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월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이래 87년 6월까지 2년 4개월 동안 이희호와 김대중은 55차례 동교동에서 가택연금을 당했다. 87년 4월부터는 직계가족만 출입이 가능했다. 5월1일 통일민주당 창당대회 참석도 막히자, 비서 김옥두(오른쪽)와 남궁진(왼쪽)이 이불 홑청으로 만든 천에 ‘김대중 선생 불법감금 해제하라’고 쓴 현수막과 태극기를 들고 동교동 지붕 위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7년 4월 이후 동교동의 김대중·이희호 집은 직계가족 외에 외부인은 아예 출입할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 집을 ‘동교동 교도소’라고 불렀지요.” 동교동 비서들도 한번 집 밖으로 나가면 다시 들어오지 못했다. 김옥두와 남궁진 두 사람만 끝까지 동교동에 남았다. 5월1일 통일민주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동교동 집 밖 큰길에서 당원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사모님, 광목천 같은 것이 없을까요?” 김옥두가 이희호에게 물었다. “나는 낡은 이불 홑청을 뜯어서 주었어요. 그랬더니 김옥두 비서와 남궁진 비서가 집에 있던 사인펜을 모두 모아 커다랗게 글씨를 써서 플래카드를 만들었지요.”김옥두와 남궁진은 ‘김대중 선생 불법감금 해제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두 사람은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태극기를 흔들며 “김대중 선생 불법감금 즉각 해제하라!”고 외쳤다. 밖에서 시위를 벌이는 동지들에게 응답하는 ‘지붕 위 시위’였다. 지붕 위 시위가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되자 동교동 진입로 입구 초소에서 소형 스피커를 든 경찰이 경고방송을 했다. 빨리 내려오지 않으면 집시법 위반으로 체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희호는 참지 못하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무고한 사람을 집에 가둬 법을 어긴 사람이 누굽니까?” 이희호의 강력한 항의에 경찰은 경고방송을 중단했다.1987년 4월부터 또다시 가택연금 시작
5월1일 통일민주당 창당대회도 못 가
이불홑청 현수막 만들어 지붕위 시위
외신 기자 사진으로 ‘감금’ 세계에 알려 안기부 요원들 이웃집 상주하며 도청
라디오 소리 높인채 대화·책받침 필담
밤이면 자정 넘어 ‘괴전화’로 협박도 ‘5·18’ 7돌 추모미사 ‘박종철 고문’ 폭로
‘이한열 사건’에 6·10 시민항쟁 ‘폭발’
6월 중순 또다시 ‘김대중 체포’ 소문
“청와대 파견 장교가 전화로 제보” 국민저항에 놀란 미국 ‘전두환 압박’
6월24일 밤 마포경찰서장 “해제” 통보
하루만에 국민대행진 막으려 또 연금
김옥두와 남궁진의 지붕 위 시위는 일주일 남짓 이어졌다. “내외신 기자들이 인근 주택 옥상에 올라가 우리 집에서 벌이는 시위를 취재했어요. 그 사람들 중에 <에이피(AP) 통신> 사진기자가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에서 망원렌즈로 시위 장면을 찍었어요. 그 사진이 전 세계로 퍼져 우리가 감금돼 있다는 사실을 알렸지요.” 사람들이 매일 집 주위로 몰려들자 김대중과 이희호는 하루 서너 차례 장독대에 서서 담 너머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때 담장을 사이에 두고 외신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지요.”김대중과 이희호를 괴롭힌 것은 장기연금만이 아니었다. 도청과 감청도 계속됐다. “우리 집 주위 네 집에 진을 치고 있던 안기부 요원들이 고성능 기기로 우리가 하는 모든 대화를 엿듣는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집 안에서는 늘 라디오 볼륨을 높여놓고 살았어요. 그리고 중요한 이야기는 필담으로 했어요. 책받침만한 판에다 글씨를 쓰고 지웠지요.” 전화는 외부로 뚫린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안기부가 도청하고 있었지만, 남편은 전화로 외부와 연락했어요. 외국 언론사 40여곳과 인터뷰를 하고 우리의 민주화 투쟁을 알렸지요.”전화는 이희호와 김대중의 신경을 마모시키는 고문 도구이기도 했다. 장기연금 기간 중에 협박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왔다. 자정이 넘으면 전화벨이 더 자주 울렸다. “집을 폭파시키겠다느니 몰살하겠다느니 하는 협박을 했지요.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것 같은 기분 나쁜 휘파람 소리를 틀어놓기도 했고요. 안기부에서 조직적으로 하는 일 같았어요. 또 새 집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다느니 지하에 현금 다발을 쌓아놓았다느니 하는 비방도 끝이 없었지요.”1987년 5월18일 저녁 명동성당에서 5·18광주항쟁 7돌 추모미사가 열렸다. 추기경 김수환은 강론 중에 전두환 정권을 매섭게 질타했다. “민족의 가슴에 칼을 찔러 깊은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게 한 그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민족 앞에 나서서 죄를 고백하고 속죄해야 합니다.” 