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방한한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 내외. 키가 훤칠하다. 한겨레신문 자료사진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들은 네덜란드 국민들이다. 남자들의 평균 키는 184㎝, 여자들의 평균 키는 171㎝라고 한다. 하지만 원래부터 네덜란드가 세계 최장신 국가였던 것은 아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1860년 네덜란드 군인의 평균 키는 165㎝ 정도였다. 이는 당시 세계 최장신이었던 미국인보다 7㎝나 작은 키다. 하지만 현대의 미국인은 키 대신 비만율만 높아지고 있다. 20세기 들어 언젠가부터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에스토니아 등 북유럽인과의 키 경쟁에서 뒤지고 말았다. 특히 네덜란드인들의 역전이 놀랍다. 지난 150년 사이에 평균 신장이 무려 20㎝나 커졌다. 네덜란드를 이렇게 짧은 시일 안에 세계 최장신 국가로 변모시킨 힘은 무엇일까?
1820~2013년 기간중 미국과 유럽국의 평균 신장 변화. http://figshare.com/ (허핑턴포스트서 재인용)
키 관련 유전자 180…영양과 경제 민주화는 기본
키에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는 우선 유전을 꼽을 수 있다.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키에 영향을 주는 유전자를 최소한 180개 발견했다. 각 유전자의 영향력은 작지만, 합쳐 놓으면 한 집단내 다양한 키의 80%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환경 요인도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거론된다. 예컨대 하와이에 정착한 일본 이주민 자녀들은 부모보다 키가 훨씬 더 크다. 과학자들은 우유와 고기가 주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동안 과학자들은 네덜란드인들이 짧은 기간에 키가 확 커진 건 대부분 환경 변화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해 왔다. 네덜란드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치즈와 우유 부문에서 세계 최대 생산·소비국 중 하나가 됐다. 또 시간이 갈수록 평등한 부의 분배가 이뤄지고, 보건 서비스 혜택을 골고루 받게 된 것도 평균 신장의 성장에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를 설명해주는 건 아니다. 다른 북유럽 국가들 역시 비슷한 생활수준과 사회시스템을 갖고 있지만 네덜란드만큼 키가 커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설 결성된 8개국 연합군 군인들. 영국과 미국 병사가 유럽대륙 병사보다 훨씬 크다. 왼쪽부터 영국, 미국, 호주, 인도,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 병사. 위키피디아
아직 설명되고 있지 않은 그 공백을 메울 만한 연구 결과가 나왔다. 최근 영국 <왕립학회보>(Royal Society journal Proceedings B) 온라인판에 실린 연구 결과에 따르면, 네덜란드인들의 급속한 장신화는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에 의한 인간 진화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런던위생열대의학대학원(London School of Hygiene and Tropical Medicine)의 게르트 스툴프(Gert Stulp)-이 사람 역시 네덜란드 출신으로 키 2미터의 장신- 교수팀이 발표한 논문을 보면, 키가 큰 네덜란드 남자들은 키가 작은 남자들보다 더 많은 자녀를 낳았으며, 이것이 세대가 흐르면서 키를 크게 하는 유전자가 네덜란드인 사이에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스툴프 교수는 “남자들에게 키가 큰 것은 건강미와 성적 매력, 더 좋은 교육과 더 높은 소득과 관련이 있다. 이것들은 좀더 성공정인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예일대의 스티븐 스턴스(Stephen Stearns) 진화생물학 교수는, 이번 연구 결과는 인류가 여전히 자연선택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네덜란드의 스피드스케이팅팀. 모두 키가 180㎝를 훌쩍 넘는 장신들이다. 왼쪽부터 얀 블록하위선(184㎝), 스벤 크라머(187㎝), 요릿 베르흐스마(190㎝). 위키피디아
스툴프 연구팀은 최근 완성된 국가통계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1935~1967년 중 네덜란드 북부 3개주에 거주했던 9만4500여명의 궤적을 추적했다. 연구진은 이 가운데 네덜란드 태생 부모 아래,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45세 이상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45세 이상으로 한 건 그 이후에는 아이를 갖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추려진 4만2616명을 분석한 결과, 이 기간에 가장 많은 자녀를 가진 사람들은 키가 큰 남자였다. 통계적으로 이들은 자녀가 가장 적은 남자그룹보다 평균 0.24명이 더 많았다. 자녀가 가장 많은 남자들은 평균치보다 키가 7㎝ 더 컸다. 자녀가 가장 적은 남자 그룹의 키는 평균치보다 14㎝ 작았다. 첫째 아이를 더 늦은 나이에 둔 경우에도 이런 경향을 보였다. 여자의 경우엔 달랐다. 평균 키의 여자들이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았다. 이는 키 큰 여성들은 짝을 찾기가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일 수 있음을 추정케 해준다. 반대로 키 작은 여자들은 아이를 잃을 위험이 더 높은 것으로 나왔다. 스툴프는 “키는 유전의 영향이 크다. 키가 큰 부모의 자녀 역시 키가 큰 경향이 있다. 다른 조건들이 똑같다면, 현 세대의 평균 키는 앞선 세대의 평균 키보다 조금 클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몇세대가 이어지면서 네덜란드가 최장신 국가로 바뀐 것이다.
