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Life)

연세대 안병영 교수의 퇴임 후 생활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6. 30. 22:04

사회교육

“일·보람 몰두 40년 접고 자연 더불어 3모작 실험중”

등록 :2016-06-30 09:59수정 :2016-06-30 10:20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
[짬] 첫 수필집 펴낸 안병영 명예교수
“이제 노년에 들어 외진 시골에서 ‘인생 3모작’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요즘 자신의 나이에 “스스로 깜짝 놀라곤 한다”는 안병영(75·사진) 연세대 명예교수가 얼마 전 <기억 속의 보좌 신부님>(흰물결 펴냄)을 출간했다. 지난해에도 <왜 오스트리아 모델인가>를 내는 등 전공분야(정치학·행정학) 중심으로 여러 권의 책을 쓴 안 교수이지만 “에세이집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10년 전 35년 동안 교수로 재직한 연세대에서 정년퇴임한 뒤 속초로 내려갔다가 지금은 설악산 울산바위가 멀리 바라보이는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서 8년째 농사를 지으며 글을 읽고 써왔다. 김영삼, 노무현 두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낸 안 교수는 “글 쓸 때가 즐겁다”고 했다. 인생 3모작을 “실험하고 있다”는 말에서도 느낄 수 있듯, 여전히 원기왕성하고 생각 많고 사려 깊은 낙관주의자였다. 그를 지난 24일 전화로 만났다. 한승동 선임기자

YS·노무현 정부서 교육부 장관
고성서 8년째 주경야독 글쓰기
300평에 앵두·오디·꽃밭도 꾸며

인생길 진솔한 감동 일화 담은
‘기억 속의 보좌신부님’ 펴내
“초당적 미래교육위 창설 제안”

“이곳, 저만치 떨어진 변방에서, 자연에 기대어 빈 마음으로 큰 세상을 바라봅니다. 멀리서 내다보는 나라 안팎의 세상은 늘 그랬듯이 어지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제가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 역사는 간혹 비틀거리고 머뭇거리며 한 걸음씩 전진한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한 믿음과 열망마저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 민족은 그동안 고단한 몸을 이끌고 오늘 여기까지 당도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현실의 온갖 질곡과 좌절 속에서도 따뜻한 눈으로 미래를 조망하는 편입니다.”

늦봄부터 초여름엔 앵두·오디·보리수·블루베리·체리, 한여름엔 참외와 수박, 그리고 가을에는 대추와 감을 심는다. “300평 정도 되는데, 힘들고 벅차서 채마밭 50여평을 남기고 나머지는 과일나무를 심었어요. 잔디도 좀 심고 뒤뜰엔 꽃밭도 꾸몄죠.” 인터뷰를 사양하며 책만 봐달라던 안 교수는 채마밭 얘기에 입을 열었다. “산 땅은 300평이지만 손 가는 건 500평이나 됩니다. 이곳과 인연은 따로 없었고, 그저 산과 물이 좋아 왔어요. 4월부터 9월까지 농사짓고, 농한기인 10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는 글을 읽고 쓸 수 있어요. 자연의 품속에서 혼자 생각하고, 책 보고 글 쓰며, 또 혼자 산책하고, 땀 흘려 일하는 게 즐겁고 행복합니다.” 이 일 저 일 혼자 걱정할 때도 많고, 가끔 기도도 한다며 “세상 잘되라고 하기보다는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했다.