미사가 끝난 뒤 신부 김승훈이 단상에 올랐다. 김승훈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이름으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김승훈이 읽은 성명은 “박종철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게 한 하수인은 따로 있다”고 폭로했다. “진짜 범인은 치안본부 대공수사 학원분과 1반 소속 경위 황정웅, 경장 반금곤, 경장 이정호이며 이 진범들은 현재도 경찰관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성명은 고문치사 사건과 범인 조작 책임이 전두환 정권에 있다고 명시하고 사건 조작에 개입한 모든 사람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차가운 날 한 뼘의 무덤조차 없이 언 강 눈바람 속으로 날려진 박종철군의 영혼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의 곁에 맴돌고 있는 가운데 고문 경찰의 핵심들은 복직되었고, 고문 살인자들은 이 땅에 버젓이 폭력경찰로 군림하고 있다. 거짓으로 점철된 이 땅, 박종철군의 죽음마저 거짓으로 묻히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고문 범인들은 처벌되어야 하며 고문 진상은 밝혀져야 한다.”사제단의 폭로는 국민의 분노에 다시 불을 붙였다. 위기를 느낀 정부는 직접 고문을 한 경찰관 세 명을 구속하고, 범죄 축소 조작에 가담한 치안감 박처원을 비롯한 세 사람을 추가로 구속했다. 사태가 가라앉지 않자 전두환 정권은 5월26일 국무총리 노신영, 안기부장 장세동, 내무부장관 정호용, 검찰총장 서동권을 경질했다. 사제단의 폭로는 범국민적인 민주화운동본부 결성으로 이어졌다. 5월27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통일민주당·민추협·민통련과 종교계·여성계가 연합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2196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김대중을 포함해 함석헌·문익환·김영삼·김지길·윤공희·강석주·홍남순이 고문으로 추대됐다.이날 국민운동본부는 “민주화는 이 땅에서 그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도도한 역사의 대세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이제 우리는 호헌반대 민주화 운동을 하나의 큰 물결로 결집시키고 국민 속으로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김대중은 이날도 연금 중이어서 현장에 참석하지 못했다. 국민운동본부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일인 6월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조작 범국민규탄대회’를 열기로 했다. 국민운동본부 출범에 앞서 5월8일 서울 지역 대학교 18곳의 대표자들이 연세대에 모여서 서대협(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결성했다. 서대협은 산하에 ‘6·10총궐기위원회’를 두어 6·10대회를 준비했다.6월2일 전두환은 민정당 중앙집행위원회 간부들을 청와대 만찬에 초청해 민정당 대표 노태우를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겠다고 발표했다. 노태우는 감격스럽게 말했다. “두려움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각하! 끝까지 지도해주십시오. 동지 여러분! 지도해주십시오.” 6·10대회를 하루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궐기대회에서 연세대 2학년 학생 이한열이 직격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이한열은 급히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뇌사상태에 빠졌다.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는 이한열을 동료 학생이 뒤에서 껴안고 일으키는 장면을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가 찍었다. 다음날 신문에 실린 사진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6월10일 오전 10시 민정당은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전당대회를 열어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체육관 대통령’을 뽑겠다는 것이었다. 이날 서울 성공회 대강당에서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옥외방송으로 “지금 이 시각 진행되고 있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이날 전국 154곳에서 50여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대학생들은 출정식을 열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도심으로 몰려들었다. 