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Life)

미움이 사랑이 될 때 복수는 끝나더라/ 조용모 목사/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4. 27. 21:45

사회종교

복수는 나의 힘, 다만 미움이 사랑이 될 때까지

등록 :2016-04-26 19:52수정 :2016-04-27 11:21

 

조용모 목사(왼쪽)가 노숙인을 위해 빨간 밥차에서 급식 봉사를 하고 있다.
조용모 목사(왼쪽)가 노숙인을 위해 빨간 밥차에서 급식 봉사를 하고 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조용모 목사
달빛이 비스듬하게 바다 위를 비춘다. 파도는 방파제를 세게 때린다. 가슴에 품었던 10개의 표창을 하나씩 꺼내 바다 위에 내던졌다. 그동안 품었던 표창의 독기가 허허롭게만 느껴졌다. 긴 세월 복수를 꿈꾸던 표창이었다. 하루아침에 자신을 불구자로 만들고 인생의 꿈조차 날려버린 원수를 만났지만, 차마 그의 가슴에 표창을 날릴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죄를 받았다. 굳이 표창을 쓸 필요도 없었다. 폐인이 된 그는 쓰레기가 널려 있는 방에서 술에 취해 쓰러져 있었다. 아내는 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오래전에 가출했고,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두 아이는 겁에 질려 그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꿈꾸던 복수의 순간이 왔지만 그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치고 달아난 뺑소니 운전사는 그렇게 죗값을 치르고 있었다.

뺑소니 사고로 외발이 됐다
표창을 만들어 독기를 품었다
마침내 원수를 만났으나
그는 이미 죗값을 치르고 있었다

회사서 잘려 술로 지내다 노숙 2년
지쳐 고향에 가 수면제 털어넣었지만
죽는 것도 맘대로 안됐다

악착같이 살기로 했다
110번째 도전 끝에 보험회사 들어가
보험왕이 되고 명강사도 됐지만
우울증이 찾아왔다

다시 자살을 꿈꾸다 신학을 공부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시 덮쳤다
편도암 4기
지옥 같은 항암제·방사선·수술…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일주일에 한번씩 노숙인 무료급식

목발로 면접장 들어서니 “지금 장난해?”

조용모 목사는 세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 예순이 넘은 나이에 목사가 됐다. 보험왕과 명강사를 거쳐 목사가 된 그는 자신을 장애자로 만든 뺑소니 운전자를 용서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한다.
조용모 목사는 세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 예순이 넘은 나이에 목사가 됐다. 보험왕과 명강사를 거쳐 목사가 된 그는 자신을 장애자로 만든 뺑소니 운전자를 용서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한다.
그날은 야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스물일곱의 나이였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검정고시를 치러 대학까지 나오고 취직도 했다. 사법고시를 목표로 공부도 하고 있었다. 하숙집이 보이는 골목에서 그는 차에 치였다. 공중에 붕 떴다가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그를 그냥 두고 차는 사라졌다. 과다출혈로 사선을 넘나들다 간신히 목숨은 구했지만 오른발은 제구실을 못했다. 차마 고향집에는 교통사고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회사에서는 퇴직금을 주며 나가달라고 했다. 유일한 도피처는 술이었다. 하루에 소주 7~8병을 마셨다. 노숙인이 됐다. 영등포역에서 걸식을 하며 2년을 살았다.

걸인 생활에 지쳐 집으로 갔다. 서울에서 번듯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줄 알았던 아들이 목발을 짚고 나타나자 어머니는 혼절했다. 술에 취해 시간을 보냈다. 대장간에 가서 표창을 주문했다. 그리고 표창을 던지는 연습을 했다. 언젠가는 만날 뺑소니 운전자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표창을 던졌고, 목표물에 정확히 박혔다. 그러나 점차 지쳐갔다. 수면제 82알을 한꺼번에 입에 털어넣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식구들이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으나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다. 3일 만에 깨어났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됐다. 악착같이 살기로 마음먹었다.

지체장애 3급에 목발을 짚고 다니니 취직도 어려웠다. 109번째 넣은 보험회사 영업소장직에 면접 보러 갔다. 면접관이 목발 짚고 면접장에 들어선 그를 보고 짜증을 냈다.

