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여행
서울 도심 곳곳에 있는 역사가옥박물관과 인근 맛집 나들이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고은의 시 ‘꽃자리’다. 답답할 때 한번씩 되뇌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시구절이다. 하지만 읊고 또 읊어도 그냥 가시방석인 때가 있다. 설과 추석 연휴다. 서른일곱, 여전히 미혼. 이번 설에도 부모님, 친지의 구박 아닌 구박에 가시방석일 것 같다. 같은 이유로 시방 가시방석에서 아파하는 이에게 고한다. ‘텅 빈 서울에서 꽃자리를 찾아라.’
영화관, 조용한 동네 카페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꽃자리다. 설 연휴 동안 독신자들을 위한 꽃자리 몇곳 소개하려 한다. 서울 도심 곳곳에 숨어 있는 역사가옥박물관들이다. 건물 자체가 전시의 주제이자 전시물이 되는 박물관이다. 건물이 지닌 건축적 특성, 건물에 살던 사람, 건물에 깃든 역사가 박물관적 조명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먹을거리가 빠질 수 없다. 박물관 인근에 위치한 맛집 명소도 몇군데 넣었다. 4대문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 부지런히 움직이면 해 지기 전에 모두 둘러볼 수도 있다.
경교장
이제 와 고백하지만 다소 무지(?)하던 시절 경교장을 여관으로 알았다. “이번 내리실 곳은 강북삼성병원, 경교장입니다.” 버스 안내방송이 나올 때면 속으로 ‘얼마나 대단한 여관이길래 안내방송에 나오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공간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역사의 현장이다. 1945년 11월 환국 이래 1949년 6월 서거까지 김구 선생의 거처이자 집무실로 이용된 곳이다. 임시정부 환국 이후 첫 국무회의가 열린 곳이며, 신탁통치 반대운동, 남북협상 추진의 주무대였다. 김구 선생 서거 이후 우여곡절을 겪다 3년여의 복원공사를 거쳐 2013년 역사가옥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한 곳인 2층 집무실의 깨진 창문을 보면 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경교장은 애초에 당시 최고 광산재벌 최창학이 반도호텔 공사비 절반에 이르는 거금을 들여 지은 서양식 대저택이었다.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29. 매주 월요일 휴관.
홍난파 가옥
‘고향의 봄’ 작곡가 홍난파 선생이 살았던, 동화 속에 나올 법한 빨간 벽돌집이 경교장에서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독일 선교사가 지은 서양식 건축물로, 서울 성곽 위의 그림 같은 집이다. 주변의 막개발로 어지러운 풍경들에 둘러싸인 것이 안타깝지만, 가옥만은 잘 관리돼 있다. 홍난파 선생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어 그의 삶과 행적을 따라가볼 수 있다. 규모는 작지만 꼭 가볼 만한 박물관이다. 종로구 송월1길 38. 2월7~9일 휴관.
대성집
오전에 시작해 경교장, 홍난파 가옥 관람을 마쳤다면 슬슬 배꼽시계가 울릴 시간이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채워줄 노포가 있다. 홍난파 가옥에서 나와 아파트 재개발 현장을 풍경 삼아 독립문역 방향으로 조금 걷다 보면 만나는 60년 전통의 대성집이다. 메뉴는 도가니탕.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비교적 저렴하게 도가니탕(사진)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입술이 서로 달라붙을 정도로 진득진득한 진국을 선호한다면 아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부담 없는 맑은 국물이 이 집 도가니탕을 좋아하게 만드는 60년 노포의 비법이다. 종로구 사직로 5. 휴무일 미정.
