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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다시 와다 하루키에 묻다/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5. 14. 13:22

사회사회일반

기정사실화해 피해자를 분단하는 레토릭일 뿐

등록 :2016-05-13 21:33수정 :2016-05-14 01:13

 

[토요판] 뉴스분석 왜?
서경식, 다시 와다 하루키에 묻다

어버이날을 앞둔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29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 참석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어버이날을 앞둔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29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 참석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 <한겨레>는 3월12일치 토요판 20·21·22면을 통해 와다 하루키(78) 도쿄대 명예교수에게 보내는 서경식(65) 도쿄경제대 교수의 도발적인 공개편지를 실었다. 3월26일치 토요판 18·19면에는 와다 교수가 서경식 교수에게 보내는 답신을 소개했다. 한차례씩 공개편지가 오간 뒤, 서경식 교수가 와다 교수의 주장에 재반론하는 형식의 글을 다시 보내왔다. 서경식 교수는 이 글에서 자신이 공개서한을 통해 밝혔던 3가지 물음에 대한 와다 교수의 명확한 입장 표명을 촉구했다.

 왼쪽부터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왼쪽부터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 선생님, 저의 공개서한 ‘일본 지식인의 각성을 촉구한다와다 하루키 선생님에게 보내는 편지’(<한겨레> 3월12일치)에 답장 ‘서경식 교수의 공개서한에 답한다’(이하 ‘반론’·3월26일치)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저의 질문에 답을 해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다시 여쭙고자 하니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제가 지난번 공개서한 말미에 여쭈었던 3개 항목 중에서 박유하 교수 저작과 언동에 대해 선생님은 ‘반론’에서 별다른 이유 없이 “지금 서씨와 논의할 생각이 없다”고만 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위로 볼 때 선생님은 결코 그 국외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선생님의 견해를 여쭙고자 합니다.

“양국 합의 백지화 어렵다” 주장엔
실패한 ‘아시아 여성기금’ 레토릭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일부 피해자들 비난하는 게 아니라
두 나라 정치권력 비판하는 것이죠

사회당은 관료·자민당과 타협
“필리핀·네덜란드 성공했다”지만
핵심적 과제는 손도 못댄 상태
가해자 쪽은 ‘성공’ 따위 평가를
스스로 금해야 하지 않을지요

선생님은 ‘12·28 합의’의 백지화론에 대해 “안이하다”며 일축하시고, 아베 총리의 사죄 표명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위를 돌아보면 아베 총리의 ‘사죄 표명’은 한국 쪽의 양보를 끌어내기 위해 제시된 구두약속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실제로 그 뒤의 일본 정부 입장은 ‘12·28 합의’ 이후에도 일관된 국가책임 부정론에서 바뀐 게 없습니다. 앞으로 한일 양국의 권력은 이 ‘합의’를 지렛대 삼아 여러 비판들을 봉쇄하려 하겠지요. 이 ‘합의’를 통해 잃어버린 것은 많고, 진정한 ‘해결’의 길은 더욱 멀어졌습니다.

‘권력 비판’을 ‘피해자 비판’으로

그럼에도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일 양국 정부의 합의를 백지화하는 것은 일의 경과로 보건대 어렵다고 할 수밖에 없다. (중략) 아베 총리에게 그 ‘최종적 해결’안을 백지철회하게 하고, 완전히 새로운 해결안을 내놓게 할 힘은 일본 국내에는 없다.”(‘반론’) 여기에는 실패로 끝난 ‘아시아 여성기금’의 레토릭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운동가든 전문가든 한일 간 합의의 백지철회를 주장한다면, 이번의 합의를 받아들일 피해자 할머니가 있을 경우 그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람을 비난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아시아 여성기금’ 때도 비판자들에게 “돈을 받은 피해자 할머니들을 비난하는 것인가”라는 이치에 맞지 않는 반론을 거듭 내놓았습니다. 이번에도 피해 당사자나 운동단체의 의향을 무시하고 양국 정부가 느닷없이 ‘합의’를 공표했습니다. 이는 기정사실을 만들어 피해자를 분단(分斷)하고, 그 분단당한 피해자의 한쪽을 방패로 삼아 자기정당화를 꾀하려는 레토릭은 아닌지요. 그런 분단책을 이제부터 실행하겠다는 예고로 들리기조차 합니다.

저는 일부 피해 당사자들을 비난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런 방식은 피해자를 분단하는 것이고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보고 일본과 한국의 정치권력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해서 논하는 것은 ‘권력 비판’을 ‘피해자 비판’으로 바꿔치기하는 걸 의미합니다.

