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국민의 존엄성을 무시하면 망한다/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4. 28. 21:16

사설.칼럼칼럼

[편집국에서] 존엄성의 정치 / 박용현

등록 :2016-04-27 20:03수정 :2016-04-27 21:59

 

눈길 돌리는 곳마다 꽃밭이요 밤마저 꽃으로 환한 이 계절을 통과하며 그 아름다움에 취하면서도 정작 사람들이 품고 있는 꽃은 보지 못하고 살았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속에 꽃밭을 가꾸며 산다.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길 어귀에 피던 꽃, 빛나던 시절 누군가에게 선물받았던 꽃들이 거기에서 자라고 있다. 미래에 대한 꿈도 투명한 꽃으로 심어져 있다. 아직 피지 못했든, 이미 시들었든 그 꽃들은 과거·현재·미래 삶의 응축물이고 인간에게만 허용된, 결코 양도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그 무엇이다. 그걸 우리는 자존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꽃의 존재를 증명하는 건 간단하다. 꽃이 밟힐 때 사람들은 화를 낸다는 점이다.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도, 직장에서도 우리는 종종 서로의 꽃밭을 밟고 밟힌다. 일상에서 사람 마음속의 꽃을 보지 못하고 살다가 누군가 화를 내면 뒤늦게 깨닫곤 한다.

정치의 차원이라고 다를 바 없다. 저 꽃들에 헌법이 붙여준 이름은 존엄성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가 정치의 외형을 규정짓는다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는 헌법 제10조는 그 내용을 채운다. 이어지는 27개의 조항으로 그 꽃들의 이름이 나열된다. 우리는 자유로워야 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되고, 행복을 추구할 조건을 다 함께 보장받아야 한다. 그게 모조리 짓뭉개지고 뽑혀나간 3년이었다. 일일이 나열하는 게 부질없다.

존엄성의 가장 확실한 존재 증명 역시 분노다. 존엄성이 부정당했을 때 불붙는 정치적 감정, 즉 ‘민주주의적 분개’(닉 브로멀 미국 매사추세츠 애머스트대학 교수)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분노할 줄 모를 거라 생각했다는 점이다. 시민의 자존과 존엄을 짓밟는 정권의 폭정을 비판하면서도 은연중 시민들은 그저 묵묵히 인내하고 말 것이라고 예단했다. 여왕의 마법에 걸린 백성처럼 가만히 있으리라 여겼다. 그렇게 ‘종신 여왕’이 탄생할지도 모른다고, 겁 많은 어린아이처럼 비관했다. 예측하지 못한 선거 결과를 대면하며 가장 부끄럽고 뼈아픈 대목이다. 사람들 마음속의 싱싱한 꽃가지들을 보지 못했다.

총선 이후 ‘표적집단 심층좌담’(FGD)을 통해 그 분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새누리당 지지층이었던 시민들도 세월호를 이야기했고, 테러방지법에 떨었으며, 증세 없는 복지를 비웃었다. 이를테면 세월호에 대한 핍박은 유족뿐만 아니라 함께 슬퍼한 우리 모두의 존엄을 할퀴었고, 그 ‘우리’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우리’를 품고 있었다. 거리의 시민운동가뿐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도 프라이버시라는 자유민주적 가치가 훼손되는 데 공분했다. ‘헬조선’에 신음하는 청년들과 그 부모 세대,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이 나라에서 인간의 존엄을 잃은 지 오래다. 자유·평등·행복을 갈망하는 시민들은 기득권의 세계에 파묻혀 전제군주처럼 변해가는 대통령의 ‘존영’과 통치 시스템에 불같이 화내고 있었다. 그 권력에 맞서지 못한 야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역사를 보면 민주주의는 가장 암울한 시기를 돌파했고, 영속할 것 같던 독재도 그 정점에서 무너졌다. 아는 체하는 이들이 지레 포기하고 절망할 때 군중은 그 나약함을 질타하며 존엄한 존재의 위엄을 보여줬다. 짓밟힐수록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저 꽃들을 보며 정치는 존엄성의 지배 영역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박용현 정치 에디터
박용현 정치 에디터
박근혜 대통령처럼 선거 결과를 달리 해석하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존엄성의 정치’로 나아가지 않는 정치세력은 다음 선거에서도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나는 부끄러움 속에서 확신하게 됐다.

박용현 정치 에디터 pi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