“누가 이런 사람 서류 받았어? 빨리 내보내고 다음 사람 들여보내. 지금 장난해?” 면접관은 그의 입사 서류를 구겨서 바닥에 던졌다. 그는 분노를 누르며 면접관을 향해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저는 서류심사에 합격해 면접을 보러 왔습니다. 이 세상에 장애인이 되고 싶어서 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부장님께서는 제 이름을 꼭 기억하십시오. 오늘을 후회할 날이 올 겁니다.”

슈퍼마켓 여주인의 15년 전 목격담

마침내 110번째 도전한 손해보험회사 대리점에 취직했다. 자전거를 익혔다. 한쪽 다리로만 자전거를 타니 수없이 쓰러지고 다쳤다. 마침내 익숙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매일 아침, 명함 50장과 도시락 2개를 들고 자전거를 타고 출근했다. 교통사고가 난 곳엔 현장에 가서 최선을 다해 해결했다. ‘외다리 보험사’는 3년 반 만에 보험왕이 됐다. 그는 “제가 교통사고를 당해보니까 알게 됐어요. 뭐가 필요한지를.” 여러 보험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장애인이라고 이력서를 팽개치던 보험사에서도 오라고 했다. 그 회사에 스카우트됐다. 면접관은 그에게 사과했다.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그는 고마운 마음이 생겼다. “그때 저를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계기가 됐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지점장 자리를 주지 않았다. 경쟁 보험회사로 옮겼다. 특유의 영업 능력을 발휘해 승승장구했다. 뺑소니 사고가 난 지 15년이 흘렀다. 옛 친구와 만나 사고가 난 지점 근처의 슈퍼마켓에서 맥주를 한잔했다. 슈퍼마켓 여주인이 물었다. “다리가 어쩌다 그렇게 됐나요?” 그가 15년 전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고 하니 여주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곤 “사실 제가 그날 사고 현장을 목격했어요. 근처 국수공장 차가 사고를 내고 도주했어요. 차마 한동네 사람이 사고를 내 경찰에 알려주지 못했어요. 미안해요.”

그는 국수공장에 가서 당시 운전기사의 주소를 알아내고, 택시를 대절해 목포까지 갔다. 하지만 이미 그 운전기사는 폐인이 된 상태였다. 그 운전기사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 때문에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사람입니다. 이제 당신을 용서하기로 했으니, 이제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마지막날까지 사람답게 살다 가시오.” 그리고 아이들에게 생활비도 부쳐주었다. 용서를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보험왕에서 명강사로 변신해 이름을 날렸다. 10년 동안 기업체 6천여곳에서 강연을 했다. 역경을 딛고 일어난 그의 인생 스토리는 책으로 엮였고 베스트셀러가 됐다. 돈도 벌고 유명해졌으나 심한 우울증이 왔다. 다시 자살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던 그는 60살을 앞두고 신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늦은 나이에 신학대학에 편입해 공부를 시작했다. 우울증은 사라졌다. 성경 공부에 한창이던 그에게 다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몸이 계속 피곤하고 목이 자주 잠겨서 병원에 갔다. 편도암 4기라는 통보를 받았다. 거의 사형선고였다.

“내가 1등 하는 동안 다른 이는 큰 피해”

다행히 전이는 안 됐다. 수술 후 방사선치료를 했다. 치료받는 동안 입과 목이 타서 물 한모금 마시기 어려웠다. 차라리 먹는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성경 공부를 놓지 않았다.

목사가 됐다. 이제 2년차. 암 수술의 후유증도 거의 사라졌다. 대형교회에서 부흥회도 인도했다.

“늘 불안했어요. 1등을 하고, 1등을 지키려고 그러니 마음에 안식이 없었어요. 이제는 알았어요. 제가 1등을 하는 동안 큰 피해를 본 이들이 있다는 것을….”

조용모(63) 목사는 자신이 보험왕을 하며 박수를 받을 때 경쟁사에 있던 6명이 사표를 써야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이제라도 용서를 빌 것입니다. 사랑하기도 바쁜 날인데 미워하며 살면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최근 자신의 인생을 담은 에세이집 <고난 수업>(다산북스)을 펴낸 조 목사는 일주일에 한번씩 불편한 몸을 이끌고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 행사에 나선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지난날의 지독한 절망을 이야기한다. “저는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인천 부평/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