼일 뿐이다. 그렇다면 위의 인용은 논쟁의 황혼을 보여주는 쓸쓸한 모습이기도 하다.

새로 움트는 싹들

19세기의 가장 큰 변화는 뭐니뭐니해도 대외 환경이었다. 서양의 압박이 날로 세졌고 유교 문명권의 붕괴가 가시화하였다. 유학 내에서 반성의 목소리 또한 비례하여 커졌고, 변화와 절충을 꾀하는 이들이 나왔다.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주장한 신기선은 무익한 논설에 매달려선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성인은 성명(性命)을 드물게 언급했는데 지금 유학자는 입만 열면 이기(理氣)를 논한다. 그렇지만 흉내내기에 급급한 공허한 말일 뿐이고 실견(實見)이 아니다. 고매한 말로 분별하고 힐난하며 이기려고 다투는 일을 능사로 여긴다면, 설령 맞는 대목이 있다 해도 실학에는 도움이 안 된다.”

이제 호락논쟁의 주제 정도가 아니라 유학 자체가 유용한지 아닌지로 전선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서학을 절충하거나 실학을 강조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그 사고가 진전되어 20세기 초가 되면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실학’ 개념으로 정리되었다. 이것은 유학 내부에서 자란 새로운 싹이었다.

한편에선 유학의 토양을 양분 삼아 새로운 사고가 자라나고 있었다. 예컨대 최한기는 서양의 학문까지 포섭하는 새로운 학문을 구상하였고, 서학을 받아들여 내면화한 천주교가 있었으며, 유학·서학·민중종교 등을 뿌리 삼아 태어난 동학도 있었다.

그런데 이 같은 새싹들 역시 어느 정도는 유학에서 유산을 물려받았다. 예를 들어 동학 혁명군이 일어날 당시에 내건 ‘행동 원칙 4가지’ 가운데 첫째 조항은 ‘사람과 사물을 죽이거나 상하게 하지 않는다’(不殺人, 不殺物)였다. 이 조항은 동학의 지도자였던 최시형이 ‘만물이 하늘, 일마다 하늘’(物物天, 事事天)이라고 말한 데서 비롯했을 터이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
사람, 사물, 하늘을 동등하게 여기는 동학의 인식은, 낙론의 인물성동(人物性同)에서 출발해 인물균(人物均)으로 나아간 홍대용의 사유와 그다지 멀지 않아 보인다. 물론 둘 사이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데에 무리는 있다. 그러나 사람과 사물을 중시하는 사고를 내면화시켜온 조선 철학의 토양이 없었다면 이처럼 자연스럽게 터져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인문한국(HK)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