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Life)

기세춘의 묵자론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7. 7. 22:52

문화학술

“프란치스코 교황 가르침과 묵자 천제론 일맥상통”

등록 :2016-07-06 19:04수정 :2016-07-06 20:29

 

[짬] 동양고전 저술가 기세춘 선생

기세춘 선생
기세춘 선생

동양고전 저술가이자 재야 운동가인 기세춘(81) 선생은 5년 전 전립선암 판정을 받았다. 그 뒤 출판사들과 맺었던 출간 계약을 해지하고 의사 권고에 따라 술, 담배도 줄였다. 다행히 암세포는 번지지 않았다. 지금은 걷기 불편한 것을 제외하고는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다. 지난 5년 병마와 싸우면서도 놓지 않은 일이 있다. 다산 정약용의 주역 해석을 토대로 자신이 14년 전 쓴 주역 저술의 개정판을 내는 일이다. 최근 3천장이 넘는 원고를 마무리하고 출간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9일 중국 산둥성 등주에서 열리는 국제묵자학술대회에서 기조발제도 할 예정이다. 기 선생을 지난달 28일 대전 자택에서 만났다.

그의 호는 묵점이다. 중국 고대 사상가 묵자와 고향인 전북 정읍 먹점마을에서 한 자씩 땄다. 그는 1992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묵자를 완역 출판했다. 고 신영복 교수는 묵자를 두고 “반전, 평화, 평등 사상을 주장하고 실천한 기층 민중 출신의 좌파 사상가”라고 썼다. 묵가 사상의 핵심은 겸애와 교리다. 모두를 차별없이 사랑하고, 서로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묵자는 유교가 예와 악을 과도하게 중시해 민중의 삶을 힘들게 한다고 공격했다. 유교적 질서가 충만한 조선에서 묵자가 이단 중의 이단이 된 이유다. 묵가는 중국 전국시대만 해도 유가와 쌍벽을 이뤘지만 기원전 1세기 이후 유교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2천년 뒤인 1894년 청나라 학자 손이양이 <묵자한고>를 펴낸 뒤에야 묵자의 사유가 다시 실체를 드러냈다. 이 땅에선 묵자 완역본이 나오기까지 100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는 11회째인 이번 학술대회를 위해 두 개의 글을 준비했다. 기조발제에선 ‘묵자의 경제사상과 자본주의’, 10일 분임토론에서 ‘묵자는 기독교 개혁의 불씨일까’란 제목의 글을 발표한다. 동양철학을 두루 섭렵한 그이지만 기독교와의 인연도 깊다. 전주사범학교에 다닐 땐 목사를 꿈꾸며 기독학생회 회장을 지냈다. 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할머니와 어머니를 위해 고향 마을에 교회당을 짓기도 했다. 고 문익환, 홍근수 목사와 함께 <묵자와 예수>란 책을 쓰기도 했다.

이번 발표에서 묵자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유사성을 밝히고, 기독교가 ‘포악한 전쟁의 신’ 야훼와 결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칠 생각이다. “종교와 이념과 경제체제의 모든 근본주의를 경계하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에 전세계 지도자들이 화답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할 예정이다.

“묵자는 어록에서 천제를 300여차례나 언급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천제의 자식이므로 천제는 천하 만민을 자애하고 차별하지 않는다는 게 묵자의 평등 사상이죠. 예수의 산상수훈을 읽을 때마다 묵자의 말로 착각할 정도로 감명을 받습니다.”

9일 등주 ‘국제묵자대회’ 기조발제
원고에 ‘교황의 북한 방문’ 희망
중국쪽 ‘수정요청’ 등 민감 반응

14년 전 ‘주역 해설서’ 스스로 절판
“다산의 새로운 해석 알고 자괴감”
개정판 전자출판해 무료공개 검토

그는 기독교 문명의 뿌리엔 전쟁신 야훼가 있다고 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정치적 의도로 예수를 전쟁신 야훼의 아들로 만들었어요. 야훼는 예수가 믿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제국주의 패권국가와 전쟁신의 결합은 ‘평화의 사도’ 예수의 바람과는 반대로 세상을 약육강식 전쟁터로 만들었다고 했다. 십자군 전쟁이나 히틀러의 광기, 세계화의 폐해 등이 그 보기라고 했다.

“해방신학자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혁명으로 군산종 복합체에 균열이 생기고 있어요. 교황의 가르침은 묵자의 천제론과 일치합니다. 인류가 살려면 열린 사고가 필요합니다. 묵자는 다름이 있어야 같음이 있다고 했죠.”

기세춘 선생이 최근 다산 정약용의 주역 해석을 바탕으로 탈고한 주역 저술 초고.
기세춘 선생이 최근 다산 정약용의 주역 해석을 바탕으로 탈고한 주역 저술 초고.
국제묵자학술대회는 2년에 한번씩 열린다. 한·중을 비롯 미국과 독일, 일본, 대만, 홍콩 등의 학자들이 참석한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에서 ‘좌파 사상가’ 묵자는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중국에서 묵자는 반전평화 사상가라기보다는 무기를 만든 기술자로 추앙받고 있어요. 중국 학술계도 우리와 비슷하게 정치 영향을 받지요. 기술만 너무 강조해 기분이 나빠서 10회 땐 불참했어요.” 묵자는 전쟁은 결코 이익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무기를 만들어 방어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런 반전 평화 사상은 빼고 ‘기술의 비조’란 점만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중국 묵자학회는 묵자와 동시대에 공격무기를 만든 공수반을 조명하는 학회와 공동으로 국제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중국 쪽은 이번 기조발제에 포함된 ‘인민 통제를 벗어난 자본주의 비판’, ‘교황의 북한 방문 요청’ 대목 등도 수정해줄 것을 요청해왔어요. 다른 건 몰라도 교황 방북 건은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2002년 주역 해설서를 출간한 뒤 1년 뒤 절판시켰다. 다산의 주역 해석(주역사전)이 그가 권위를 의심하지 않았던 북송 유학자 정이와 주희의 해석과 다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산의 주역 해석을 접한 뒤 “자괴감에 며칠 동안 멍때리기에 빠졌다”고 했다. “정이와 주희는 주 문왕과 주공의 말씀을 봉건왕조에 맞게 의리(義理)학으로 풉니다. 다산은 의리를 떠나 문왕과 주공의 생각을 형상으로만, 즉 도그마가 없는 상징으로만 해석합니다.” 첫 권은 정이와 주희, 다산의 주석을 배치하고 둘째 권은 주역점을 치는 사전으로 꾸밀 생각이다. “다산의 주역을 널리 알리기 위해 책을 전자책으로 무료 공개하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어요.”

대전/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