왼쪽부터 미국, 일본, 네덜란드, 프랑스인 인형. 네덜란드 인형의 키가 단연 두드러진다. 미국의 그래픽 아티스트인 니콜라이 램의 작품이다. http://aplus.com/a/what-the-average-man-s-body-looks-like-in-different-countries?so=vv8W9BjDFjau4RMdN86Yvk&ref=ns
미국은 20세기 이후 정체…네덜란드도 ‘자연선택’ 한계점
앞서 스툴프 교수가 미국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1937~1940년에 태어난 미 위스콘신주 아이들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평균 키의 남자들이 키가 작거나 큰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자녀를 낳았다. 여자의 경우엔, 키 작은 여자들이 평균 키 여자들보다 더 많은 자녀를 낳았다. 이를 합쳐서 보면, 미국에서의 자연선택은 네덜란드와 다른 방향으로 이뤄졌다는 뜻이 된다. 미국식 식습관 같은 환경 요인이 사람들의 키를 크게 하는 대신 작게 만든 것이다. 이는 20세기 이후 미국인 키에 별다른 변동이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네덜란드에선 왜 키가 큰 남자가 재생산에서 우위에 있을까? 미국에선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스툴프 교수는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이유는 사람은 흔히 자신보다 훨씬 더 크거나 작지 않은 파트너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또 미국에서는 키가 작은 여자가 더 많은 아이를 낳았다. 따라서 키가 큰 남자는 평균 키의 남자보다 오히려 상황이 안좋을 수 있다. 키 작은 여자와 짝을 이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스턴스 교수는 “결국 키가 큰 네덜란드 남자가 재생산에서 우위에 있는 현상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흔히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여러 세대에 걸쳐 하나의 트렌드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안정화 또는 반대 방향의 흐름이 이어진다. 미국에서는 키 큰 남자를 선호하는 자연선택이 몇세기 전에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나서 멈췄다. 이 바톤을 이어받은 것이 네덜란드였다. 하지만 최근 네덜란드인들의 키도 성장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2012년 12월10일 과학저널 <네이처>의 자매지 <소아과 연구>(PEDIATRIC RESEARCH)에는, 1955~2009년 기간중 아이들(0~21세)의 키 변화를 조사한 결과 네덜란드인들의 장신화 흐름이 150년만에 멈춘 것으로 나타났다는 논문이 발표됐다.
네덜란드의 장신화 추세는 1990년대 말 이후 멈췄다. http://figshare.com (허핑턴포스트서 재인용)
한국 100년 새 10cm 커져…네덜란드 다음 주자 될까
네덜란드 다음에 바톤을 이어받을 나라는 어디일까? 생활방식의 서구화와 함께 키 큰 사람을 선호하는 현상이 두드러진 한국도 후보군이 될 수 있을까? 한국인의 평균 신장은 생활환경 개선 등에 힘입어 지난 100년 동안 10㎝ 가량 커진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2012년 현재 20대 한국 남성의 평균 키는 174㎝, 20대 여성은 160㎝이다. 하지만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에, 결혼 기피 현상까지 심해지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보면, 한국에서 네덜란드식의 자연선택 진화가 진행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2014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25명이다.인구 현상유지 출산율인 2.1명에 훨씬 못미친다. 혼인율도 1000명당 6건으로 역대 최저치로 떨어졌다. 아이를 덜 낳는 만큼 자연선택에 의한 신장 진화의 진행이 쉽지 않음을 시사한다. 북유럽을 최장신 국가군으로 만든 또다른 요인으로 꼽히는 부의 평등한 재분배에서도 한국은 오히려 뒷걸음질하는 중이다. 한국은 한때 빈부격차가 적은 나라로 통했지만, 지금은 소득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국가 가운데 6번째로 불균형이 심각하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 한국인의 신장은 잠재력을 다 펼쳐보이지도 못한 채 어느새 성장의 한계에 다다른지도 모를 일이다.
곽노필 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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