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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의 현대사 증언에 빠진 "미국"/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3. 5. 15:59

문화

김종필의 현대사 증언에 빠진 것 ‘미국’

등록 :2016-03-03 20:38수정 :2016-03-03 21:58

 
1962년 1월20일 중앙정보부를 찾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왼쪽이 김종필 부장.
1962년 1월20일 중앙정보부를 찾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왼쪽이 김종필 부장.
쿠데타 당시 주한 미사령관
전작권 보장 여부에만 관심
장면 총리도 수수께끼 행보
 
5·16을 시종일관 ‘혁명’으로
한일협정 ‘무한 긍정’ 자부심
역사 반성적 고찰 없어 ‘한계’
김종필 증언록 1·2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김종필 지음, 중앙일보 김종필증언록팀 엮음
와이즈베리·각 권 2만5000원

지난해 3월부터 연말까지 <중앙일보>에 연재됐던 김종필의 회고담이 ‘증언록’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나왔다. 그 회고들은, 사실상 권부의 ‘제2인자’로서 1961년 이후 대한민국의 행보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의 첫 본격 증언이라는 점에서, 연재 당시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그가 시종일관 ‘혁명’이라고 미화한 ‘5·16 쿠데타’ 그리고 그가 자찬해 마지않는 한국 경제성장·근대화에 대한 평가 등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그것이 만들어낸 변화 자체는 그 폭과 깊이가 엄청났다.

그런 변화들을 만들어낸 내밀한 이야기들은 그 특유의 자신만만한 언변과 어우러져 흥미를 끈다. 구순이 된 그가 작심하고 털어놓은 그의 얘기들은 분명 역사적 무게를 지닐 것이다. 하지만 5·16 핵심인물의 증언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킨다고 보긴 어렵겠다.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 가능성의 폭을 오히려 좁혀버릴 수도 있다.

게다가 핵심 주역들이 이미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유신독재와 동족대립, 성장제일주의, 대미·대일 추수를 긍정하고 예찬하는 2인자의 ‘마지막’ 본격 증언이 쿠데타를 ‘혁명’으로 분칠하는 반동시대의 ‘정전’으로 자리잡지나 않을까 우려스럽다.

4·19혁명 당시 34살 나이에 육군본부 정보참모본부 기획관리과장을 하고 있던 김종필 중령의 사무실엔 많은 영관급 장교들이 모여들어 시국토론을 했다. 그 와중에 당시 부산지구 계엄사령관(군수기지사령관)이던 박정희와 자신의 마음에 “혁명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4·19 뒤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그해 6월9일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때 그는 박정희에게 “다른 방법이 없으면 혁명을 해야지요”라고 했고, 박정희는 “자네, 지금 준비하는 거 본격화하자”고 화답했다.

1961년 7월23일 인천 송도 유원지에서 회동한 쿠데타 주역들과 주한 미군 수뇌부. 왼쪽부터 박정희, 새뮤얼 버거 미국 대사, 가이 멜로이 사령관, 김종필.
1961년 7월23일 인천 송도 유원지에서 회동한 쿠데타 주역들과 주한 미군 수뇌부. 왼쪽부터 박정희, 새뮤얼 버거 미국 대사, 가이 멜로이 사령관, 김종필.

그와 5·16 주역들은 4·19혁명 뒤 집권한 장면 정권의 부패와 무능, 극심한 사회 혼란을 쿠데타 감행 명분으로 제시해왔으나, 이에 따르면 집권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장면 정권이 무능한지 부패했는지를 판단하기엔 너무 이른 시기에 이들은 이미 ‘혁명’을 구체적으로 모의했다.

그리고 가장 큰 의혹 대상이 돼온 당시 장면 총리의 행보와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주한미군 사령관 카터 매그루더 대장을 비롯한 미국의 대응에 대한 의문은 이 책으로 더 커졌다고도 할 수 있다.

쿠데타 당일 “우리는 합법적인 정부를 지지한다. 군사 쿠데타는 무효”라는 성명을 냈던 매그루더는 이틀 뒤인 1961년 5월18일, 미8군 정보장교 몰 대위를 김종필에게 보내 만나자고 했다. 김종필은 그때 이미 “혁명의 성공이 확신으로 예감됐다”고 증언록에 썼다. 그는 19일 오전 8군 사령관실로 찾아간다. 김종필은 그 자리에서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일본과 외교관계를 열려고 한다. 우리가 일본과 손을 잡으면 미국의 태평양 방위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비공개·비공식 회담은 20일, 25일에도 이어졌고, “5·16 이후 새로운 한미 질서에 관한 주요한 합의가 마련됐다. 미군은 5·16혁명을 인정하고 혁명정부에 협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매그루더 등이 그 대가로 요구한 것은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작전지휘권 재확인과 동원한 일부 부대의 복귀였다.

