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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실패한 교수인가’ 고별강연 주제 삼은 이유는 / 문정인 연세대 교수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6. 7. 23:22

정치외교

‘나는 왜 실패한 교수인가’ 고별강연 주제 삼은 이유는

등록 :2016-06-06 19:25수정 :2016-06-06 19:25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정년퇴임 문정인 교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정년퇴임 문정인 교수
[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정년퇴임 문정인 교수
더치 트리트. 우리말로 ‘각자 내기’다. 외국인과 접촉이 잦은 한국인은 미국인 등 서구권 사람을 만나면 흔히 ‘더치 페이’라 불리는 ‘더치 트리트’에 따라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는 미국 사람과 식사를 하고는 그냥 자기가 다 계산할 때가 많다. 상대방은 처음엔 놀란 표정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를 자기 집으로 불러 대접한다. 그는 이를 햇볕정책의 ‘선공후득’(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다)과 같은 마음이라고 했다. 1·2차 남북정상회담에 민간인으로는 유일하게 특별수행원으로 참여한 ‘햇볕정책의 국제 담당 대변인’다운 능란한 비유법이다.

하지만 오해는 금물이다. 첫째, 그가 서구문화에 문외한이거나 거부감이 깊어서 ‘각자 내기’를 않는 건 아니다. 그는 한국에서 영어를 가장 잘 구사하는 국제정치학자로 꼽힌다. 어쩌면 가장 많은 외국인을 아는 한국 정치학자일지도 모른다. 한반도·동북아 문제를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한테 그는 ‘한국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불린다. 지구를 자기집 마당처럼 누비고 돌아다니는 코스모폴리탄이다. 그러니 배외주의와 무관하다. 둘째, 그럼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계산된 행위’일까?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허당’에 가깝다. 자기 것을 챙기는 데 날래지 못하다.

이번 학기로 정년퇴임하는 문정인(65·사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지난 4일 서울 연희동 자택 근처에서 만났다.

외국학자들 사이 ‘한국 연구의 관문’
‘마당발’ 오해 무색한 연구성과 ‘최다’
“인문사회과학자 평가 기준 바꿔야”

오늘 마지막 강의 뒤 명예특임교수로
“강단 고해성사…연구는 죽을 때까지”
10년간 10개 주제 연구서 출간 계획

어떤 이들은 그를 ‘마당발’이라 부르다. ‘문정인은 모르는 사람이 없고, 끼지 않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마당발’엔, 깊게 신뢰할 수 없는, 뭔가 셈이 복잡하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부정적 어감도 따라다닌다. 하지만 그는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성공한 남자들’이 신분을 과시하고자 즐기는 두 가지 습성이 없다. 첫째, 그는 골프를 치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골프는 여전히 로비·청탁 같은 뒷거래가 이뤄지는 ‘그들만의 고급 사교’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둘째, 그는 조찬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 고급호텔에서 이른 아침 ‘성공한 남자들’이 스테이크를 썰며 ‘고담준론’을 나눌 때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그는 불가피한 사정이 없는 한 밤 10~11시께부터 새벽 3~4시 사이엔 집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가 골프를 치지 않는 이유가 “시간이 없어서”이듯, 조찬 모임을 피하는 이유 역시 “그 시간엔 자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을 이어준다는 뜻에서 ‘허브’ 또는 ‘네트워커’라 부르는 게 더 합당하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술도 즐긴다. 하지만 그가 먼저 누군가를 찾아가는 일은 거의 없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 그의 대인관계는 ‘피동적’이다. 다만 그는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힘닿는 데까지 도우려 한다”. 그의 주변에 사람이 꾀는 이유다.

‘학자 문정인’한테 따라붙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하나는 ‘도대체 언제 공부하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며 언제 제대로 된 논문을 쓰겠냐’는 삐딱한 시선이다. 늘 새벽까지 공부하는 습관 덕분에 ‘제대로 된 논문’은 무지하게 많이 썼다. 한국 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업적 평가기준으로 쓰이는 사회과학논문 인용색인(SSCI)급 논문이 40편, 영어 논문 200편, 한글 논문 100편, 단행본·공저·편저 70권에 이른다. 최고 출력의 연구 생산성이다.

‘교수 문정인’은 7일 오후 3시 연세대 연희관 402호에서 ‘마지막 강의’를 한다. 그가 선택한 ‘고별 강연’의 주제는 이렇다. “나는 왜 실패한 교수인가?” 그는 “교수 생활을 마치며 하는 고해성사”라고 했다. 교수라는 직분을 이루는 세 개의 기둥, 연구·강의·사회활동과 관련한 성찰적 평가이자 ‘노학자 문정인의 제2의 인생선언’인 셈이다.

그는 퇴임하며 학교 연구실을 떠나야 하지만, 연세대와 인연이 모두 끊기는 건 아니다. 학교 쪽은 70살이 될 때까지 5년간 명예특임교수로 송도캠퍼스의 새내기 교양강좌를 맡아달라고 부탁했고, 총장은 ‘국제 담당 고문’을 맡아달라고 당부했다. 늘 그렇듯, 그는 이번에도 거절하지 않았다.

물론 학자로서 연구는 “죽을 때까지 하겠다”는 게 그의 다짐이다. “앞으로 10년간 10개의 주제를 연구해 책으로 펴낼 생각”이라고 했다. <한국 방위산업의 정치경제>라는 영문 연구서를 이미 미국 출판사와 계약해 2017년 여름 이전에 출간하기로 했다. <불확실성 시대와 한반도 대전략론>도 단행본으로 펴낼 생각인데, 이는 그의 2학기 송도 캠퍼스 강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가 기사에 꼭 적어달라고 거듭 당부한 말이 있다. “한국 인문사회과학자의 연구 업적을 SSCI급 논문 편수로 재는 제도와 관행은 바뀌어야 한다. SSCI급 논문을 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뭔지 아나? 국제학계에서 유행하는 이론을 원용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 한국사나 한국정치를 연구하는 학자들까지 그런 기준으로 평가하는 게 온당한가? 학문 연구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 SSCI급 국제정치학 저널 11개의 현직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국제적으로 저명한 노학자의 간절한 당부이니 교육 관료들이 깊이 새겨도 좋겠다.

마지막으로 <한겨레> 독자에게 꼭 권하고 싶은 자신의 저서를 물었다. “영어책으로는 <더 선샤인 팔러시>(햇볕정책·연세대출판부), 우리말 책으론 <중국의 내일을 묻다>.”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