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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압력에 굴복하는 조선/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3. 19. 14:02

정치외교

왜 이리도 부끄러운 심부름을 했을까

등록 :2016-03-18 18:52

 

청일전쟁 시기 변발에 손을 뒤로 묶인 채 앉아 있는 청나라 포로를 별기군 차림의 조선 병사가 감시하고 있다. 1894년 체결된 조일양국맹약에 따라 조선은 일본군을 위해 인력과 시설을 제공하고 포로감시도 해주었다. 외교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1868~99 일록 20세기>(고단샤, 1999)
청일전쟁 시기 변발에 손을 뒤로 묶인 채 앉아 있는 청나라 포로를 별기군 차림의 조선 병사가 감시하고 있다. 1894년 체결된 조일양국맹약에 따라 조선은 일본군을 위해 인력과 시설을 제공하고 포로감시도 해주었다. 외교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1868~99 일록 20세기>(고단샤, 1999)
[토요판] 조세영의 외교클럽
(1) 연재를 시작하며
나는 사진 보는 걸 좋아한다. 내가 정신없이 빨려드는 사진은 풍경사진이나 인물사진이 아니라 보도사진이다. 역사의 한순간이 한 컷의 이미지에 응축된 그 강렬함이 좋다. 초등학교 시절 집에 있던 보도사진연감이나 ‘사진으로 보는 광복 30년’ 같은 사진책을 취미처럼 보고 또 봤다. 어떤 음식을 처음 맛보았을 때의 느낌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것처럼 그때 본 사진들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1960년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로 숨진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사진이 아마도 어린 시절에 처음으로 깊은 인상을 받은 사진이었던 것 같다. 1963년 11월 케네디 미국 대통령 암살 용의자로 검거된 오즈월드가 호송 경찰에 둘러싸여 언론사 카메라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걸어가던 중에 권총을 맞고 피살되는 순간의 사진도 마찬가지다.

어렵고 두꺼운 역사책을 안고 씨름하는 것보다 역사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편이 훨씬 의미 파악이 잘될 때가 많다. 마치 그 시대를 직접 살아본 것처럼 생생한 감각을 느껴볼 수 있다. 그런데 때로는 보도사진 한 장이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강한 느낌을 안겨주기도 한다. 직관적인 강렬함에서도 사진이 영화를 능가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소설을 읽는 것과 시를 읽는 것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었다. 영화에 등장했던 남북한 군인 네 명을 모두 한 컷에 담아낸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원작소설을 쓴 작가도 글로써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잘 나타내준 ‘빛나는 엔딩 스틸’이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도 자기가 20년간 본 영화 중에 가장 멋진 마지막 장면을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높은 점수를 주었다.

외교서한을 둘러싼 한-일의 기싸움

외교현장에서도 사진이 큰 몫을 할 때가 있다. 2012년 8월10일 이명박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독도를 방문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최근 몇 년 동안 한일관계가 급전직하로 악화된 시발점이 바로 이 사건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커다란 외교적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일본 정부로서는 뜻밖에 허를 찔린 셈이었고 일본의 국내 여론은 강경한 대응을 주문하는 목소리로 들끓었다.

이러한 국내적 압력 속에서 일본은 1954년과 1962년에 이어 50년 만에 다시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라는 카드를 빼들었다. 일본이 제소하더라도 한국이 수락하지 않으면 재판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실효성은 없지만,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는 독도 문제에 대해서 일본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카드 가운데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일본은 8월17일 정식으로 한국에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공동으로 회부하자고 제의하면서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항의하는 노다 총리의 공식서한을 주일한국대사관에 전달했다. 일본이 이렇게 나오자 이번에는 한국의 국내 여론이 일본의 도발을 규탄하며 달아올랐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국제사법재판소 공동 회부 제안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해버렸지만, 국내 여론은 일본으로부터 받은 노다 총리 서한을 되돌려보내는 단호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정식으로 전달된 외교서한을 반송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고민 끝에 한국 정부는 서한을 반송하기로 결정했다.

