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스스로 책방 주인이라고 낮추었지만 누구 못지않은 애서가였다. 통문관에는 ‘적서승금’(積書勝金)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책을 쌓아 두는 것이 금보다 낫다는 뜻이다. 그리고 선생은 훌륭한 서지학자, 국학자이셨다.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문화거리는 누가 뭐래도 인사동이다. 인사동엔 화려함이나 풍요로움은 없다. 그 대신 고만고만한 고서점, 고미술상, 화랑, 전시장, 표구점, 화방, 필방, 공방, 전통한지 가게, 전통공예품 가게가 즐비하고 전통찻집과 전통음식점들이 골목골목에 퍼져 있어 전통과 예술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여기를 드나드는 분들도 문화예술인과 높은 교양이 풍기는 중년 신사들이어서 거리엔 문기(文氣)가 넘쳤다. 이것이 원래 인사동 모습이다.
그런 인사동이 88서울올림픽 때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어 꽹과리 치고 떡판 두드리는 거리축제를 벌이면서 젊은이들과 외국인 관광객들로 넘치기 시작했다. 1999년부터 ‘차 없는 거리’를 시행하자 하루 10만명에 이르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인사동 바깥사람’들이 들어오면서 값싼 중국제 기념품 가게와 호떡 장사가 판을 치게 되었다.
거리의 질이 달라지자 기존 점포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국제화랑, 학고재화랑은 일찍이 떠났고, 고미술상 고도사, 나락실, 예나르, 해동화랑도 떠났고 세로방 화방, 청기와 화방도 떠났다. 박당표구, 상문당표구, 고서점 호고당, 문우서림이 문을 닫은 지는 오래다. 이렇게 모두들 떠나가 버리면 인사동은 뭐가 되는가?
그래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절집의 큰 자산은 노목(老木)과 노스님이라고 했으니 인사동의 자산은 노포(老鋪)와 터줏대감이라 할 것이다. 아직 동산방화랑의 박주환 회장, 한정식 선천집의 박영규 할머니가 계시고, 천상병 시인 부인의 전통찻집 ‘귀천’(歸天)은 조카딸이 이어받았고, 통문관은 손자가 지키고 있다. 나 같은 글쟁이들은 모름지기 인사동 옛 거리의 훈훈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 이 거리의 인문적 전통을 전해줄 의무가 있음을 느낀다.
통문관의 이겸로(李謙魯, 1909~2006) 선생은 평안남도 용강 출신으로 16살에 서울로 와 서점 직원으로 10년간 일하다 26살인 1934년부터 인사동에서 고서점을 열었다. 해방 후 ‘통문관’이라는 상호를 달고 본격적으로 고서 수집과 보급에 평생을 바쳤다. 6·25동란 중 폐허 속에 나뒹구는 책더미 속에서 <월인천강지곡>을 찾아낸 것을 선생은 생애 가장 큰 기쁨으로 얘기하곤 했다.
당시 국학 연구자치고 통문관에 드나들지 않은 분이 없었다. 최남선, 이희승, 이병기, 김상기, 이홍직, 이선근, 황수영, 황의돈, 이윤재, 최순우, 김원용….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당신이 쓴 <책방비화>를 보면 “동빈 김상기 선생이 어느 책을 찾는데…”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얘기 속에 책과 국학과 인생의 향기가 어려 있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전문학자마저 없던 우리나라 고활자·목판화·능화판(菱花板)·시전지(詩箋紙)를 모아 이를 하나의 장르로 제시하셨다. 영남대박물관이 자랑하고 있는 한국의 고지도 800여 점과 능화판 200여 점은 바로 통문관 컬렉션이었다. 선생은 많은 국학 서적을 간행하기도 했다. <청구영언> <두시언해> <월인천강지곡> 영인본을 펴냈고 고유섭의 <한국미술문화사논총>도 출간하였다. 내가 처음 통문관을 찾아간 것도 바로 대학생 때 이 책을 사러 간 것이었다.
한국미술사를 전공하면서 나는 조선시대 화가들의 전기를 쓰기로 마음먹고 자료 수집을 위해 통문관에 열심히 드나들었다. 선생은 그런 나를 기특하게 생각하여 과분할 정도로 은혜를 베푸셨다. 당신이 비장하고 계시던 조선시대 회화비평의 고전이라 할 남태응의 <청죽화사> 육필본을 내게만 복사해 주셨다.
