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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06) 이승만 대통령 상대하기

이윤진이카루스 2010. 11. 8. 13:10
[중앙일보] 입력 2010.11.03 01:00 / 수정 2010.11.03 09:23

야당의원이 군 장교 권총 살해, 이승만의 분노는 엉뚱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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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06) 이승만 대통령 상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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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첫 직선으로 대한민국 2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에 있던 임시 경무대 뜰에서 포즈를 취했다. 당시 77세의 이 대통령은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로서 늘 카리스마가 넘쳤다. 사진전문잡지 라이프가 촬영한 사진이다.
전선은 치열한 고지 쟁탈전으로 피에 젖고 있었지만 나는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국군 전투력을 획기적으로 증강하는 작업은 육군참모총장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선 대통령과의 긴밀한 공조, 그리고 미군과의 협조가 필요했고 미국 정가의 결정이 한국에 유리하도록 내려지는 시운(時運)도 잘 맞아떨어져야 했다.

 나는 그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내 앞에 떨어진 것은 그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사안이었다. 내가 육군참모총장으로 부임한 뒤 한 달 남짓 지났을까. 1952년 초가을의 어느 날쯤으로 기억하고 있다.

 신태영 국방부 장관이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다소 급한 목소리로 “상의할 사안이 있으니 빨리 부산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정부는 부산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뭔가 급한 일이 생겼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산 동래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던 신 장관을 찾아갔다. 그는 우선 서류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신 장관은 이어 “민기식 장군이 파면을 당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신 장관이 꺼내 놓은 서류에는 ‘민기식 준장 파면. 가(可), 만(晩)’이라고 써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부분의 서류를 결재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서명이었다. 민기식 준장의 파면을 허락한다는 문서 내용이었고, 맨 끝의 ‘만’은 이승만 대통령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뜻했다. 대통령이 늘 서명하는 방식이었다.

가(可), 만(晩)자(원내)로 된 이승만 대통령의 결재 사인.
 민기식 준장은 당시 ‘서민호 의원 사건’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부산 정치파동’이 벌어지던 무렵에 발생한 사건으로 당시의 언론들이 아주 크게 취급했던 내용이었다. 사회에 미친 영향도 매우 컸다. 사건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52년 4월 24일 야당 국회의원인 서민호 의원이 모 육군 대위를 권총으로 쏴서 사망케 했다. 미국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서 의원은 전남 순천의 어느 요식업소에서 식사를 하다가 옆방에 있던 모 장교와 시비가 붙었다. 거친 다툼이 벌어지는 와중에 서 의원이 권총으로 그 장교를 쏴 버린 것이다. 서 의원은 살인 혐의로 결국 군사재판을 받게 됐다. 당시 부산 일원에는 비상계엄령이 떨어져 있던 상황이어서 서 의원 사건은 당연히 군사법정에서 다뤄졌던 것이다. 서 의원은 상대방이 먼저 총격을 가해와 정당방위 차원에서 응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 의원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하던 인물이었다. 성격이 괄괄했던 서 의원은 전시 중에 벌어진 거창 사건과 군대의 부정으로 적지 않은 장정(壯丁)이 사망한 국민방위군 사건 등 군과 관련 있는 사건의 진상조사에 앞장섰었다. 정치적 공세를 강하게 벌여 이 대통령이 내심으로 매우 불쾌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서민호(1903~74)(左), 민기식(1921~98)(右)
 그런 서 의원에게 군사법정은 비교적 ‘관대한’ 판결을 내렸다. 먼저 최경록·박동균 장군의 심리를 거친 이 사건은 최종적으로 재판장을 맡고 있던 민기식 준장의 손에 넘어갔다. 이 대통령은 마음속으로 서 의원에게 중형(重刑)이 내려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치 공세로 늘 자신을 괴롭히는 서 의원이 전시 계엄하에서 군 장교를 권총으로 사살했으니, 그런 이 대통령의 기대는 과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민 준장은 서 의원에게 ‘징역 8년형’을 선고했다. 이 대통령의 노기(怒氣)가 대단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불쾌함을 결코 감추려 들지 않았던 대통령이었다. 이 대통령은 결국 ‘민기식 준장 파면’이라는 극약 처방을 선택했던 것이다.

 아주 중대한 사안을 두고 결단을 내리는 이 대통령을 나는 자주 옆에서 지켜봤다. 그는 결코 무리수를 함부로 두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권위가 손상을 받는 것에는 매우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만큼 지식도 당시의 한국 고위층 인사를 압도했고, 배움 또한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연령 또한 당시의 내각을 통틀어 최고령에 해당하는 ‘어른’이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서 반대 입장을 개진해 대통령의 뜻을 돌리는 일은 몹시 어려웠다. 민 준장 파면 소식을 접했던 주무 장관인 신태영 국방부 장관이 나를 불러 ‘어떻게든 좀 해 보라’는 식으로 상의를 해 왔던 것이다. 난감했다. 군 장성의 인사권자는 대통령이었다. 더구나 이미 대통령이 직접 서명한 문서가 국방부 장관 책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신 장관에게 “이미 결재가 난 사안인데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 장관은 군 장성을 이런 식으로 파면 조치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마음을 되돌리는 게 마땅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누가 다느냐가 문제였다.

 신 장관은 “그래도 어떻게 좀 조치를 취해 보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머릿속으로 곰곰이 이 사안을 다시 정리해 봤다. 하급 지휘관도 아닌, 장군의 옷을 벗기는 일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적과 치열한 고지전을 벌이는 전시(戰時)였다. 휴전회담이 이어지고 있지만 결코 낙관은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언제든지 전선이 요동치면서 다시 확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어 대비를 소홀히 할 수 없는 때이기도 했다.

 육군참모총장의 입장에서 봐도 전시 중에 그렇게 합당하지 않은 이유로 고급 지휘관을 군문에서 내쫓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민 준장은 개전 초부터 착실하게 전투에 임하면서 적지 않은 전과를 쌓은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설 상황이었다.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설득하기로 했다. 마침 대통령은 부산에 머물고 있지 않았다. 정부는 부산에 있었지만, 다양한 업무 때문에 대통령은 가끔 서울에 가 있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통령이 머물고 있던 서울의 경무대로 향했다.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