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멸망, 찌질해서가 아니라 자만해서였다
오마이뉴스 | 입력 2010.09.30 14:31 | 누가 봤을까? 40대 남성, 전라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역사 영화 중에 < 황산벌 > 만큼 인상적인 작품도 드물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2003년 코믹 영화 < 황산벌 > 은 정작 핵심 내용인 황산벌 전투보다도 배우 이문식의 걸쭉한 '욕지거리'와 이리도 해석되고 저리도 해석되는 백제 방언 '거시기' 때문에 더욱더 인상적인 영화였다.
신라 방언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신경을 자극하는 신라 특공대의 기를 꺾어놓으라고 투입된 보성 벌교 특공대원 '거시기'(이문식 분). 그의 이름이 거시기라는 사실은, 영화 막판에 그가 황산벌에서 빠져나와 어머니(전원주 분)와 감격적 재회를 하는 순간에야 밝혀졌다.
백제 병졸 '거시기'가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한참 늘어놓은 뒤에 "우리는 한 끼를 먹어도 반찬이 40가지가 넘어"라며 "씨벌놈들!" 한마디로 화룡정점을 찍자, 그 욕설들의 무자비함에 놀란 신라 특공대원들이 기절해서 들것에 실려 가는 장면. 영화의 본령인 황산벌 전투보다 이런 장면을 기억하는 관객이 더 많을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코믹했지만 그렇다고 코미디 영화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것은, 이 영화가 < 삼국사기 > 같은 사료들에 비교적 충실했기 때문이다. 의자왕 20년(660) 6월에 인천 앞바다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 당도한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김유신(정진영 분)에게 "양방향으로 백제를 공격해서 7월 10일(음력) 사비성 앞에서 봅시다"라며 속전속결 지침을 내린 때로부터 계백 장군(박중훈 분)이 의자왕(오지명 분)의 특명을 받고 황산벌에 진을 치기까지의 내용은 사료에 비교적 충실했다.
백제의 멸망은 '사전에 예약된 불가피한 운명' 일까?
그런데 이 영화를 포함해서, 백제 최후의 날을 다룬 문학책이나 영상물 등을 볼 때마다 매번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그것은 거의 모든 작품이 한결같이, 백제의 멸망을 '사전에 예약된 불가피한 운명'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미지를 조장한 주범 가운데 하나로 < 삼국사기 > 를 꼽을 수 있다. 백제 최후의 순간이 담긴 < 삼국사기 > '의자왕 본기'('본기'는 제왕의 연대기)를 읽노라면, 백제의 멸망이 너무나 당연했던 것 같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의자왕이 이미 오래 전부터 술과 여자와 유흥의 늪에 푹 빠져 있었다거나, 백제 멸망 직전에 백제 왕궁에 여우가 난입했다거나 여자의 시체가 백제의 나루터에 떠올랐다거나 사비성의 우물 색깔이 핏빛 같았다거나 하는 등의 기록들을 읽다 보면, 누구라도 '백제의 멸망은 하늘에 의해 이미 정해진 것이었구나' 하는 느낌을 은연중에 갖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삼천궁녀의 신화가 실상은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라는 사실(제2편에서 취급), '술과 여자에 탐닉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 삼국사기 > 편찬자들이 백제 멸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선데이 서울'에나 나올 법한 갖가지 사건사고들을 백제 멸망의 징조로 끌어다 붙였다는 사실 등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런 선입견을 배제하고 < 삼국사기 > '의자왕 본기'를 포함하여 관련 자료들을 다시 읽어보면,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백제군이 객관적 전력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패색이 짙어진 뒤에 의자왕이 자국의 패인을 객관적 전력이 아닌 '작전 미스'에서 찾은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의자왕이 이런 판단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당나라 군대(이하 '당군')가 덕적도에 도착한 때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당군이 서해에 진을 치고 있고 신라군 역시 출동한 상태에서, 백제 조정에서는 비상 전략회의가 열렸다. 회의에 참석한 대신들은 크게 두 부류의 의견으로 갈렸다.
1급 공무원인 좌평 의직(義直)은 "당나라가 우리에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면, 신라는 감히 나서지 못할 것"이라며 "당나라를 먼저 치자"고 제안한 데에 반해, 2급 공무원인 달솔 상영(常永)은 "당나라와는 대치국면을 유지하고, 약한 신라군을 먼저 격파하자"며 "그런 뒤에 당나라를 치자"고 제안했다. 신라는 자신들의 적수가 안 된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어느 쪽을 먼저 치는 게 좋으냐를 놓고 의견이 갈렸던 것이다.