서화가의 필적은 물론이고 책을 조사하다 그림 화(畵) 자만 나오면 내게 편지를 보내곤 하셨다. 당신은 노년에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끼셨기 때문에 전화는 하지 않으셨다. 한번은 영남대 교수 시절 선생에게 편지를 받았는데 핑크빛 딱지가 아롱거리는 예쁜 꽃편지지에 옛사람의 글투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일주일이면 한 번, 못 돼도 한 달에 한 번은 뵙던 얼굴인데, 이 봄이 다 가도록 만날 수 없었으니, 저술에 전념함이 깊으신 것인지 영남의 꽃이 좋아 아니 올라오심인지. 다름 아니오라 책을 정리하다가 우리 회화사 연구에 도움이 될 듯한 자료가 나와 한 부 복사하여 동봉하오니 잘 엮어서 좋은 작품을 만드심이 어떠하실지. 부처님 얼굴 살찌고 아니고는 석수장이 손에 달렸다고 합니다. 하하하, 이만 총총.”
당신이 80살일 때 내 나이 40살로 나이를 반으로 꺾어야만 동갑이 되는 젊은이에게 그런 애정을 베푸셨다. 선생은 또 대단히 정확한 분이셨다. 책마다 뒷면에 연필로 가격을 매겨놓은 정찰제였고 남에게 진 신세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2000년 8월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이야기다. 당시 월북 국어학자 류열 박사가 딸을 만나기 위해 남한에 왔다. 통문관은 해방을 맞은 기념으로 1946년에 류열 박사의 <농가월령가>를 펴낸 바 있었다. 선생은 류열 박사가 왔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는 일행이 방문한다는 롯데월드 민속관 앞에서 기다렸다가 류열 박사에게 달려가 <농가월령가> 두 권과 50만원이 든 흰 봉투를 불쑥 건넸다.
“내가 통문관이오. 선생 책을 펴냈지만 기별이 끊겨 책도 못 드리고 인세도 못 드렸수. 옜수. 받아주슈.”
선생은 아침이면 인왕산 치마바위 아래 있는 옥인동 자택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출근하셨다. 그래서 통문관 2층 전시실을 상암(裳巖)산방이라 했다. 어느 날 내가 상암산방으로 찾아뵈었더니 선생은 낡은 책을 한 장씩 인두로 반반하게 펴고 계셨다. 선생은 나에게 앉으라는 눈짓을 보내고는 “이 일 좀 끝내고”라고 하시며 연신 책장을 다듬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돌보아주던 낡은 책들이 내 노년을 이렇게 돌봐주고 있다오.”
선생은 스스로 책방 주인이라고 낮추었지만 누구 못지않은 애서가였다. 통문관에는 ‘적서승금’(積書勝金)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책을 쌓아 두는 것이 금보다 낫다는 뜻이다. 그리고 선생은 훌륭한 서지학자, 국학자이셨다.
이겸로 선생은 2006년 10월15일, 향년 97살로 세상을 떠나셨다. 유언으로 수목장을 해달라고 하셨다. 선생은 진실로 인생을 잘 사신 인사동의 큰 어른이셨다. 지금 통문관은 손자인 이종운씨가 가업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는데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끊겨 문을 닫고 있는 때가 많아 쓸쓸하다.
요즘 나는 화요일 저녁마다 조계사문화관에서 ‘화인열전’을 주제로 공개강좌를 열고 있는데, 지난 11월17일이었다. 미소를 머금은 동안(童顔)과 걸음걸이가 이겸로 선생을 빼닮은 백발 어른이 내게로 다가와서는 “내가 통문관 셋째요”라는 것이었다. 고려대 중문과의 이동향 명예교수이셨다. 이 교수는 요즘 선친 유품을 정리하다 이게 나왔다며 얇은 서첩 두 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표지를 보니 한 권은 이광직이라는 문인이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 대하여 쓴 <단원화평>이고, 또 하나는 그림과 글씨의 기원에 관해 쓴 <서화연원>이라는 필사본이었다. 책장을 넘기자 표지 안쪽에는 안국동우체국 수령증이 붙어 있는데 놀랍게도 ‘수취인 유홍준’으로 쓰여 있었다. 깜박 잊고 부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 책갈피에는 이동향 교수가 내게 쓴 한문 편지가 들어 있었다. 번역하면 이렇다.
“모든 물건에는 주인이 있는 법인데, 이제 이 소책자가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또한 선친의 뜻입니다. 청컨대 웃으면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아, 이 은혜를 나는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 내년은 이겸로 선생의 10주기가 되는 해이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