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테기 가쓰미 주간. 사진 길윤형 특파원
[짬] 일본 사노시향토박물관 모테기 가쓰미 주간
‘스나가 문고 자료전-김옥균과 박영효를 둘러싼 사람들’ 포스터
‘김옥균·박영효 둘러싼 사람들’ 주제
“조선사 선생님 덕분에 문고에 관심” 스나가 하지메 1만수천점 남겨
김옥균 유폐 때부터 지원·교류
“강한 독립의식 공유해 따른 듯” 일본의 한 시골 도시에 갑신정변(1884년)의 주역인 김옥균(1851~1894)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가 남아 있는 것은 스나가 하지메(1868~1942)라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 덕분이다. 사노시 부농의 가정에서 태어난 스나가는 김옥균·박영효 등 구한말 조선 지사들을 후원하며 평생 깊은 교류를 했다. 그의 후손이 없는 까닭에 그가 한·일의 수많은 명사들과 교류한 흔적을 보여주는 글씨·그림·자료 1만 수천점으로 구성된 ‘스나가 문고’는 사노시에 기증돼 오늘에 이르렀다. 박물관에서는 이 가운데 김옥균 등과 관련된 자료 86점을 엄선해 이번 전시회를 열었다. 모테기 주간의 설명을 듣고 유리 진열장 안의 편지로 눈길을 돌렸다. 편지가 쓰인 것은 1894년 3월.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홍종우의 총탄에 쓰러진 게 그해 3월28일이다. 이 편지는 김옥균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문서일 것으로 추정된다. 스나가와 김옥균이 만나게 되는 1880년대 후반은 혼란의 시기였다. 아시아에선 청나라와 일본 정도가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고, 청의 속국으로 전락한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처지였다. 모테기 주간은 “일본도 자칫하다간 어느 나라의 식민지가 될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에 스나가는 강한 독립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떠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을 지사로 생각해 존경하고 따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둘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김옥균이 1886년 태평양의 절해고도 오가사와라에서 유폐 생활을 하던 무렵 스나가가 금전적인 지원을 하면서 서신왕래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3년간 편지 왕래만 해오던 둘이 만난 것은 1889년 9월 도쿄 우에노역에서였다. 그때 스물한살이던 스나가는 서른여덟의 김옥균을 처음 만난 기쁨을 자신의 일기(9월19일치)에 ‘흔희무애’(欣喜無涯·한량없이 기쁘다)라고 적었다. 스나가는 긴 망명생활로 궁핍한 처지에 놓인 김옥균을 지원하기 위해 적지 않은 고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모테기 주간은 “스나가도 그때 20살 정도로 어렸기 때문에 자유롭게 쓸 돈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해 김옥균의 글씨를 팔아 지원을 했다”고 말했다. 스나가는 1888년 3월 김옥균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격문을 내무성의 허가 없이 인쇄해 출판조례 위반으로 처벌을 받기도 했다. 상하이로 떠나기 전 김옥균이 스나가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는 붓글씨로 휘갈겨 쓴 일본어였다. “앞으로 글(을 써달라는)의 부탁은 일절 거절합니다. 어떤 믿을 만한 친구든 어떤 긴요한 일이 있어도 거절합니다”라는 내용이다. 청나라 실세인 북양대신 이홍장과 기약 없는 만남을 위해 상하이로 향했던 김옥균의 굳은 결심을 읽을 수 있다. 전시회장엔 이 편지와 함께 스나가에게 보냈을 것이라 추정되는 휘호도 있다. 모테기 주간은 “김옥균이 숨진 뒤 일본 내 장례식은 도쿄 아사쿠사에서 열리는데, 그때 이 글씨가 걸렸다는 신문기사가 있다”고 전했다. 김옥균이 숨진 뒤에도 스나가는 반세기 가까이 더 살며 일본과 조선 사이의 평지풍파를 목도한다. 그는 김옥균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이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된 뒤인 1915년 김옥균의 옛 친구이던 이누카이 쓰요시(일본 29대 총리), 도야마 미쓰루(일본 우익인사) 등은 일본 정부에 ‘김옥균은 일-조 우호에 공훈이 있으니 작위를 주자’는 건의를 한다. 이에 대해 스나가는 김옥균 사망 22주기에 맞춰 발행된 <김옥균>(1916년)이란 책자에서 “지금 증위(贈位)의 논의가 있지만, 조선의 오늘은 거사(김옥균)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 잠든 거사 처지에서 보자면 우리나라는 적국이다. 적국에서 증위를 받아 무엇이 기쁘겠느냐”고 일갈한다. “스나가는 김옥균을 진심으로 존경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뜻을 따라 마지막까지 일본과 조선 양국이 서로 독립해 발전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요.” 모테기 주간은 “사노시는 도쿄에서 머니까 한국의 연구자들이 많이 찾진 않는다”며 “일본과 한국의 근대사를 연구하는 분이 있다면 꼭 자료를 보러 자료관에 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물관에 미리 연락을 하고 가면 모테기 주간의 친절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도치기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