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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대통령을 위한 변명/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4. 1.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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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오바마 대통령을 위한 변명 / 이용인

등록 :2016-03-31 19:40수정 :2016-03-31 19:48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집권 7년여 동안 수없이 비판적인 기사를 썼다. 주로 대북 정책과 관련된 것이었다. 북한이 ‘스스로 핵 포기를 하겠다’며 백기투항을 하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이른바 ‘전략적 인내’ 정책을 도마에 올렸다. 31일(현지시각) 미-중 정상회담이 끝나면 똑같은 기사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 방문 연설을 보면서, 남북이 스스로 ‘기회의 창’을 닫아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좀 더 크게, 많이 하게 됐다. 그는 쿠바 국민들에게 생중계된 연설에서 “(미국이) 어떤 특정 국가의 변화를 강제할 수 없다”거나 “냉전시대에 고안된 고립정책은 21세기에는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철학이 없었으면 쿠바와의 수교가 불가능했기에, 오바마 대통령의 말에 진정성이 있다고 믿고 싶다.

실제, 오바마 1기와 2기 때의 대외정책은 확연하게 결이 다르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8년 금융위기를 수습하느라 첫 집권 4년을 보냈다. 대외정책의 지휘봉은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에게 넘겼다. 2013년부터 시작된 집권 2기 때는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대외정책을 챙겼다. 이란과의 핵협상 타결, 쿠바와의 관계 정상화가 모두 2기에 이뤄졌다. 불행히도, 그 기간에 남북의 지도자들은 타협을 모르는 외곬의 행보를 보였다.

오바마 행정부가 완력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오바마 대통령만큼 완력을 덜 휘두른 대통령도 드물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한국 가입 여부가 논란이 됐을 때, 미국은 처음에는 반대했다. 하지만 ‘참여를 통한 중국 견제’라는 명분을 한국이 제시하자 ‘은행 시스템의 투명성 확보에 노력해 달라’며 가입을 ‘승인’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해 9월 중국 전승절 행사 참석도 워싱턴 싱크탱크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지만 미 행정부는 박 대통령의 참석을 강하게 말리지는 않았다. 한국 정부는 북한 문제와 관련해 중국의 협조를 이끌어내겠다는 우리 쪽 명분을 미국이 수용했다고 설명했지만, 미 행정부가 이를 믿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가겠다고 하니 유쾌하지는 않지만 알았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명분만 있으면 대미 외교의 공간이 생겼고 완력도 약해졌다. 국제 여론을 동원하면 미국도 크게 압박하고 들어오지 못했다. ‘조폭 수준’으로 한국을 몰아세우던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을 떠올리면 참 편한 외교 상대를 만난 것이다.

미국이 중국 견제라는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북한의 위협을 꽃놀이패로 활용한 것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최소한의 안정적 흐름만 유지했더라도 어느 정도는 방어가 가능했다고 본다. 게다가 아시아재균형 정책은 정책 초기엔 관여와 견제 사이에서 유동성이 상당히 강해, 우리가 하기 나름이었다. 열린 공간을 활용하지 못한 책임은 북한 붕괴 신화에 매달려 북-미 간 중재자 역할을 포기한 박근혜 정권과, 단박 협상으로 승부를 조기에 결정지으려 조급성을 보인 김정은 정권 탓이 크다.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오바마 대통령의 남은 몇 개월 재임 동안 북-미 접촉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뢰의 계기를 찾아 쌓기엔 너무 촉박하다. 단언컨대, 유력한 미국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공화당 쪽의 도널드 트럼프와 테드 크루즈 가운데 누가 미국 대통령이 돼도 이 정도 기회의 창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흘려버린 시간들에 속이 더욱 쓰리다. 지금이라도 남북이 정신 차려야 한다.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yy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