경찰은 이날 국민대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했지만 도심으로 밀려드는 분노의 불길을 막지 못했다. 평소 시위에 나서지 않던 직장인 ‘넥타이부대’까지 시위에 함께했다.시위는 시민항쟁으로 번졌다. 경찰의 최루탄 난사로 도심의 도로는 최루가스에 휩싸였다. 경찰은 백골단이라고 불리는 사복체포조를 동원해 시위자 검거에 나섰다. 경찰에 쫓기던 학생 1000여명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정부가 명동성당에 경찰을 투입하려 하자 추기경 김수환이 경고했다. “그 사람들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고, 나를 쓰러뜨려야 신부님들을 볼 것이고, 신부님들을 쓰러뜨려야 수녀님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그다음에야 볼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의 농성투쟁으로 명동성당은 6월항쟁의 상징으로 떠올랐다.6월13일 경찰은 국민운동본부 간부 13명을 체포해 구속했다. 한국의 시위 상황은 외국 언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신문·방송도 6월항쟁을 연일 크게 보도했다. 미국 정부는 반정부 시위가 국민항쟁으로 번지자 전두환 정권의 폭력 대응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주한 미국 대사 제임스 릴리는 6월13일 외무부 장관 최광수를 방문해 경찰을 명동성당에 들여보낼 경우 전세계의 비난이 쏟아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음날 명동성당 앞을 가로막고 지키던 경찰이 철수했다. 농성 학생들은 무사히 성당을 빠져나왔다.시위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국민운동본부는 6월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했다. 그날 전국의 시위 군중은 “한열이를 살려내라”고 외쳤다. 이한열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과 같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도심의 대형빌딩에서는 직장인들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꽃다발처럼 시위대를 향해 던졌다. 이날 전국에서 150만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시민들의 마음에서 두려움이 사라졌다. 전두환 정권은 위기감 속으로 빨려들었다. 경찰력으로 시위를 막는 것이 한계에 부닥쳤음이 분명했다. 전두환은 군대를 동원해 일거에 상황을 제압할 계획을 세웠다.“18일부터 불길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지요. 계엄령이 선포된다는 소문이었어요. 동교동 우리 집으로 제보 전화들이 계속 왔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남편을 체포한다는 정보를 청와대에 파견 나가 있던 고위급 장교가 알려주기도 했지요. 우리는 수첩이랑 자료들을 비닐봉지에 쓸어 담았지요.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꽃나무를 옮겨 심는 척하면서 그것들을 마당 화단에 묻었어요. 1980년 5월17일 밤이 다시 오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날 군인들이 오지 않았어요.”
전두환은 6월19일 오전 10시30분 청와대에서 안기부장·국방부장관·육군참모총장·보안사령관·수방사령관을 모아놓고 다음날 오전 4시까지 전투 병력을 투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고 나서 몇 시간 뒤 상황이 뒤집혔다. 그사이에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친서가 전두환에게 전달됐다. 그날의 상황을 제임스 릴리는 회고록에 자세히 기록했다. 레이건의 친서는 6월17일 밤에 도착했으나 청와대는 접수를 피하다가 미국대사관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서야 친서를 받겠다고 했다. 6월19일 오후 2시에 릴리가 청와대를 방문해 전두환에게 레이건의 친서를 전달했다.레이건의 친서에는 정치범을 석방하고 정치탄압을 중지하고 언론자유를 늘리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외교적인 온건한 어투로 적혀 있었다. 레이건은 이 편지에서 평화적으로 정권이 이양되면 전두환의 미국 방문을 주선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릴리는 편지를 전달하면서 편지의 말투보다 더 강경하고 직접적인 표현을 써서 전두환을 압박했다. 릴리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주한미군 사령관과 나는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건의하기로 했다고 전 대통령에게 말했다. 만일 총리가 계엄령 선포가 임박했다고 발표한다면 한·미 동맹을 저해하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 1980년 광주에서와 같은 불행한 사태의 재발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고까지 강하게 나갔다.”