선생님은 이번 ‘반론’에서 ‘12·28 합의’에 이르는 1990년 이후의 경과를 말씀하신 뒤, 서경식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운동의 이런 엄중하고 곤란한 도정을 얼마나 이해하고 발언을 하는 것일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쭤본 것은, ‘아시아 여성기금’은 잘못된 초기 설정을 수정하지 않은 채 강행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 아닌가라는 원리적인 차원의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노력의 방향성이 잘못돼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여쭤본 것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지난 1월28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위안부 피해자 쉼터 ‘평화의 우리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12·28 합의가 국제인권기준과 유엔 권고에 부합하는지를 묻는 유엔 청원서 제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지난 1월28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위안부 피해자 쉼터 ‘평화의 우리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12·28 합의가 국제인권기준과 유엔 권고에 부합하는지를 묻는 유엔 청원서 제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선생님은 ‘아시아 여성기금’ 발족 당시부터 1995년에 이르는 상황에 대한 저의 인식이 “현실과 매우 동떨어져 있다”고 하셨습니다만, 저는 일본 우파·보수파의 완강한 저항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일본의 진보적 시민과 한국의 반식민지주의 세력이 연대해서 일본 정부에 맞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전후보상 문제, 전쟁책임 문제가 부각되면서 마침내 미약하지만 연대의 맹아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시아 여성기금’ 구상은 이런 연대에 균열과 대립을 초래했고, 우파와의 싸움에서 불리한 조건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저의 논점입니다.

선생님은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일본의) 한국 민주화 연대운동 속에 ‘제3의 찬스’가 있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연대다. 일본인과 조선반도 사람들 간의 역사를 모든 면에서 다시 묻고, 근저에서부터 다시 만들어가기 위한 연대다”라고. 만일 그 연대가 이뤄졌다면 선생님이 지금까지도 “새로운 해결안을 내놓을 힘은 일본 국내에는 없다”고 거듭 말씀하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또 그게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면, 지난 사반세기의 과오를 엄중하게 되돌아보면서 총괄한 뒤 이제부터라도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아시아 여성기금’ 구상을 추진한 무라야마 내각의 이가라시 고조 관방장관이 <아사히신문>의 “전 위안부에게 ‘보상금’”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지 않은 데 대해 저는 그 기사가 “당시의 (연정에 참여한 사회당을 포함한) 정권의 (국가책임 회피) 의도를 정직하게 전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해 선생님은 “이가라시 관방장관도, 전후 50년 문제 프로젝트 팀의 사회당 위원도 필사적으로 주장했으나,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을 정부 자금으로 충당하는 것에 대해 관료와 자민당 위원들로부터 찬성을 얻을 수 없어 단념하게 됐다”고 반론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론이 아닙니다. 이가라시씨는 ‘관방장관’, 즉 정부의 공식 대변인입니다. 그런 사람의 발언은 무엇보다 먼저 정부의 의사표시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선생님 자신이 쓰셨듯이 그는 ‘관료와 자민당 위원’의 의향을 받아들여 국가보상을 단념하고, 관방장관으로서 그것을 공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얘기하는 “(사회당을 포함한) 정권의 의도”입니다. 이가라시씨 개인의 사람 됨됨이가 어떠한가 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필리핀 등 ‘성공’ 평가는 잘못

이처럼 사회당이 그때까지의 원칙을 버리고 ‘관료와 자민당’과 타협해서 체제내화했습니다. 그 결과 사회당은 자멸하고, 일본의 진보적 리버럴세력은 무력화됐습니다. ‘아시아 여성기금’ 구상도 그 틀 내에서 만들어졌던 것인 만큼 초기 설정 단계부터 모순과 한계성을 안고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른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저의 문제제기였습니다. 그에 대한 선생님의 응답은 저의 질문에는 답하시지 않고 이가라시씨와 자신들의 노고를 이해해야 한다는 논법의 반복입니다. 여기서도 국가 비판과 개인 비판의 (경우에 따라서는 의도적인) 혼동이 눈에 띕니다.

마찬가지로 ‘아시아 여성기금’에 돈을 낸 일반시민의 선의의 차원과 그 ‘기금’이 객관적으로 수행한 정치적 역할은 냉정하게 구별해서 고찰해야겠지요. 후자에 대한 비판이 일반시민의 선의에 대한 비난인 듯 얘기하는 것은, 좋게 보더라도 ‘빗나간’ 것이며, 굳이 얘기하자면 ‘바꿔치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아 여성기금’은 필리핀과 네덜란드에서는 성공을 거뒀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데에 대해, 저는 “네덜란드에서는 피해자로서 이름을 밝히고 일본 국가를 비판해온 얀 러프 오헤른씨가 기금을 거절했다. 이 한 사람의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금이 ‘성공’했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에 대해 선생님은 오헤른씨는 “일본인이 잊을 수 없는 네덜란드인 여성이라고 강조한 것은 나”라고 반론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선생님의 그런 말씀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오헤른씨와 같은 “잊을 수 없는 피해자”가 있다 하더라도 (기금을) 받아들인 사람 수가 많으면 ‘성공’이라고 평가하는 것인지요?