1951년 처참했던 전쟁 한복판, 열한살 나이에 서울에서 대구로 피난 가서 “신문도 팔고, 어머니 바느질감을 받으러 중앙로 뒷골목을 서성거리기도 했던” 어리숙하고 모든 게 낯설기만 했던 그를 “사랑의 묘약”으로 올바른 길로 이끌었던 대구 계산동 성당과 그곳 보좌 신부님. ‘보좌 신부님과의 그 감동적인 순간의 기억은 시간과 더불어 계속 미화되어 내 가슴에 남겨졌다. 그러나 그 젊고 인자하신 보좌 신부님 눈에서 반짝이던 눈물은 나에게 아직도 더할 수 없이 숙연한 감동을 자아내고 하느님 사랑의 유현(幽玄)한 깊이를 되새기게 한다. 열한살 소년이 겪은 고달픈 피난 시절의 온갖 체험은 바로 그 순간 속에서 밝고 행복하게 승화된 것이다.’ 세월과 함께 그 이름조차 잊어버렸던 그 신부님이 누구였는지 30여년 뒤 우여곡절 끝에 알아내고 편지로 서로 만나자고 했지만 끝내 지킬 수 없었던 그 약속.

사연을 전하는 안 교수의 글솜씨가 놀랍다. 혜화동 성당 유치원 다닐 적 같은 반 소녀와의 수채화 같은 기억의 한 조각을 담은 이 책 첫 번째 글 ‘내 머리에 사뿐히 손수건을’은 황순원 <소나기>의 감동을 떠올리게 한다. 1965년에 떠난 오스트리아 빈 유학 시절, 포항제철소가 문을 열기 전 포철의 파트너였던 오스트리아 페스트(Voest) 제철소 회장과의 극적인 만남을 회고한 ‘제철소로 간 유학생’, 연세대 학보 <연세춘추> 기자들이 4·19혁명 직후 벌이려던 ‘민족의 어머니 찾기’ 캠페인의 주인공이 될 뻔한 어머니의 얘기를 담은 ‘어머니와 4·19’…. 빈 유학 마지막 관문인 현지의 독일어 구두시험을 “책을 읽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으나 말하기는 입도 떼지 못하는 수준”이었던 그가 단 일주일 만에 ‘우수’ 성적으로 통과하는 기적을 만들어낸 기발한 아이디어와 노력을 전하는 글은 짧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감동을 주는 것은 글재주가 아니라 지난 일을 되새김질하는 진지한 자세와 진정성이다.

책에 담긴 여러 글들은 그의 블로그 ‘현강재’(玄岡齋)에서 골라낸 것이다. 현강재는 지금 살고 있는 집 이름이기도 하다. 현강은 그의 호이다.

안 교수는 평균수명이 늘고 저출산인 우리 사회가 정년을 십수년은 더 늦춰야 한다고 본다. 젊은층의 취업 시기도 지금보다 몇년 앞당겨, 취업 뒤 55살까지 약 30년간 “일 중심”의 첫 번째 못자리를 지킨 다음, “보람” 중심의 두 번째 못자리에서 10여년 “질적으로 다른 직역에서 새로운 일”을 한다. 세 번째 못자리는 그 뒤에 이어질 10여년의 여생으로, “자연 회귀 내지 자아 찾기 중심”이다. 3모작론의 골격이다.

세 번째 못자리로 들어서고 있는 동년배들에게 안 교수는 “도시를 떠나 자연과 더불어 하는 삶”을 권한다. 젊은이들에게 “아무리 어려워도 멀리 보라”고 했고, “힘들지만 낙관하라, 위기를 기회로 삼아라”고 한 그의 얘기는 자신의 직접 체험이라는 무게를 싣고 있다. 교육계에 조언을 해달라는 ‘강권’에 못 이겨 그는 “한 나라의 교육정책이 정권의 이념적 성향이나 정치적 입맛에 따라 수시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며 딱 한마디했다.

“주요한 교육정책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구하기 위한 대타협기구로 ‘미래한국교육위원회’의 창설을 제안합니다. 초당파적 협의체로, 미래 한국 교육의 비전과 거시적 정책 방향, 그리고 주요한 정책 쟁점에 대해 장기간 집중 토의를 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협력적 거버넌스 체제이죠. 정권의 수명을 넘어서기 위해 위원회의 임기를 9년으로 잡아, 3년 임기의 위원을 3분의 1씩 바꿔나가는 것이 어떨까요.”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