어느 쪽을 채택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의자왕의 머릿속을 스친 인물이 있었다. 유배 중인 좌평 흥수(興首)였다. 흥수라면 묘안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의자왕은 사람을 보내 그의 의견을 물어보도록 했다.
흥수의 의견은, 평야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승패를 예측할 수 없으니, 기벌포(금강 입구)에서 당군을 묶어두고 탄현에서 신라군을 묶어둔 상태에서 장기적인 대치국면을 유지한 뒤에 적의 군량미가 떨어지면 그때 가서 총공격을 가하라는 것이었다.
기벌포와 탄현은 천혜의 요새라서 적군이 아무리 많다 해도 소수의 병력과 소량의 무기만으로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기벌포와 탄현에서부터 적을 묶어두면 장기전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흥수의 생각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원정군이 군량미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이다. 참고로, 신채호의 < 조선상고사 > 에 따르면, 기벌포에는 몇 리나 뻗은 개펄이 있어서 침략군이 상륙을 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냥 통과하기도, 그렇다고 상륙하기도 힘든 곳이 기벌포였던 것이다.
흥수의 의견은 실은 같은 당파인 성충(成忠)의 유서에 기초한 것이었다. 전 좌평 성충은 흥수 등과 함께 실각한 뒤에 감옥에 갇혔다가 위와 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하직한 바 있다. 위에 나온 의직과 상영은 성충·흥수와 대립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흥수의 의견은 채택되지 않았다. 조정 대신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임금과 나라를 원망하고 있을 죄인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 조선상고사 > 에서, 조정 대신들이 흥수의 의견에 반대한 것은 그 틈에 성충 라인이 복귀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백제 조정의 전략은, 기벌포와 탄현을 열어주고 적이 좁은 길을 통과할 때에 공격을 퍼부어 속전속결로 끝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당나라 전함들이 기벌포를 통과해 금강에 진입하여 일렬로 전진할 때에 군사를 풀어 공격하고, 신라 병사들이 탄현에 올라 좁은 길을 일렬로 통과할 때에 역시 군사를 풀어 공격하자는 전략이었다. 이는 적군을 독 안으로 끌어들인 뒤에 한 번에 죽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백제 지도부의 전술전략은 현장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기벌포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그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 당나라의 역사서인 < 구당서 > 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당나라의 역사서를 그냥 < 당서 > 라 하지 않고 < 구당서 > 라 하는 것은 이와 대비되는 < 신당서 > 가 있기 때문이다. 앞에 나온 책을 놔두고 굳이 < 신당서 > 를 새로 만든 것은, 945년에 편찬된 < 구당서 > 의 내용이 불충분하다며 송나라(북송) 인종 황제가 구양수 등에게 새로 편찬할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 구당서 > '소정방 열전'('열전'은 전기)에 다음 대목이 있다.
"소정방이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금강 입구에 당도했더니, 적군이 강을 따라 진을 치고 방어하고 있었다. 소정방이 동쪽 기슭에 올라 산세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적과 더불어 크게 전투를 벌이는 한편, (나머지 부대는) 돛을 올리고 계속해서 (해안 기슭에) 도달했다. 적군은 크게 패했다. 사망자가 수천 명이었으며, 나머지는 도주했다."
이에 따르면, 당군은 금강 입구의 기벌포를 통과하는 데에 별 문제가 없었다. 소정방 자신은 일부 병력을 이끌고 동쪽 기슭에 상륙하는 데에 성공했다. 당군 일부가 기벌포를 통과할 때에도, 또 다른 당군 일부가 상륙할 때에도 백제군은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백제군은 당군이 강에 진입하면 강의 연안에서 공격을 퍼부을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 조선상고사 > 에서 이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군 일부가 풀과 나무를 밟고서 기벌포의 개펄을 지나서 육지에 겨우겨우 접근하는 동안, 백제군은 그냥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기벌포에 상륙하기도 힘들었을 당군으로서는 백제군의 전략 덕분에 한 가지 부담을 던 상태에서 전투를 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불행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금강 지구에 주둔한 백제군이 지도부의 전략을 제대로 따라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 조선상고사 > 에 따르면, 개펄을 통과한 당군은 뒤로 돌아 개펄로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으로 연안의 백제 병력을 향해 결사적으로 진격했다고 한다.