그때 쿠데타군이 동원한 병력은 “1개 사단도 못 되는” 3600명. 당시 쿠데타 진압을 주장했던 이한림 1군 사령관 휘하의 부대만 5개 군단, 20개 전투사단이었다. 김종필 얘기대로 1군의 1개 사단만으로도 진압 가능한 상황이었다. 당시 한국에 주둔 중이던 미군 병력만 5만6000명이었고, 그들은 한국 정부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사실상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전방 미군 부대는 쿠데타군이 서울로 빠져나가는 걸 지원하고 격려까지 했단다.

당시 장면 총리의 수수께끼 행보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반도호텔을 숙소로 삼았던 장 총리는 쿠데타 당일 새벽 박종규·차지철 등의 ‘체포조’가 당도하기 10분 전에 그곳을 떠나 혜화동 카르멜 수도원으로 피신했다. 그러고는 소식을 끊었다가 사흘 뒤인 18일 나타나 내각 사퇴를 선언한다. 그가 쿠데타가 불법이라고 공개적으로 한마디만 했더라도 쿠데타는 쉽게 진압될 수도 있었다. 그때 미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고, 이한림 등 쿠데타 반대 세력은 또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게다가 쿠데타 계획은 사전에 누설돼 군 안팎에서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었고, 김종필이 작성한 당일 행동계획 메모까지 건네받은 장도영 참모총장은 초기에 진압 시늉만 하다가 금방 쿠데타군에 가담했다.

이런 부분, 특히 어쩌면 결정적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 추론일 수 있는 미군·미국의 역할은 이번 증언록에서도 새로 밝혀진 게 거의 없다.

1962년 10월29일, 방미 때 매그루더 전 주한미군 사령관을 찾아간 1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와이즈베리 제공
1962년 10월29일, 방미 때 매그루더 전 주한미군 사령관을 찾아간 1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와이즈베리 제공
김종필이 가장 보람 있었던 일로 꼽는 19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 타결에 관한 회고에서도, 일본한테서 얻어내는 금액을 수천만 달러 차원에서 8억 달러로 늘렸다는 ‘무용담’만 즐비할 뿐,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 미국에 대해서는 거의 함구한다. 궁정동 안가의 저 ‘10·26사건’의 비극도 당시 흔들리던 박정희의 판단력 쇠퇴, 그가 ‘발작증’이라 부른 김재규의 정신병리학적 증세, 그보다 훨씬 더 기괴했던 차지철의 횡포 등 문제 많은 개인 캐릭터 중심으로 설파하는 종래의 설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

2005년 도쿄 게이단렌(경단련)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와 함께한 자리에서 행한 강연 ‘한일 간의 어제와 오늘’(<요미우리신문> 주최)에서 김종필은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인에게 원훈이라면 한국인에겐 침략의 원흉이었다”는 등의 얘기를 통해 일본인들의 역사의식을 비판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일본인들의 그런 편향된 의식과 역사인식을 일상화·심화시킨 데는 5·16 쿠데타 세력 스스로 일조한 면이 없지 않다. 그들의 대일 접근, 그리고 지금까지도 한일 양국관계에 압도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접근 방식이 그런 의식의 편향·편견, 역사 왜곡을 낳는 동아시아 정세구도 재생산의 협력자·동조자 역할을 하면서 기득권을 향유해온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5·16 쿠데타와 한일 국교 정상화, 이를 기반으로 삼은 한국 경제발전을 무한 긍정하면서 자부심을 느끼는 김종필의 증언에서는 그런 측면에 대한 반성적 고찰은 찾아보기 어렵다.

김종필은 국교 정상화 교섭 과정에서 만난 이케다 하야토 당시 일본 총리가 그를,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메이지 유신 3걸’의 하나로 꼽히는 오쿠보 도시미치에 견준 데 상당한 긍지를 느낀 듯 보인다. 침략주의로 간 일본의 반동, 복고적 메이지 유신이 5·16 쿠데타 핵심 멤버들의 모델이었다는 지적은 그래서 설득력이 더 있어 보인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