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선생이 한국인 학생들에게 영어로 강의를 하는 실로 부조리한 풍조가 역병처럼 창궐하고 있다. 이 어리석은 풍조가 계속 확대되면, 개화기 이후 간난신고 끝에 하나의 민족어 혹은 국민언어로 성장해온 한국어는 결국 학문의 언어, 문화적 언어라는 자격을 잃게 될 것이다.
작가 한강의 소설이 세계적으로 중요한 문학상을 받았다. 반가운 소식이다. 한국인들은 언제부터인지 늘 ‘국제적인 인정’(특히 서양인들로부터의)을 받는 것에 목말라 있다. 스포츠도 좋고, 영화도 좋고, 문학도 좋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인이 무엇이라도 성취를 해낸 소식이 들리면 무조건 기분이 좋고, 온 나라가 들썩거린다. 굳이 이런 분위기를 ‘촌스럽다’고 말하는 한국인들도 있지만, 그런 자조적인 태도 자체가 서양 콤플렉스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여러 해 전 일이지만, 일본의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소설가 무라카미 류와 어떤 지면에서 대담을 하면서 “최근에 한국에 가서 보니까 노벨문학상에 대한 관심이 굉장하던데, 당신은 작년에 누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 아느냐?”라고 묻는 대목이 있었다. 상대방의 대답은 “글쎄, 누구였지? 전혀 모르겠는데”였다. 요컨대 일본의 문학계에서는 노벨상 따위에 관심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하기는 이미 두 차례나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스무명 이상의 과학자가 과학 분야 노벨상을 받은 바 있는 일본으로서는 당연한 현상인지 모른다.(그리고 노벨상은 원래 세계의 양심적인 시민들 사이에서는 별로 평판이 좋은 게 아니다. 일찍이 버나드 쇼는 살생과 파괴의 수단인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돈을 번 노벨의 죄도 크지만, 세계의 인재들을 서열화하는 노벨상을 만든 것은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통렬히 야유했고, 이 발언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일본의 지식인들이 노벨상 같은 것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비서구권 문화 속에서 서양인들과 다른 언어로 작업을 하는 지식인들로서, 사용 언어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학작품의 경우 서양어로 창작되거나 서양어로 번역된 작품만을 심사할 수밖에 없는 ‘국제적’ 문학상의 근원적인 허망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경우에도, 한국 작가가 쓴 소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실제로 상을 받은 것은 어떤 젊은 영국인이 옮긴 영역본 소설(The Vegetarian)이다. 물론 원작이 없으면 번역본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맨부커상’ 심사위원들이 한국어로 한강의 소설을 읽은 게 아니라 영어로 번역된 소설을 읽었다는 것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요컨대 그들이 읽은 것은 한국 소설이 아니라, 그 한국 소설의 메시지를 서양인들의 인지능력으로 대충 가늠할 수 있도록 옮긴 영어 소설이었다.
문학의 경우는 매우 심하지만, 무슨 책이라도 원작과 번역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한다. 그것은 아무리 메우려 해도 완전히 메워지지 않는다. 이번에 상을 받은 소설 <채식주의자>의 경우는 웬만큼 원작의 정신과 기분을 영어로 표현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에 영역본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근대소설의 가장 큰 봉우리라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벽초의 <임꺽정> 같은 작품이 과연 영어로 번역되는 게 가능할까? 말할 수 없이 풍부한 토착어와 그 토착어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전통사회 조선의 사회상과 민중의 의식과 생활정서가 종횡무진 생생하게 묘사된 이 작품이 영어로 번역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도 어렵고, 설령 번역된다 한들 원작의 진수를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점과 관련해서 일본 문학을 전공하는 미국인 학자들의 흥미로운 증언이 있다. 그들에 의하면, 일본 근대문학의 가장 뛰어난 유산이자 지금도 ‘현재적 작가’로 널리 읽히고 있는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영역본으로밖에 읽지 못한 일반 미국인 독자들에게는 왜 일본에서 소세키가 ‘문호’로 평가받는지 도저히 짐작조차 되지 않고, 오히려 ‘국수주의적’ 메시지를 드러내면서도 실은 뿌리깊이 서구적 감수성에 침윤돼 있는 미시마 유키오 같은 작가가 훨씬 이해하기 쉽고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결국 번역을 통해서 얼마만큼 원작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이런 결과를 가져온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철저히 의식하고 있었던 사람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 <설국>이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기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미국인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가 받아야 할 상이라고 ‘냉정하게’ 말했고, 그 자신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노벨상 수상 연설은 관행을 깨고 일본말로 했다.(그 후 얼마 뒤 가와바타가 자살을 한 것은 노벨상 수상 작가라는 딱지 때문에 생활이 몹시 번거로워진 상황에 심한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처럼 다른 언어, 다른 문화권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을 시원하게 넘어서는 게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라면, 우리들 한국인이 아예 처음부터 국제어(영어)로 작품을 쓰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게 가능할 리도 없지만, 만일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때는 한국 작가가 세계의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 전달해줄 새로운 것, 흥미로운 것 자체가 없어질 것이다. 외국인들이 한국 문화나 문학예술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 무엇을 발견하고, 경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작가들이 한국어를 버리고 영어로 글을 쓰는 순간, 외국어(특히 서양어)로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한국인들의 온갖 구체적인 내면적·외적 상황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추상적이고 공허한 일반적 경험에 대한 묘사나 진술일 것이며, 거기에 흥미를 갖고 반응하는 외국인 독자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머리로 학습한 외국어가 아니라 태어나서 자기도 모르게 몸으로 익힌 말로 느끼고 생각할 때라야 우리는 가장 자유롭게, 가장 능숙하게 사물을 인지하고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에게 가장 편하고 가장 익숙한 언어, 즉 자신의 모어(母語)로 작업할 때만 정말로 가치 있는 문학, 학문, 문화적 성취가 가능해진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이 진리를 갈수록 외면하고, 글로벌화 시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영어를 잘해야 한다면서 온 나라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영어에 미쳐 돌아가고 있다.
그중 가장 개탄스러운 것은 대학에서 강의를 영어로 하는 강좌 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이른바 명문대학일수록 한국인 선생이 한국인 학생들을 상대로 영어로 강의를 하는 실로 부조리한 풍조가 역병처럼 창궐하고 있다. 한때 한국의 가장 우수한 과학영재를 기른다는 대학에서는 중국어나 일본어 같은 외국어도 우리말이 아니라 영어로 가르쳐야 한다고 고집하는 총장이 있었다.
대학의 영어 강의 문제는, 생각하면 할수록, 기막힌 문제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사회는 아무런 진지한 토론도 논쟁도 없이 그냥 당사자들 사이에 영어 강의의 단순한 효율성에 대한 불평들(예컨대 “못 알아듣겠다”, “강의의 질이 떨어진다” 등등)만 거품처럼 솟았다가 사그라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어리석은 풍조가 계속 확대되면, 개화기 이후 간난신고 끝에 하나의 민족어 혹은 국민언어로 가까스로 성장해온 한국어는 결국 학문의 언어, 문화적 언어라는 자격을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조만간 우리는 영어에 능숙한 엘리트계층과 영어가 서툰 서민계층으로 확연히 갈라진 ‘분단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괴로워하며 살게 될 것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