강의 연안을 지키던 백제군은 그 기세에 눌려 패배를 당했다. 극단적 상황에서 극도로 고조된 당군의 정신력이 판세를 바꾸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 것이다. 이렇게 연안의 백제 병력이 와해됨에 따라 당나라 전함들은 금강을 따라 무사히 올라갈 수 있었다. < 구당서 > 에서는 이때 밀물까지 밀어닥쳐 당나라 전함들이 이를 활용해 사비성 쪽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원래의 의도와 달리 기벌포와 탄현에서 적을 놓친 백제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계백 장군을 투입했다. "당나라와 신라의 병사들이 백강·탄현을 벌써 통과했다는 말을 듣고, 계백을 보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벌로 나가 신라군과 싸우게 했다"고 '의자왕 본기'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5천만 보냈을까? 신라군은 5만인데 말이다.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5만의 신라군을 치러 갔다는 이유 때문에 < 삼국사기 > 에서는 계백의 군대를 결사대라고 불렀다. 결사대란 말은 '패배의 가능성이 농후한 상태에서 죽을 각오로 덤벼드는 자들의 무리'란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결사대'라는 표현은 백제의 멸망이 예견된 것처럼 보이도록 하려는 악의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백제군 주력이 훼손되지 않은 상태에서 백제 측이 5천의 군사만 내보냈다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5천의 군사로 5만의 적에 맞섰다는 것은 그 5만 전체가 정예 병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는 황산벌에서 벌어진 최초 4회의 전투에서 백제가 연전연승을 거둔 데에서 잘 드러난다. 신채호는 이 4회의 전투에서 1만 명의 신라군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이는 신라군의 상당부분이 정예 요원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화랑 반굴(盤屈)과 관창(官昌)의 피를 목격한 뒤에야 나머지 4만 명이 목숨을 걸고 백제군에게 달려들었다는 것은, 그렇게 발악을 하며 달려들지 않고는 자신들을 지킬 수 없을 만큼 신라군의 상당부분이 '미숙련공들'로 채워져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라군 안에는 보급 기타의 임무를 수행하는 비전투 병력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백제군이 5천 명만 파견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보는 게 이치적이다. 두 화랑의 죽음을 계기로 신라군의 정신력이 극대화되는 우연적 요소의 발생이 백제군 패배의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정신력으로 금강 입구를 통과한 당군의 경우처럼, 신라군도 정신력으로 황산벌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백제군이 그만큼 느슨했음을 의미하는 것인 동시에, 그렇게 느슨히 해도 될 만큼 백제군의 전력이 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자만심이 백제의 패배를 초래한 요인 중 하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기벌포와 탄현에서 적을 잡지 못한 데에 이어 황산벌에서까지 무너지자, 전세는 급격히 백제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기충천해진 당군이 금강을 따라 사비성에 다가가며 연전연승을 거둔 것이다. 사비성 30리 앞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당군이 백제군 주력을 깨뜨리는 데에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는 백제군이 1만여 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런 승세를 타고 당군이 성에 육박"('의자왕 본기')하자, 의자왕은 전세를 뒤집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물론 이후로도 사비성과 웅진성 등에서 백제군의 저항이 계속됐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자왕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서... "
중요한 것은, 이 시점에서 의자왕이 어떤 판단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 글의 주제는 전쟁 개시 당시에 백제군의 심리상태가 어떠했는가 하는 점이다. 군의 주력이 손상되고 사비성이 포위된 상태에서 의자왕이 내린 판단을 보면, 백제측이 개전 당시에 어떤 심리상태를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의자왕 본기'에 따르면, 의자왕은 이렇게 말한 뒤에 사비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은 성충 라인인 흥수의 의견을 채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기벌포와 탄현에서 적을 묶어두지 않고 적을 안으로 불러들인 작전을 후회하는 것이다.
이는 개전 당시만 해도 의자왕이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적을 안으로 불러들여 속전속결을 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열세를 인정하고 전쟁에 돌입했다면, 과연 이런 코멘트가 나올 수 있었을까?
또 이는 당나라와 신라도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는 상태에서 전쟁에 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당연합군의 승리가 확실한 상태에서 백제 군인들이 '죽을 것이 뻔한 싸움'에 뛰어든 것이 결코 아니었다.
