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꽃의 존재를 증명하는 건 간단하다. 꽃이 밟힐 때 사람들은 화를 낸다는 점이다.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도, 직장에서도 우리는 종종 서로의 꽃밭을 밟고 밟힌다. 일상에서 사람 마음속의 꽃을 보지 못하고 살다가 누군가 화를 내면 뒤늦게 깨닫곤 한다.
정치의 차원이라고 다를 바 없다. 저 꽃들에 헌법이 붙여준 이름은 존엄성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가 정치의 외형을 규정짓는다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는 헌법 제10조는 그 내용을 채운다. 이어지는 27개의 조항으로 그 꽃들의 이름이 나열된다. 우리는 자유로워야 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되고, 행복을 추구할 조건을 다 함께 보장받아야 한다. 그게 모조리 짓뭉개지고 뽑혀나간 3년이었다. 일일이 나열하는 게 부질없다.
존엄성의 가장 확실한 존재 증명 역시 분노다. 존엄성이 부정당했을 때 불붙는 정치적 감정, 즉 ‘민주주의적 분개’(닉 브로멀 미국 매사추세츠 애머스트대학 교수)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분노할 줄 모를 거라 생각했다는 점이다. 시민의 자존과 존엄을 짓밟는 정권의 폭정을 비판하면서도 은연중 시민들은 그저 묵묵히 인내하고 말 것이라고 예단했다. 여왕의 마법에 걸린 백성처럼 가만히 있으리라 여겼다. 그렇게 ‘종신 여왕’이 탄생할지도 모른다고, 겁 많은 어린아이처럼 비관했다. 예측하지 못한 선거 결과를 대면하며 가장 부끄럽고 뼈아픈 대목이다. 사람들 마음속의 싱싱한 꽃가지들을 보지 못했다.
총선 이후 ‘표적집단 심층좌담’(FGD)을 통해 그 분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새누리당 지지층이었던 시민들도 세월호를 이야기했고, 테러방지법에 떨었으며, 증세 없는 복지를 비웃었다. 이를테면 세월호에 대한 핍박은 유족뿐만 아니라 함께 슬퍼한 우리 모두의 존엄을 할퀴었고, 그 ‘우리’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우리’를 품고 있었다. 거리의 시민운동가뿐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도 프라이버시라는 자유민주적 가치가 훼손되는 데 공분했다. ‘헬조선’에 신음하는 청년들과 그 부모 세대,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이 나라에서 인간의 존엄을 잃은 지 오래다. 자유·평등·행복을 갈망하는 시민들은 기득권의 세계에 파묻혀 전제군주처럼 변해가는 대통령의 ‘존영’과 통치 시스템에 불같이 화내고 있었다. 그 권력에 맞서지 못한 야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역사를 보면 민주주의는 가장 암울한 시기를 돌파했고, 영속할 것 같던 독재도 그 정점에서 무너졌다. 아는 체하는 이들이 지레 포기하고 절망할 때 군중은 그 나약함을 질타하며 존엄한 존재의 위엄을 보여줬다. 짓밟힐수록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저 꽃들을 보며 정치는 존엄성의 지배 영역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박근혜 대통령처럼 선거 결과를 달리 해석하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존엄성의 정치’로 나아가지 않는 정치세력은 다음 선거에서도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나는 부끄러움 속에서 확신하게 됐다.
박용현 정치 에디터 piao@hani.co.kr
박용현 정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