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의병장 김덕령/ 곽병찬의 향원익청/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3. 30. 09:53

사설.칼럼칼럼

취해서 부르지만 내 곡조 듣는 이 없네

등록 :2016-03-29 18:39수정 :2016-03-29 19:54

 

곽병찬의 향원익청
김덕령은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씨름판에서 무적의 거구를 쓰러트리고, 달리는 말에서 몸을 날려 누각에 올라갔다가 다시 말을 잡아탈 만큼 날랬다. 의병장이 되고는 맨손으로 잡은 호랑이 두 마리를 적진에 보내,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고도 한다.

광주 시민들은 김덕령을 사랑한다. 광주 중심가의 이름을 충장로라 할 정도로 몹시 존경한다. 충장사엔 평일에도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백성을 도탄에 빠트린 자라면 그가 군주라도 갈아치워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나라에 대한 ‘충’이고 국민에 대한 ‘의’ 아닌가.

평매들 건너 장불재의 유장한 능선과 우뚝한 서석대,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봉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원효봉과 덕봉산으로 이어진다. 충장사는 그 사이 배재 마루 밑에 있다. 그러고 보니 취가정은 물과 들의 물매를 거슬러 돌아앉아 있었다.

450여년 전 태어나, 국망의 위기를 맞아 큰 뜻을 세워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 총사령관이 됐지만 용렬한 군주의 의심에 죽임을 당하고, 옥사한 지 65년 만에 복권되고 190년 뒤 충장사에 배향된 충장공. 그가 밟아온 시간과 공간을 취가정은 거꾸로 돌아보고 있는 것이었다. 취가정의 연원은 ‘취시가’, ‘술에 취하여 부르는 노래’다. 오죽 원통했으면,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혼령조차 취하고서야 통한을 털어놓았을까.

하지만 그건 석주의 스토리텔링이었다. 어느 날 석주 권필의 꿈속에 산발한 채 대취한 김덕령이 나타나 시집 한 권을 건넸다. 첫 장에 ‘취시가’가 있었다. “술에 취하여 부르는 노래여/ 이 곡조 듣는 이 아무도 없네/ 나는 꽃과 달에 취함도 바라지 않고/ 공훈을 세움도 원치 않았네/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구름이요/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네/ 취하여 부르는 노래여/ 이 곡조 아는 이 없네/ 다만 원하노니 밝은 임금을 만나 창검으로 보답하고 지고”

석주는 그런 문학적 구성 속에 김덕령의 울분과 통한, 남은 이의 자괴감을 담은 것이었다. 그는 충장공의 6촌고종형인 해광 송제민의 사위다. 두 살 밑인 석주가 처가 쪽에서 살면서 함께 어울렸다. 석주는 젊어서 문장으로 주목을 받았고, 김덕령은 이미 무용으로 세상에 알려졌던바, 두 사람은 문무 쌍벽이었다. 그런 김덕령이 터무니없는 혐의로 옥사했으니, 석주의 좌절과 분노는 컸다. 하지만 ‘반란수괴’였으니 꿈을 빌려 위로할 수밖에. “지난날 장군께서 쇠창을 잡으셨더니/ 장한 뜻 중도에 꺾이니/ 천명인 걸 어찌 하리….”

김덕령은 석저촌(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태어났다. 인근엔 장군의 작은할아버지 사촌 김윤제, 김윤제의 조카이자 충장공의 당숙인 김성원(식영정 주인), 김윤제의 처남인 양산보(소쇄원 주인), 해광 송제민 등 당대의 명사들이 개울 건너 혹은 언덕 너머에 살고 있었다. 충효리란 훗날 정조가 그를 기리기 위해 정려와 함께 내린 고을 이름이었다. 지금도 500여년 된 왕버들이 옥중의 김덕령을 연상시키는 귀신 형상으로 마을을 지킨다. 이름 또한 ‘김덕령 나무’다.

석주가 언급한 충장공의 ‘장한 뜻’은 1902년 매천 황현이 지은 ‘충효리에서 김 장군을 애도하다’에 압축적으로 담겼다.

“석저장군이 만인을 대적하니/ 말 위의 구리 채찍 소리가 벽력 같네/ 포효하는 호랑이를 원숭이처럼 희롱하니/ 오랑캐들 돌아보며 새파랗게 질렸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김덕홍은 제봉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금산전투에서 전사한다. 형의 당부에 따라 노모를 모시던 그는 이듬해 6월 어머니가 별세하고 10월 진주성이 함락되자 의병을 일으켰다. 진주성이 무너지면 다음은 호남이고, 호남이 무너지면 조선도 무너질 게 자명했다.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가 지원했다. 일거에 청장년 3천여명이 운집했다. 선조는 1594년 1월 충용이란 깃발을 내리고 광해군은 익호라는 휘호를 준다. 충용군 익호장이 된 김덕령은 4월 전국의 의병을 통솔하게 된다. 수군엔 이순신, 육군에는 권율, 의병에는 김덕령이었다.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씨름판에서 무적의 거구를 쓰러트리고, 달리는 말에서 몸을 날려 누각에 올라갔다가 다시 말을 잡아탈 만큼 날랬다. 의병장이 되고는 맨손으로 잡은 호랑이 두 마리를 적진에 보내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고도 한다. 남원 의병장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온 나라 사람들이 그에게 의지했고, 왜인들도 그를 겁내 (전라도를)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바라만 봐도 무기 거둔 채 다가서지 못하니/ 칼집 속 신검엔 푸른 녹이 끼었네/ 섬멸한 뒤 아침 먹기 진실로 어렵지 않았거늘/ 운수가 기이하여 끝내 적과 접전하지 못했네”