위와 같이 백제의 멸망은 개전 이전에 이미 하늘에 의해 정해져 있었던 게 아니라, 개전 이후에 나타난 인간의 행위들에 의해 판가름 난 것이다. < 맹자 > '공손축' 편에 "천시(天時)가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가 인화(人和)만 못하다"며 인적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한 맹자의 지적처럼, 백제-나당의 전쟁은 개전 이후에 발생한 갖가지 인적 요소들의 복합적 상호작용에 의해 승부가 갈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의 운명이 사전에 정해져 있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황산벌 전투 같은 백제 최후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660년에 벌어진 실제 상황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다. 전세가 기울어지기 전까지는, 나당연합군을 격파할 수 있는 가능성과 역량이 백제에게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패배를 예견하고 죽을 각오로 전쟁터에 나오는, 고개 숙인 백제군의 이미지. 낙관적 전망으로 충만해서 여유로우면서도 방심하는 자세로 나당연합군을 맞이하는, 그런 자신만만한 백제군의 이미지. 무엇에 힘을 실어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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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방언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신경을 자극하는 신라 특공대의 기를 꺾어놓으라고 투입된 보성 벌교 특공대원 '거시기'(이문식 분). 그의 이름이 거시기라는 사실은, 영화 막판에 그가 황산벌에서 빠져나와 어머니(전원주 분)와 감격적 재회를 하는 순간에야 밝혀졌다.
백제 병졸 '거시기'가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한참 늘어놓은 뒤에 "우리는 한 끼를 먹어도 반찬이 40가지가 넘어"라며 "씨벌놈들!" 한마디로 화룡정점을 찍자, 그 욕설들의 무자비함에 놀란 신라 특공대원들이 기절해서 들것에 실려 가는 장면. 영화의 본령인 황산벌 전투보다 이런 장면을 기억하는 관객이 더 많을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코믹했지만 그렇다고 코미디 영화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것은, 이 영화가 < 삼국사기 > 같은 사료들에 비교적 충실했기 때문이다. 의자왕 20년(660) 6월에 인천 앞바다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 당도한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김유신(정진영 분)에게 "양방향으로 백제를 공격해서 7월 10일(음력) 사비성 앞에서 봅시다"라며 속전속결 지침을 내린 때로부터 계백 장군(박중훈 분)이 의자왕(오지명 분)의 특명을 받고 황산벌에 진을 치기까지의 내용은 사료에 비교적 충실했다.
백제의 멸망은 '사전에 예약된 불가피한 운명'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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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미지를 조장한 주범 가운데 하나로 < 삼국사기 > 를 꼽을 수 있다. 백제 최후의 순간이 담긴 < 삼국사기 > '의자왕 본기'('본기'는 제왕의 연대기)를 읽노라면, 백제의 멸망이 너무나 당연했던 것 같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의자왕이 이미 오래 전부터 술과 여자와 유흥의 늪에 푹 빠져 있었다거나, 백제 멸망 직전에 백제 왕궁에 여우가 난입했다거나 여자의 시체가 백제의 나루터에 떠올랐다거나 사비성의 우물 색깔이 핏빛 같았다거나 하는 등의 기록들을 읽다 보면, 누구라도 '백제의 멸망은 하늘에 의해 이미 정해진 것이었구나' 하는 느낌을 은연중에 갖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삼천궁녀의 신화가 실상은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라는 사실(제2편에서 취급), '술과 여자에 탐닉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 삼국사기 > 편찬자들이 백제 멸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선데이 서울'에나 나올 법한 갖가지 사건사고들을 백제 멸망의 징조로 끌어다 붙였다는 사실 등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런 선입견을 배제하고 < 삼국사기 > '의자왕 본기'를 포함하여 관련 자료들을 다시 읽어보면,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백제군이 객관적 전력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패색이 짙어진 뒤에 의자왕이 자국의 패인을 객관적 전력이 아닌 '작전 미스'에서 찾은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의자왕이 이런 판단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당나라 군대(이하 '당군')가 덕적도에 도착한 때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당군이 서해에 진을 치고 있고 신라군 역시 출동한 상태에서, 백제 조정에서는 비상 전략회의가 열렸다. 회의에 참석한 대신들은 크게 두 부류의 의견으로 갈렸다.
1급 공무원인 좌평 의직(義直)은 "당나라가 우리에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면, 신라는 감히 나서지 못할 것"이라며 "당나라를 먼저 치자"고 제안한 데에 반해, 2급 공무원인 달솔 상영(常永)은 "당나라와는 대치국면을 유지하고, 약한 신라군을 먼저 격파하자"며 "그런 뒤에 당나라를 치자"고 제안했다. 신라는 자신들의 적수가 안 된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어느 쪽을 먼저 치는 게 좋으냐를 놓고 의견이 갈렸던 것이다.
