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열린 박근혜 대통령의 언론 간담회는 실망스럽다기보다 당혹스러웠다. 사람이란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니까, 총선 패배를 계기로 국정운영 기조를 확 바꿀 거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러나 집권여당이 제2당으로 추락할 정도의 참패를 당했다면 뭔가 그런 민심에 화답하는 형식적인 언급이라도 나올 줄 알았다. 대통령이 되기 전엔 누구보다 여론의 속성에 정통했던 ‘선거의 여왕’이 아니던가.대통령은 그렇게 하질 않았다. 2시간 넘게 간담회에서 한 장황한 발언은 딱 두 줄로 요약할 수 있다. “20대 국회가 민생을 챙기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새로운 국회가 되길 바란다. 국민의 이런 요구가 총선 결과에 나타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선거 다음날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이 냈던, ‘겸허히 민심을 받들겠다’는 상투적 표현조차 없느냐고 호된 비판을 받았던 바로 그 논평이다. 총선 결과는 여야와 국회에 대한 심판이지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건 아니라는 믿음이다. 언론 간담회는 이게 박 대통령의 진심이란 걸 새삼 확인시켜줬을 뿐이다. 새누리당의 어느 국회의원은 이런 말을 했다. “선거 직후 청와대 대변인이 낸 논평을 보면서 대통령이 직접 불러준 걸 받아적은 거라고 확신했다. 박 대통령은 당 대표를 하실 때도 대변인 논평의 토씨 하나하나까지 직접 바꾸곤 했다. 언론사 편집·보도국장들과 만난다고 달라질 일은 없다.”정말 궁금한 건 다른 데 있다. 자신의 현실인식이 세상과 정반대라는 사실을 박 대통령은 알고 있는지, 아는데도 그런 인식을 바꾸려 하질 않는 것인지 하는 점이다. 이번 총선이 대통령의 아집과 독선, 오만과 독주에 대한 심판이라는 건 여당인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까지 모두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식물국회라는 보도도 봤지만 그런 국회에 변화와 개혁이 있어야겠다는 게 (총선에서 나타난) 민의인 것 같다”고 엉뚱하게 해석했다. 자존심을 지키려는 힘겨운 고집일까, 아니면 대통령은 정말 그렇게 믿는 걸까.비교적 박 대통령을 잘 안다는 여권 인사 몇 명에게 물었다. “대통령의 현실인식이 국민과 너무 괴리돼 있는데 이건 구중궁궐이라 불리는 청와대에 혼자 외롭게 있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인가.” 이들의 대답은 비슷했다. 한 인사는 “대통령이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데…, 과거에도 좀 그랬다. 그게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 더 심해진 거 같다. 사람들과 더 만나지 않고 참모들도 직언하지 못하는 분위기이니…. 아무튼 예전에도 그런(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을 하는) 경향은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인사는 “청와대 들어가기 전에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건 박 대통령이 포장을 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후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속마음이 여과 없이 나오는 것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박 대통령의 사고 패턴은 똑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일반 국민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대통령을 뽑았고, 그런 대통령의 통치를 3년간 지켜봤다. 이제 와서 누굴 탓하기도 힘들다.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하지 않았다면 아마 집권 5년 내내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다. 걱정인 건 앞으로 남은 2년이다. 그나마 이제까진 국회 다수당인 여당 도움을 받아 그런대로 대통령 마음대로 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소야대 국회에선 다르다. 사사건건 제동이 걸릴 수 있다. 그때 대통령은 그걸 참고, 기다리고, 타협할 수 있을까. 거기다 여당까지 말을 듣지 않는다면? 해답은 없이 이래저래 근심만 깊어간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박찬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