하지만 왜적은 전투를 피하고 강화를 모색했다. 확전의 여력도 없었지만, 바다와 땅을 이순신과 김덕령이 지키고 있었다. 해안에 왜성을 짓고 지키기 전략에 돌입했다. 선조도 호응했다. 전선은 교착됐고 김덕령의 칼집 속 신검에 녹이 슬었다. 그는 거제도와 고성 그리고 의령 정진전투 등 작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을 뿐, 전투다운 전투를 벌이지 못했다.

“높은 명성은 그저 패금을 이룰 뿐이었고/ 의리가 두터운데 언제 전투를 기피했던가/ 옥리도 감복하여 모함인 걸 알았고/ 성상도 무릎 치며 끝내 애석해했네”

1596년 7월 충청도 홍주에서 이몽학의 난이 발생했다. 조정은 김덕령의 부대에 진압 명령을 내렸다. 부대가 이동하던 중 반란은 수습됐다. 주모자들 입에서 김덕령과 곽재우, 고언백, 최담경 등 의병장들의 이름이 나왔다. 함께 거사를 도모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잔꾀 많은 선조에게는 좋은 빌미였다.

그는 의병장들이 두려웠다. 이미 한양성을 포기하고 야반도주할 때 민중의 성난 모습을 경험했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전쟁이 끝나면 민중은 저의 무능과 무책임을 심판하려 할 것이다. 이몽학의 난은 그 징후였다. 그러면 누구를 앞세울 것인가.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부터 삶아 먹듯이’ 후환을 도려내야 했다.

국청이 열렸다. 선조가 직접 신문에 나섰다. 김덕령을 제외한 다른 의병장들은 풀어줬다. 모두 처형하면 민심 이반을 재촉할 수 있었다. 20여일간 6회에 걸친 형문과 수백 회에 걸친 고문 속에서 김덕령의 정강이뼈가 부스러지고, 피가 터지고, 살이 찢겨나갔다. 옥리도 김덕령에게 ‘죽음으로써 충의를 지킨 죄’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선조는 막무가내였다.

“서석산 천주봉이 한 번 무너지자/ 천추토록 오로지 슬픈 구름만 쌓였네/ 용강은 명주 같고 뱅어는 살졌거늘/ 왜 진즉 낚싯대 잡고 숨어 살지 않았던고”

매천은 개탄했다. 쥐 같은 군주에게 무슨 ‘충’(忠)이고 ‘의’(義)인가. 일찍이 김덕령도 다짐한 바 있다. “거문고 노래는 영웅의 일이 아니리니/ 모름지기 장막에서 칼춤을 춰야 할 뿐/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면/ 강호에서 낚시 외에 달리 무엇을 구할까” 그러나 더러운 권력은 강호로 돌아갈 기회도 주지 않았다. 무등산 천왕봉이 무너졌다.

사관은 한탄했다. “(이후) 용력 있는 사람들은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듬해 퇴각했던 왜는 다시 조선을 침략한다(정유재란).

선조는 1604년 6월 대대적으로 공신 책봉을 한다. 그러나 전공 세운 이는 18명(선무공신)에 불과했다. 반면 왕이 의주로 도피할 때 수행했던 자들은 대부분(86명) 호성공신에 책봉했다. 내시만 24명이 포함됐다. 사관의 개탄이 이어졌다. “태조가 창업할 적에도 (공신 책봉은) 30여명에 불과했다. 내시가 그중에 끼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 임진왜란 중 창의하여 절개를 세운 사람이 많았다. 정인홍 김면 곽재우는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김천일 고경명 조헌은 호남과 호서에서 절개를 지키고 죽었다. 그들의 공은 너무도 찬란하고 열렬하여….” 그러나 이들의 절의는 모두 무시됐다. 의병장은 모두 배제됐다. 선대 왕들을 보기에도 ‘참으로 외람된 일’이라고 사관은 특별히 강조했다.

광주 시민들은 김덕령을 사랑한다. 광주 중심가의 이름을 충장로라 할 정도로 몹시 존경한다. 충장사엔 평일에도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백성을 도탄에 빠트린 자라면 그가 군주라도 갈아치워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나라에 대한 ‘충’이고 국민에 대한 ‘의’ 아닌가. 왜 살아서 분노하지 않았던가. 분향하며 물었다.

곽병찬 대기자
곽병찬 대기자
수주 변영로의 ‘논개’ 한 구절이 떠올랐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적장을 부둥켜안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 연인(김시민)의 원수를 갚은 논개의 분노.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