어느 쪽을 채택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의자왕의 머릿속을 스친 인물이 있었다. 유배 중인 좌평 흥수(興首)였다. 흥수라면 묘안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의자왕은 사람을 보내 그의 의견을 물어보도록 했다.
흥수의 의견은, 평야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승패를 예측할 수 없으니, 기벌포(금강 입구)에서 당군을 묶어두고 탄현에서 신라군을 묶어둔 상태에서 장기적인 대치국면을 유지한 뒤에 적의 군량미가 떨어지면 그때 가서 총공격을 가하라는 것이었다.
기벌포와 탄현은 천혜의 요새라서 적군이 아무리 많다 해도 소수의 병력과 소량의 무기만으로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기벌포와 탄현에서부터 적을 묶어두면 장기전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흥수의 생각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원정군이 군량미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이다. 참고로, 신채호의 < 조선상고사 > 에 따르면, 기벌포에는 몇 리나 뻗은 개펄이 있어서 침략군이 상륙을 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냥 통과하기도, 그렇다고 상륙하기도 힘든 곳이 기벌포였던 것이다.
흥수의 의견은 실은 같은 당파인 성충(成忠)의 유서에 기초한 것이었다. 전 좌평 성충은 흥수 등과 함께 실각한 뒤에 감옥에 갇혔다가 위와 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하직한 바 있다. 위에 나온 의직과 상영은 성충·흥수와 대립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흥수의 의견은 채택되지 않았다. 조정 대신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임금과 나라를 원망하고 있을 죄인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 조선상고사 > 에서, 조정 대신들이 흥수의 의견에 반대한 것은 그 틈에 성충 라인이 복귀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백제 조정의 전략은, 기벌포와 탄현을 열어주고 적이 좁은 길을 통과할 때에 공격을 퍼부어 속전속결로 끝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당나라 전함들이 기벌포를 통과해 금강에 진입하여 일렬로 전진할 때에 군사를 풀어 공격하고, 신라 병사들이 탄현에 올라 좁은 길을 일렬로 통과할 때에 역시 군사를 풀어 공격하자는 전략이었다. 이는 적군을 독 안으로 끌어들인 뒤에 한 번에 죽이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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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당나라의 역사서를 그냥 < 당서 > 라 하지 않고 < 구당서 > 라 하는 것은 이와 대비되는 < 신당서 > 가 있기 때문이다. 앞에 나온 책을 놔두고 굳이 < 신당서 > 를 새로 만든 것은, 945년에 편찬된 < 구당서 > 의 내용이 불충분하다며 송나라(북송) 인종 황제가 구양수 등에게 새로 편찬할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 구당서 > '소정방 열전'('열전'은 전기)에 다음 대목이 있다.
"소정방이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금강 입구에 당도했더니, 적군이 강을 따라 진을 치고 방어하고 있었다. 소정방이 동쪽 기슭에 올라 산세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적과 더불어 크게 전투를 벌이는 한편, (나머지 부대는) 돛을 올리고 계속해서 (해안 기슭에) 도달했다. 적군은 크게 패했다. 사망자가 수천 명이었으며, 나머지는 도주했다."
이에 따르면, 당군은 금강 입구의 기벌포를 통과하는 데에 별 문제가 없었다. 소정방 자신은 일부 병력을 이끌고 동쪽 기슭에 상륙하는 데에 성공했다. 당군 일부가 기벌포를 통과할 때에도, 또 다른 당군 일부가 상륙할 때에도 백제군은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백제군은 당군이 강에 진입하면 강의 연안에서 공격을 퍼부을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 조선상고사 > 에서 이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군 일부가 풀과 나무를 밟고서 기벌포의 개펄을 지나서 육지에 겨우겨우 접근하는 동안, 백제군은 그냥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기벌포에 상륙하기도 힘들었을 당군으로서는 백제군의 전략 덕분에 한 가지 부담을 던 상태에서 전투를 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불행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금강 지구에 주둔한 백제군이 지도부의 전략을 제대로 따라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 조선상고사 > 에 따르면, 개펄을 통과한 당군은 뒤로 돌아 개펄로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으로 연안의 백제 병력을 향해 결사적으로 진격했다고 한다.