2012년 8월23일 일본 노다 요시히코 총리의 서한을 되돌려주기 위해 외무성에 들어가려던 주일한국대사관 김기홍 참사관이 경비원의 제지를 받고 있다. 김 참사관은 외교관 신분증을 보여줬는데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연합뉴스
2012년 8월23일 일본 노다 요시히코 총리의 서한을 되돌려주기 위해 외무성에 들어가려던 주일한국대사관 김기홍 참사관이 경비원의 제지를 받고 있다. 김 참사관은 외교관 신분증을 보여줬는데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연합뉴스

8월23일 본부로부터 반송 지시를 받은 주일한국대사관의 참사관이 되돌려줄 서한을 가지고 도쿄 도심의 관청가인 가스미가세키로 향했다. 외무성 건물 앞에 도착하여 정문으로 들어서려 했더니 갑자기 경비원이 출입을 제지했다. 평소에는 외교관 번호를 단 차량이면 아무런 문제 없이 출입하던 곳이었는데 이날은 들어갈 수 없다며 경비원이 길을 막았다. 언론보도를 통해 한국이 서한을 반송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이미 파악하고 있던 일본 외무성이 이를 원천봉쇄하기 위해서 정문 경비원에게 한국 외교관을 출입시키지 말도록 미리 지시해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광경이 고스란히 사진으로 찍혀서 다음날 한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외무성 정문에서 외교관 신분증을 내보이는 한국 외교관을 일본 경비원이 막고 있는 사진이 커다랗게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이 사진 한 장이 양국 정부의 희비를 갈랐다. 일단 접수한 외교서한을 다시 반송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상당히 비우호적인 일이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이미지가 실추되는 부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한 나라의 외무성이 자기 나라에 주재하는 외교관의 출입을 막는 것은 그보다 더욱 이례적이고 비우호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사진이 주는 시각적 효과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일본 외무성이 너무 심했다는 인상을 받기 쉬웠다. 그 덕분에 한국 정부의 부담이 많이 가벼워진 셈이었다. 지금 그때의 신문 기사들을 다시 들추어보니 새삼스레 당시에는 양측이 모두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흘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보도사진을 즐겨보는 취미 때문에 해외에 근무할 때도 짬이 나면 책방을 돌면서 사진책을 찾아보는 일이 많았다. 일본은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이나 마찬가지다. 도쿄에는 진보초(神保町)라는 유명한 책방 거리가 있는데 한국의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대형서점인 산세이도(三省堂)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서점들이 몰려 있다. 한국에선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는 헌책방도 180여개나 된다. 헌책방 밀집지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고 한다. 56년째 매년 가을에 열리고 있는 진보초의 헌책방 축제 때는 100만권 정도의 헌책이 특별할인가격으로 쏟아져 나온다.

진보초에 가면 제일 부러운 것이 중국 관련 서적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서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도호(東方)서점과 우치야마(內山)서점이다. 중국 관련 서적만 가지고도 번듯한 책방이 운영될 수 있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중국에 관한 출판물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이야기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중국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하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부럽기만 한 일이다. 우치야마서점은 1917년 중국 상하이에서 처음 개업하여 1935년에 도쿄로 진출하였다니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중국의 문호 루쉰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고 한다.

10년 전 진보초의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 장의 사진
청일전쟁 시기 청나라 포로들을
별기군 차림의 조선병사가 감시
조일양국맹약 때문이었다

어쩌다 자기 땅에 다른 나라들이
제멋대로 와 전쟁하게 만들고
심부름까지 떠맡은 못난 처지
외교현장에서 이 사진 꺼내 보며
외교의 엄중함 잊지 말자고 다짐

일본군 지휘관 고시 소좌가 자살한 이유

진보초의 헌책방에서 사진책을 뒤지다가 10여년 전쯤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그 사진은 청일전쟁 시기 변발에 손을 뒤로 묶인 채로 앉아 있는 청나라 포로를 별기군 차림의 조선 병사가 감시하는 사진이었다. 청과 일본이 싸운 전쟁인데 왜 조선 병사가 청군 포로를 감시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진설명을 살펴보니 청일전쟁 때 체결된 ‘대조선·대일본양국맹약’(大朝鮮·大日本兩國盟約)에 따라 조선 병사가 일본군에 종군했다고 되어 있었다. 청일전쟁이 조선 땅에서 벌어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조선군이 이런 역할까지 맡았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조일양국맹약은 1894년 7월25일 일본이 풍도(경기도 안산시)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나서 약 한달 뒤인 8월26일에 조선의 외무대신 김윤식과 오토리 게이스케 일본 공사의 이름으로 체결되었다. 전부 3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이 짧은 조약의 주된 내용은 청국 군대를 철퇴시키기 위하여 일본이 전투를 담당하고 조선이 일본군에 대해 식량 제공을 비롯한 일체의 편의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군은 전방에서 청나라와 전투를 담당하는 대신 조선은 일본군을 위해 인력과 시설을 제공하고 무기와 식량도 운반하며 사진에서 보듯이 포로 감시도 해준다는 뜻이다. 중국을 상대로 하여 한국과 일본이 군사동맹을 맺고 병참지원을 한국이 담당한 것이다.

