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쓰이와 세키노가 1909년 9월15일 평양 대동강변에서 처음 발굴한 석암동 고분(갑분)의 천장부 모습.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이다.
‘야쓰이 비망록’으로 본 조선 발굴비사
⑤ 평양 일대 고분 발굴
인부들의 삽날에 무언가 ‘턱’
중국풍 벽돌무덤 천장이 드러났다
훗날 낙랑군 논란 첫 실체인 ‘갑총’
석암동 고분이 출현하는 순간이었다
흥분한 야쓰이와 세키노는
천장을 뚫으라 지시했고
고구려계 보물을 기대하며
도굴꾼처럼 탐침봉을 휘둘렀다
⑤ 평양 일대 고분 발굴
인부들의 삽날에 무언가 ‘턱’
중국풍 벽돌무덤 천장이 드러났다
훗날 낙랑군 논란 첫 실체인 ‘갑총’
석암동 고분이 출현하는 순간이었다
흥분한 야쓰이와 세키노는
천장을 뚫으라 지시했고
고구려계 보물을 기대하며
도굴꾼처럼 탐침봉을 휘둘렀다
세키노와 야쓰이가 대동강변의 옛 고분들을 살펴보자는 시라카와 쇼지의 제안에 솔깃해하며 곧장 조사에 착수한 데는 고구려 고대 유물들에 대한 욕심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904~1905년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 대동강 주변의 평양과 황해도 북부 지역 일대에서는 일본인들의 사주를 받아 도자기 등을 노린 고분 도굴이 극심했다. 시라카와 쇼지를 비롯한 상당수 일본인 거류민 유지들은 이런 도굴 유물들을 모아 수집가를 자처하고 다녔다. (야쓰이는 시라카와를 만사에 열심인 사람으로 매일 길을 안내해주어서 큰 신세를 졌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심지어 이런 도굴 만행에는 지역 조선인 유지들도 적극 가담했다. 1904년 한반도 안의 고구려 고분을 가장 먼저 굴착한 이로 알려진 강서군수 이우영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런 사실은 도쿄미술학교에 재학하다 일본군에 입대해 1905년 러일전쟁 당시 평양의 15사단 위생병으로 근무했던 오타 후쿠조의 증언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데, 오타 또한 1906년 11월26일 현지인들과 함께 평양 부근 강서지역의 고구려 고분 굴착을 벌여 3일 만에 고분 석실 안으로 들어가 벽화를 확인하고 스케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따라서 1909년 10월9일 평양에 도착한 세키노와 야쓰이 조사단 일행은 이미 풍문으로 퍼진 고구려 무덤의 벽화와 보물들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환상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야쓰이의 조사일지 ‘계림기행’을 보면, 세키노 조사단이 평양 남쪽 대동강면 상오리에 있는 옛 무덤떼들을 시라카와 쇼지의 안내를 받으며 답사하기 시작한 것은 평양 도착 닷새 뒤인 10월14일 오후 1시가 갓 지난 시각이었다. 앞서 평양의 기자묘와 숭인전 등 평양의 고적들을 돌아보고 답사에 나선 이들은 당시 갓 개설된 철도선 부근 평지와 강기슭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백개의 무덤떼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야쓰이는 바로 일본인 1명과 중국인 1명 조선인 6명의 인부들을 불러내어 오후 2시7분부터 바로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야쓰이는 당시 일본 역사지리학회에 보낸 엽서에서 발굴 상황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이 지역은 석재가 부족하기 때문인지 무덤곽은 쥐색 벽돌로 아치형으로 만들었다. 이 지방 거의 대부분의 고분은 벽돌을 취하기 위해 이미 파헤쳐진 상태였다. 오늘은 충분한 조사를 할 수 없었고 대신 문양이 있는 여러 종류의 벽돌을 채집하였다. 벽돌의 문양은 직선으로 이뤄지는데 대개 한식(漢式) 혹은 육조식(六朝式)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쥐색 토기도 고분에서 출토되었는데…아마도 우리 일본의 고분시대에 상응하는 정도의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보고처럼 첫날 발굴은 성과를 얻지 못했다. 봉분 등의 보존상태가 좋은 고분 2곳을 골라서 팠지만, 파도 파도 흙만 쏟아지거나 도굴 흔적이 뚜렷이 드러나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굴을 단념했다. 그러나 야쓰이에겐 성과가 없지 않았다. 도쿄제국대학 시절 연구실에서 본 고대 중국의 문양벽돌을 뜻밖에도 무덤 주위에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발굴은 다음날 인근의 다른 고분 서너곳을 골라 다시 진행됐다. 시라카와와 함께 나와 현장을 지켜보던 야쓰이와 세키노는 처음 판 고분에서 계속 흙만 나오자 낙심했다. 시간이 흐르자 방추형의 고분 한 군데 상부에서 무덤 인부들의 삽날에 턱 하니 무언가가 걸렸다는 인부들의 전갈이 날아왔다. 급하게 삽에 걸린 부분을 집중발굴한 결과 직사각형의 벽돌로 촘촘히 메워진 천장 부분이 나타났다. 석실을 쌓은 고대 한나라풍의 벽돌무덤 천장 부분 위쪽이 드러난 것이다. 오늘날 낙랑군 논란의 시원이 되는 첫 실체인 갑총, 이른바 ‘세키노’분으로 일본 학계에 알려진 평양 석암동 고분이 다시 세상에 출현하는 순간이었다.
흥분한 야쓰이와 세키노는 천장 부분을 일단 뚫으라고 지시했다. 인부들이 벽돌을 부수고 천장에 구멍을 내자 이들은 흙으로 꽉 찬 내부를 인부들과 함께 살펴보며 곳곳에 탐침봉을 찔렀다. 이들은 고구려계 보물이 나올 것이란 기대감에 젖어 도굴꾼들이 쓰는 탐침봉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경주 석침총과 더불어 국내 근대 고분 조사의 서막이 된 평양 석암리 고분 발굴 또한 이처럼 일본 본토에서도 감히 하지 못했던 막무가내식 도굴에 가까운 방법으로 첫발이 시작된 것이다.
흙이 내부 석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유물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무덤 윤곽을 확인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였다. 일정에 쫓기는 조사단 일행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의문점도 하나 생겨났다. 무덤방을 감싼 벽돌이 마름모, 원 등의 기하무늬가 새겨진 전형적인 고대 한나라풍이었기 때문이다. 전날 발굴에 실패한 고분 주위에도 이런 한나라식 벽돌 조각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평양 일대는 고구려의 옛 도읍터로 알려져 있는데 고구려 유물 대신 중국풍의 벽돌무덤과 유물들이 처음 그들을 맞은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세키노와 야쓰이는 고민에 빠졌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