여기서 만일 선생님이 “오헤른씨와 같은 존재가 있는 이상, 기금이 성공했다고는 도저히 얘기할 수 없다”고 하셨다면 저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염을 새롭게 다졌을 겁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말하자면 ‘자율적 윤리규범’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신적 태도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가해진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자국이 이 사람들에게 가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잔학·냉혹한 행위를 생각하면, ‘아시아 여성기금’을 통한 ‘사죄와 보상’은 도무지 걸맞은 해결책일 수 없다는 것, 하물며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역사교육, 기념사업 등 핵심적인 과제는 손도 대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고려하면 가해자 쪽은 ‘성공’ 따위의 평가를 스스로 금해야 하지 않을지요. 그래야만 오헤른씨와 같은 사람까지 포함한 피해자들로부터 서서히 신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필리핀의 로사 헨슨씨에 대해서도 저는 같은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다만 무력한 피해자들을 이런 한계상황에까지 내몬 뒤 그 사람들에게 강요한 굴욕과 고난에 전혀 걸맞지 않은 ‘보상금과 사죄’를 전달한 것을 두고 사업의 ‘성공’이라 칭하는 그 정신상태에서 ‘자율적 윤리규범’이 결여돼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아 여성기금에 관여했던 자의 심정으로 말한다면, 피해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 불충분하더라도 일본 국가 국민의 책임을 다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지, 내 양심을 만족시키는 것만을 생각했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작은 노력에 대해 초월적인 높이에서 판정을 내리는 듯한 일은 그만두기 바란다.”

이에 대해서도 이미 말씀드린 것을 저의 답변으로 삼아도 되겠지요. 저는 “인간의 작은 노력”을 냉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인간의 작은 노력”이 국가에 횡령당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피해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는 개개인의 바람을 국가의 법적 책임 회피에 이용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쇼와 천황이 사망한 1989년 1월31일, 쓰루미 슌스케씨 등과 함께 성명을 발표한 것을 이번의 ‘반론’에서 상기하셨습니다. 그것은 식민지 지배로 조선민족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준 것을 사죄한다는 국회결의를 채택하도록 촉구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쇼와 천황의 사망을 계기로 ‘1억 총 면책’ 상태로 내달려가려던 당시 일본 사회에서, 제가 얘기하는 “한일 민중 간의 연대가 급속히 진행되는 듯 보였던 순간”의 한 정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글자 그대로 몇 년 만에 사라졌습니다.

선생님은 “(서경식은) <아사히신문>의 사설이 천황의 책임을 면죄하고, 미국의 천황제 온존에 감사하는 것에 분노하면서 논란을 벌인다. 서씨는 그 때문에 일본에 절망한 모양이다”라고 쓰셨습니다.(‘반론’)이 인용은 대체로 저의 논지를 잘 집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불명확한 것은 거기에 대한 와다 선생님 자신의 견해입니다. 선생님은 당시 <아사히신문> 사설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천황을 면책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식민지 지배의 죄를 사죄한다는 문제의식과, 미국의 천황제 온존에 감사하는 의식은 아무리 봐도 논리적으로 부정합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역사수정주의 공격의 표적

‘제3의 호기’는 살릴 수 없었다, 연대의 희망은 1990년대 중반까지 가면 혼미에 빠지고 일본 사회는 지금까지 계속 ‘긴 반동기’에 돌입했다, 이것이 저의 인식입니다. 이 인식을 선생님은 “현실 무시의 폭론”이라고 일도양단하셨습니다. 1993년에는 고노 담화가 나왔고, 1995년에는 무라야마 담화가 나오지 않았느냐고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 뒤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가 납득할 수 있는 해결”에 이르지 못했고, 오히려 일본 사회에서는 관민 모두의 역사수정주의 앞에 공격의 표적이 돼왔습니다. 1997년에는 대다수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등장했던 ‘위안부’에 관한 기술이 지금은 모습을 감췄습니다. 거리에는 혐한론과 헤이트 스피치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반동기’ 라고 부르는 것이 ‘현실 무시의 폭론’인가요? 현실주의자 와다 선생님이야말로 ‘현실’을 보지 못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1990년대 중반에 일본의 사상계에 중대한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것은 사상적으로도 일본근현대사상의 주요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논의에 보탬이 되고자 정직하게 생각하는 바를 말씀드렸습니다. 답변을 기대하겠습니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