영천시장 원조떡볶이
아침에 먹은 떡국이 아직 소화중이라면, 영천시장 원조떡볶이로 간단하게 요기하는 것을 추천한다. 도가니탕 먹은 뒤 입가심으로도 나쁘지 않다. 떡볶이는 끼니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입가심이다. 영천시장 초입에서 노부부가 38년째 운영하고 있는 오래된 가게다. 최근 방송 출연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모양이다. 갈 때마다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 집 떡볶이(사진)는 예전 초등학생 시절 학교 앞 문방구 떡볶이 스타일이다. 떡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처음 접하면 다소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낯선 이와 한 테이블에 섞여 앉아 먹는 재래시장의 낭만이 있고, 옛 추억을 어묵과 삶은 계란 삼아 먹을 수 있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서대문구 영천동 57-12. 휴무일 미정.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서촌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박노수 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 우리 화단에서 한국화에 화사한 색감을 더해 현대적 미감을 만들어냈다는 평을 받는 고 박노수 화백의 가옥이다. 현재는 종로구가 1천여점의 기증품을 가지고 미술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가옥 외관은 스위스풍 같기도 하고 일본풍 같기도 하다. 내부는 반질반질한 원목으로 돼 있는데 걸을 때마다 나는 삐걱대는 소리가 듣기 좋다. 현재 ‘청년 박노수를 말하다’라는 주제의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박노수 화백은 생전에 수석과 석물을 모으는 게 취미였다고 한다. 수석은 얼핏 봐도 그 수준이 상당하다.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뒷마당에 있는 동산에 오르는 일이다. 푸른 대나무 숲 사이로 난 돌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정상(?)에 오르면 서촌과 광화문 일대 전망이 보이는데, 일품이다. 종로구 옥인1길 34. 매주 월요일과 설날 당일 휴관.
백인제 가옥
조선 최고 은행가이자 실업가였던 한상률이 북촌의 집 12채를 헐고 그 위에 지은 대저택이다. 서울식 최상류층 한옥의 전형을 보여주는 가옥이다. 가호는 이 집의 소유주였던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백인제 박사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집이 처음 지어졌을 때 당대에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줄지어 방문했다. 록펠러 2세 같은 외국인도 있었다고 한다. 입장료는 무료다. 사랑채, 안채, 별당 모두 당시 모습을 재현해놓아 그 시대 상류층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별당 마루에서는 북촌 풍경이 내다보인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층층이 자리잡고 있는 고풍스런 한옥의 용마루 곡선들이 마치 한 폭의 추상화를 보는 듯하다. 종로구 북촌로7길 16. 매주 월요일 휴관. 안내원 해설 관람 예약 (02)724-0232.
고희동 가옥
대한민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화백이 41년간 살았던 집이다. 그가 1918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직접 설계한 집인데, 한옥이지만 근대가옥 양식이 반영돼 있다. 내부에는 고희동 화백의 작품(동양화)과 더불어 사진 자료, 신문 기사, 도록 등이 전시돼 있다. 아쉽게도 그의 서양화는 한점도 전시돼 있지 않다. 당시 모습을 재현해놓은 아틀리에의 화구들을 통해서만 ‘대한민국 최초의 서양화가’로서 그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고희동 가옥과 함께 창덕궁 서쪽 담벼락을 따라 형성돼 있는 고즈넉한 원서동의 정취를 잠시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종로구 창덕궁5길 38. 2월8~9일 휴관.
아라리오 뮤지엄 ‘브라세리’
마지막 식사는 과거 공간 사옥이었던 아라리오 뮤지엄 내 ‘브라세리’다. 고희동 가옥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다. 고 김수근 선생의 분신과도 같은 공간 사옥은 1970~80년대 건축, 미술, 음악, 무용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한국 현대예술의 구심점 노릇을 담당했던 한국 건축사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2014년부터는 현대 미술작품과 함께 김수근 선생의 건축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장소가 됐다. 브라세리는 부속건물 3층에 있는 아담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시원하게 뚫린 창을 통해 창덕궁을 조망하며 식사할 수 있는데, 전망이 기가 막힌다. 종로구 율곡로 83. 2월7일 휴무, 설날 당일 단축영업.
글 조성운 갤러리스트·문화유산국민신탁 홍보위원,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한겨레>자료사진
경교장 내부
‘홍난파 가옥’ 내부
도가니탕
영천시장의 떡볶이할매
떡볶이
박노수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