강의 연안을 지키던 백제군은 그 기세에 눌려 패배를 당했다. 극단적 상황에서 극도로 고조된 당군의 정신력이 판세를 바꾸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 것이다. 이렇게 연안의 백제 병력이 와해됨에 따라 당나라 전함들은 금강을 따라 무사히 올라갈 수 있었다. < 구당서 > 에서는 이때 밀물까지 밀어닥쳐 당나라 전함들이 이를 활용해 사비성 쪽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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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5천만 보냈을까? 신라군은 5만인데 말이다.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5만의 신라군을 치러 갔다는 이유 때문에 < 삼국사기 > 에서는 계백의 군대를 결사대라고 불렀다. 결사대란 말은 '패배의 가능성이 농후한 상태에서 죽을 각오로 덤벼드는 자들의 무리'란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결사대'라는 표현은 백제의 멸망이 예견된 것처럼 보이도록 하려는 악의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백제군 주력이 훼손되지 않은 상태에서 백제 측이 5천의 군사만 내보냈다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5천의 군사로 5만의 적에 맞섰다는 것은 그 5만 전체가 정예 병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는 황산벌에서 벌어진 최초 4회의 전투에서 백제가 연전연승을 거둔 데에서 잘 드러난다. 신채호는 이 4회의 전투에서 1만 명의 신라군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이는 신라군의 상당부분이 정예 요원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화랑 반굴(盤屈)과 관창(官昌)의 피를 목격한 뒤에야 나머지 4만 명이 목숨을 걸고 백제군에게 달려들었다는 것은, 그렇게 발악을 하며 달려들지 않고는 자신들을 지킬 수 없을 만큼 신라군의 상당부분이 '미숙련공들'로 채워져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라군 안에는 보급 기타의 임무를 수행하는 비전투 병력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백제군이 5천 명만 파견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보는 게 이치적이다. 두 화랑의 죽음을 계기로 신라군의 정신력이 극대화되는 우연적 요소의 발생이 백제군 패배의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정신력으로 금강 입구를 통과한 당군의 경우처럼, 신라군도 정신력으로 황산벌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백제군이 그만큼 느슨했음을 의미하는 것인 동시에, 그렇게 느슨히 해도 될 만큼 백제군의 전력이 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자만심이 백제의 패배를 초래한 요인 중 하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기벌포와 탄현에서 적을 잡지 못한 데에 이어 황산벌에서까지 무너지자, 전세는 급격히 백제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기충천해진 당군이 금강을 따라 사비성에 다가가며 연전연승을 거둔 것이다. 사비성 30리 앞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당군이 백제군 주력을 깨뜨리는 데에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는 백제군이 1만여 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런 승세를 타고 당군이 성에 육박"('의자왕 본기')하자, 의자왕은 전세를 뒤집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물론 이후로도 사비성과 웅진성 등에서 백제군의 저항이 계속됐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자왕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서... "
중요한 것은, 이 시점에서 의자왕이 어떤 판단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 글의 주제는 전쟁 개시 당시에 백제군의 심리상태가 어떠했는가 하는 점이다. 군의 주력이 손상되고 사비성이 포위된 상태에서 의자왕이 내린 판단을 보면, 백제측이 개전 당시에 어떤 심리상태를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의자왕 본기'에 따르면, 의자왕은 이렇게 말한 뒤에 사비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은 성충 라인인 흥수의 의견을 채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기벌포와 탄현에서 적을 묶어두지 않고 적을 안으로 불러들인 작전을 후회하는 것이다.
이는 개전 당시만 해도 의자왕이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적을 안으로 불러들여 속전속결을 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열세를 인정하고 전쟁에 돌입했다면, 과연 이런 코멘트가 나올 수 있었을까?
또 이는 당나라와 신라도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는 상태에서 전쟁에 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당연합군의 승리가 확실한 상태에서 백제 군인들이 '죽을 것이 뻔한 싸움'에 뛰어든 것이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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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백제의 운명이 사전에 정해져 있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황산벌 전투 같은 백제 최후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660년에 벌어진 실제 상황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다. 전세가 기울어지기 전까지는, 나당연합군을 격파할 수 있는 가능성과 역량이 백제에게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패배를 예견하고 죽을 각오로 전쟁터에 나오는, 고개 숙인 백제군의 이미지. 낙관적 전망으로 충만해서 여유로우면서도 방심하는 자세로 나당연합군을 맞이하는, 그런 자신만만한 백제군의 이미지. 무엇에 힘을 실어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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