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4월11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97주년이다. 100주년을 앞두고 임정기념관이나 조형물 건립은커녕 임시정부를 폄훼하고 1948년 정부수립일을 건국절로 삼고자 정부와 관변 논자들의 억설이 기승을 부린다. 친일파 후손들과 관변 학자, 족벌신문은 1919년의 ‘임시정부 건국’의 부당성으로 국가 구성의 3대 요소(국민·영토·주권)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세계사적으로 나라가 망하고 망명자들이 해외에 세운 임시정부(망명정부)가 이런 요소를 갖춘 경우는 없다. 망국기에 3대 요소를 갖춘 기관은 조선총독부였을 뿐이다.
미국은 1776년 7월4일 대륙회의가 독립을 선포하고 13개 주를 수립한 데 이어 1781년 ‘연방헌장’을 채택하고 1789년 4월 아메리카합중국을 건국했다. 독립 선포 13년 뒤에 ‘아메리카합중국’이 건국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정부수립일이 아닌 독립선포일을 건국절로 기념한다. 미국도 독립을 선포할 때는 국민, 영토, 주권이 모두 영국의 지배권에 속했다. 중국에서는 1911년 10월10일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타도되고 중화민국이 선포됐다. 당시 국가의 3대 요소는 군벌에 속해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1일 수립됐지만 10월10일을 쌍십절이라 하여 건국기념일로 기린다.
친일파 후손들과 그 주변 언론·학자들이 한사코 임시정부를 비하하면서 ‘48년 건국절’을 고집하며 이승만을 국부로 치켜세우는 것은 독립운동 역사를 대한민국과 단절시켜야 ‘건국공로자’로 포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민주공화체제를 주도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 헌법을 채택했고, 일제강점기 국내외 독립운동단체 460개의 이념 구성은 민주공화제 국가 건설의 민주지향형 224개(53%), 계급투쟁형 156개(34%), 왕정복고형 37개(8%), 군정추구형 23개(5%)였다.(이달순, <독립운동의 정치사적 연구>)
1946년 7월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정부 형태와 관련해 서울시민은 대의민주주의 85%, 계급지배 5%, 과두제 4%, 1인독재 3% 순으로 응답했고, 농촌 지역에서는 미국식 민주주의 38%, 공산주의 10%, 양자혼합 45%로 나타났다.(전상인, <고개 숙인 수정주의>) 정부 수립 과정에서 제헌의회는 헌법 제1조에 임시정부의 약헌(헌법)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그대로 되살렸다. 이승만의 공이 아니라 제헌의원 198명의 총의이고 국민의 뜻이었다. 헌법을 파전 뒤집듯 한 이승만·박정희·전두환도 감히 이 조항은 손대지 못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정부 수립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1947년 하반기부터 미국의 대한정책이 달라졌다. 유엔총회를 통해 한반도 전체에 걸친 선거를 결정했다가 1948년 2월에는 유엔소총회에서 남한만의 선거를 결의했다. “유엔총회나 소총회의 의견은 미국이 주도한 것으로 이승만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서중석, <역사비평>, 2015 가을호)
1907년 4월 안창호·이회영·신채호 등 선각자들이 신민회를 창설하면서 채택한 민주공화주의는 3·1혁명→임시정부→대한민국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친일·독재 잔재가 다시 주류가 되면서 임시정부와 민주화운동을 심하게 폄훼한다. 3·1혁명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민주공화주의 정신을 되살리고 국민의 힘으로 기념관과 조형물을 세워야 한다. 코앞에 둔 총선에서 친일 부역자 후손, 독재세력을 가려내고 건강한 민족·민주정신을 가진 후보를 선택하여 임시정부 100주년을 보람있게 맞았으면 한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