일본은 선전포고에 앞서 전쟁을 시작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조선이 일본에 청국 군대를 철퇴시켜줄 것을 요청하는 문서를 보내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리고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이 전면적으로 협력하는 체제를 미리 만들어놓으려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풍도 해전 이틀 전인 7월23일 여단 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의 궁궐수비대와 교전한 끝에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여 조선 정부를 사실상 장악했다. 일본의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한 조선 정부는 일본군에 물자와 인력을 제공하는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통과하는 지방의 관청과 주민들은 일본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좀처럼 협조하려 하지 않았다. 병참 지원 문제가 벽에 부닥치자 일본군은 현지에서 강제로 물자를 징발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주민들의 감정을 점점 더 악화시켰다. 급기야 물자와 인력 조달 문제로 일본군 지휘관이 자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일본군과 청국 군대가 육상에서 처음으로 교전한 것은 7월29일의 성환 전투에서였다. 그런데 이틀 전인 7월27일에 그동안 어렵게 징발하여 확보해둔 말과 조선인 노동자가 모두 도망가버리자 보병 제21연대 제3대대장인 고시 소좌가 전투 준비에 지장을 초래한 데 책임을 지고 자살한 것이다. 이렇게 병참 지원 문제가 심각해지자 일본이 조일양국맹약 체결을 서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조약문 한 글자가 국가 명운 좌우한다

포로 감시 사진을 살펴보면 초립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흰색 무명 바지에 짙은 색 상의를 걸친 헐렁한 차림새의 조선 병사 셋이 소총을 한 자루씩 들고 포로들의 바로 뒤에 나란히 서 있다. 그들의 얼굴은 아직 십대인 듯 앳되어 보이기만 한다. 산속에서 찍었는지 땅바닥에 책상다리하고 앉은 포로 네 명의 발치는 풀잎으로 반쯤 덮여 있다. 네 명 모두 머리 윗부분을 박박 밀고 뒷머리만 남겨 길게 땋은 만주족 특유의 변발을 하고 있는데, 뒤쪽에 선 조선 병사 하나가 포로들의 땋은 머리를, 단체로 산보시키는 애완견들의 목줄을 잡듯이 한 손으로 거머쥐고 있다.

조선이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심부름꾼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이 사진 한 장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다 자기 땅에 다른 나라들이 제멋대로 들어와 전쟁을 하게 만들고 게다가 한쪽의 심부름까지 떠맡는 못난 처지가 되었을까.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이 쓰라리게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 후 외교현장에서 일상적인 업무 처리에 쫓기면서도 가끔씩 이 사진을 꺼내 보며 외교라는 일이 갖는 엄중함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곤 했다.

‘이 맹약은 청국병을 조선국의 국경 밖으로 철퇴시켜 조선국의 자주독립을 공고히 하고 조일 양국의 이익을 증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일양국맹약 제1조의 내용이다. 일본군의 심부름을 한다는 약속이 자주독립과 양국의 이익이란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어 있다. 미사여구로 핵심을 호도하기는 1910년 8월의 강제병합조약도 마찬가지다. 전문(前文)에는 두 나라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일본에 병합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확신해서 조약을 체결한다고 치장되어 있다.

외교회담에서의 말 한마디, 조약문에서의 글자 한 자가 국가의 명운을 좌우한다. 가슴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한국 외교가 치열해야만 하는 이유다.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조세영 동서대학교 특임교수 겸 일본연구센터 소장. 외교부에서 30년 근무한 뒤 정년보다 8년 일찍 퇴직해서 실천적 문필가를 꿈꾸며 살고 있다. 일본·중국·예멘·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고 동북아시아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봉인을 떼려 하는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본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와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가 있다. 거창한 외교론이 아니라, 외교라는 일을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려는 생각에 연재를 시작했다. 매주 연재, 4주 뒤부터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