전두환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릴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릴리가 청와대를 떠나고 한 시간이 지난 오후 4시30분 전두환은 병력 동원 지시를 철회했다. 레이건의 친서와 릴리의 압박이 효과를 낸 것이었다. 군대를 동원할 경우 또 다른 쿠데타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측근들의 의견도 전두환의 결정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국무부는 6월22일에도 거듭 군 개입 반대 의견을 밝혔다. 6월23일 한국을 방문한 미국 국무부 차관보 개스턴 시거도 전두환을 만나 군대를 동원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시거는 23일 저녁 김대중이 연금돼 있는 동교동 집을 방문해 한 시간 동안 김대중과 이야기하며 의견을 들었다.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빨라졌다. 6월24일 전두환과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이 청와대에서 회담했다. “회담을 앞두고 24일 아침 일찍 김영삼 총재가 우리 집을 방문해 남편과 만났어요. 그 2~3일 전부터 남편의 장기연금이 해제될 거라는 이야기가 나왔지요.” 그날 집 밖에서는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들이 김대중의 연금에 항의해 전투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이날 밤 11시 추기경 김수환이 김대중에게 전화했다. “김 토마스, 아직도 안 풀렸습니까? 당신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합니다.”그러고 나서 11시55분 마포서장이 찾아와 “오늘 밤 자정부터 연금을 해제한다”고 말하고 급히 돌아갔다. 이어 1000여명의 경찰병력이 철수했다. 진입로에서 기다리던 내외신 기자, 민추협 회원, 통일민주당 당원, 일반 시민 수백명이 대문으로 밀려들었다. 78일 동안의 연금에서 풀려난 김대중과 이희호는 몰려든 사람들 앞에 나와 인사했다. 김대중은 대통령 호헌조처 철회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뒤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루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역설했다. “그런데 정부는 연금 해제 하루 만에 다시 남편을 연금시켰어요. 6월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귀국 이후 2년 4개월 동안 결국 55차례나 집 안에 갇혀 있었지요.”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5월1일 통일민주당 창당대회도 못 가
이불홑청 현수막 만들어 지붕위 시위
외신 기자 사진으로 ‘감금’ 세계에 알려 안기부 요원들 이웃집 상주하며 도청
라디오 소리 높인채 대화·책받침 필담
밤이면 자정 넘어 ‘괴전화’로 협박도 ‘5·18’ 7돌 추모미사 ‘박종철 고문’ 폭로
‘이한열 사건’에 6·10 시민항쟁 ‘폭발’
6월 중순 또다시 ‘김대중 체포’ 소문
“청와대 파견 장교가 전화로 제보” 국민저항에 놀란 미국 ‘전두환 압박’
6월24일 밤 마포경찰서장 “해제” 통보
하루만에 국민대행진 막으려 또 연금
역사적인 ‘6·10 시민항쟁’ 때도 동교동에 갇혀 있던 김대중·이희호는 비서들과 함께 장독대에 올라 담장 밖 시민들을 환영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7년 6월25일 78일 만에 동교동 가택연금이 해제됐다. 6월24일까지 ‘엑스’ 표시를 해둔 달력 앞에서 김대중이 해제 축하 전화를 받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6월25일 경찰병력이 철수한 동교동 골목에서 김대중(맨 오른쪽)은 김영삼(왼쪽 둘째)과 함께 기자회견을 통해 ‘4·13 호헌조처 철회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