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벌대 대위와 빨치산 여인의 사랑 … 세상은 끝내 그들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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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형과 국군 동생이 게릴라와 그를 쫓는 토벌대로 전장에서 마주쳤다가 형이 동생에게 잡힌 경우도 있었고, ‘백 야전전투사령부’ 참모장이었던 김점곤 대령은 자신의 부친과 형을 살해한 빨치산을 포로수용소에서 만나 속으로만 울분을 삭이기도 했다. 수도사단의 한 대대장은 작전 중에 죽마고우였던 빨치산 친구를 잡았다가 풀어줘 혼이 나기도 했다.
내가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사령관으로 1951년 12월부터 지리산과 그 주변의 빨치산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던 이야기 중에는 가슴을 저미는 내용이 많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토벌대 대위와 빨치산 여자 대원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다. 나중에 꽤 알려진 내용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소개하기로 한다.
1951년 1월 부산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한 북한군 여군 포로.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여성은 남과 북을 불문하고 의무대와 일반 행정 병과 등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빨치산 부대에도 여성이 적지 않았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 |
김 대위는 그 여자 대원을 보는 순간 ‘운명’을 예감했다고 한다. 쓰러져 있는 그 여인을 보고 첫눈에 반했던 것이다. 김 대위는 당시 24세, 빨치산 여대원은 오양수라는 이름으로 당시 20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오양수는 명문 전북고녀 출신으로 체포될 당시 전북 여맹 부위원장이라는 고위직에 있었으나, 자진 입산해 빨치산 활동에 종사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면장이었던 그녀의 가족은 전쟁이 나고 북한군 치하의 인공(人共)이 들어서자 ‘반동’으로 몰렸으나 전북 여맹에 있던 그녀의 친구들이 “가족을 살리려면 여맹에 가입하라”고 권유해 이를 따랐다는 것이다. 긴 산속 생활로 초췌했지만 그녀는 타고난 미인이었다고 한다. 동상으로 몸이 부어오르고 배고픔과 추위로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지만 김 대위는 어쨌든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버렸다. 그는 오 여인을 중대장 막사에 옮겨 놓은 뒤 극진한 간호로 그녀의 기력을 되찾아 줬다.
부대 전체에서 시빗거리로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열심히 오 여인을 간호했다고 한다. 오히려 부하들 앞에서 “지금부터 이 여자는 내 아내이니 신경 쓰지 마라”고 공언할 정도였고, 그런 그의 열성을 지켜보면서 부대원들도 점차 이해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오 여인도 극진한 김 대위의 간호를 받고 기력을 회복한 뒤에는 그에게서 점차 따뜻한 인간미를 확인하고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싸움이 벌어지는 진중(陣中)에서 그렇게 1주일여를 보낸 뒤 두 사람은 완연한 한 쌍의 연인으로 변했다. 오 여인이 기력을 회복한 뒤 김 대위는 ‘군인 가족증’을 만들어 자신의 본가로 그녀를 보냈다. 그러나 그것은 운명적인 조우(遭遇) 뒤 두 사람을 갈라놓는 영원한 이별의 순간이었다.
김 대위는 그녀를 보낸 뒤 정신없이 제3기 작전에 몰두했다. 피곤하고 쉽게 지치는 작전이었지만 김 대위는 새 아내를 생각하면서 행복에 젖었을 것이다. 그러나 3기 작전을 마치고 산을 내려온 그는 바로 방첩대에 체포됐다. 빨치산 대원을 은닉해 빼돌렸다는 혐의였다.
김 대위의 본가에서 “참한 며느리가 생겼다”는 칭찬을 들으면서 잠시 시부모를 모시던 오 여인도 체포됐다. 김 대위와 오 여인 모두 방첩대의 의심을 사고 만 것이다. 둘은 그렇게 붙잡혀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방첩대는 김 대위가 평소 용감하게 작전을 펼치다가도 전투력을 잃은 빨치산을 보면 이상하리만큼 관대하게 대했다는 점도 문제를 삼았다. 그는 남원 감방에 갇혀 있다가 백 야전사 작전이 끝나고 수도사단이 전방으로 이동한 다음 사단장의 특사 조치로 원대에 복귀했다.
오 여인은 심문 과정에서 침묵으로 일관했다. 모든 물음에 침묵으로 대응하다가도 “그분은 무사하냐”면서 김 대위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 여인은 심문이 잠시 멈춰져 감시병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벽에 세워져 있던 카빈 소총을 낚아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 대위는 “나중에 내가 전해 들은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그녀는 결국 조금이라도 내게 누가 될까 봐 목숨을 끊었던 것”이라고 회상했다. 김 대위는 그 후 군대에 계속 남아 있으면서도 논산훈련소 등에 자원해 근무하는 등 전주 일대에서 오 여인의 유해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결국 73년 군 생활을 마감하고 육군 중령으로 예편해 대전에서 만년을 보냈다.
많은 전공을 세웠음에도 김 대위의 군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오 여인과의 관계가 걸림돌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만년까지 김 대위는 오양수라는 여인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눈밭에서 미군 파카를 뒤집어쓰고 혼절한 채 발견된 오 여인의 모습을 끝내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작전이 끝나고, 전쟁도 끝난 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었다. 전장에서 서로 총구를 겨누는 아군과 적군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사람의 이야기는 피어난다. 그 둘의 애틋한 사랑을 끊어놓은 것은 무엇인가. 한번 벌어지면 결코 줄일 수 없는 이념의 거리에서 비롯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곳에 숨어 있는 피아(彼我)의 가름,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번져가는 증오와 원망들이 산속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두 젊은이의 사랑을 묻어버렸을 것이다. 전쟁은 그렇게 무수한 아픔을 딛고 치러진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유광종 기자 [kjy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