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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오디세이 피라무스와 티스베 그리고 에로스

이윤진이카루스 2010. 12. 4. 14:57

사랑을 가로막을 힘, 세상 어디에도 없다
[고전 오디세이 20] 피라무스와 티스베 그리고 에로스
한겨레
» <사랑의 신, 쿠피도>, 로마의 카피톨리니 박물관 소장품.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 기원전 43년~기원후 18년)에 따르면,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우주가 생성될 때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게 뿌려진 조그만 “사랑의 불씨들(semina)”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이 불씨들이 마음 안에서 외로움과 고독에 홀로 몸부림치기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이 불씨들이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짝을 찾도록 하기에 말이다. 다음은 마음 안에 혼자 노닐던 불씨 하나가 자신의 짝을 만나는 이야기다.

 

아버지들이 반대했지요. 하지만 두 마음은 사랑의 포로가 되어/ 사랑으로 똑같이 불타올랐지요. 아버지들도 어쩔 수 없었지요./ 심부름꾼이 없어도 두 연인은 고갯짓과 손짓으로 대화를 나누었고,/ 감추면 감출수록 사랑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지요./ 두 집 사이에는 오래된 담장이 하나 있었지요./ 거기에는 조그만 틈이 하나 있었지요./ 틈이 생긴 것은 오래되었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지요./ 하지만, 사랑이 무엇인들 찾아내지 못하랴? 연인이여, 그대들이/ 맨 먼저 그곳을 찾아내고, 그곳을 목소리의 통로로 삼았으니,/ 그곳을 통하여 나직이 속삭이는 사랑의 밀어가 안전하게 오가곤 했지요.(<변신이야기> 제4권 61~70행)

 

옛날 바빌론에 살았던 피라무스라는 청년과 티스베라는 처녀의 사랑 이야기다. 사연인즉, 이렇다. 오랫동안 서로 원수 관계에 놓여 있던 두 집안이 있었다. 그런데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두 남녀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말미암아 끝내 이 남녀는 뽕나무 아래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이를 지켜봤던 뽕나무가 사랑의 증표를 남기기 위해서, 이들이 흘린 피를 빨아들여 오디의 푸른색을 빨간색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다. 여느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접하는 이야기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로 가장 유명한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일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연애담이 늘 그렇듯이 부모들의 반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두 남녀의 사랑은 더욱 강렬해지고 결사적으로 불붙는다. 도대체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마저도 거부하게 만들고, 죽음마저도 두렵지 않게 만드는 저 사랑의 위력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우선 “사랑이 무엇인들 찾아내지 못하랴”라는 언급이 흥미롭다. 사랑의 위력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랑이라는 불씨는 사랑하는 당사자 이외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들수록 더욱 활활 불타오르는 성질이 있다. 아마도 저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오래된 담벼락에 난 틈을 찾아내도록 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사랑의 불씨를 꺼뜨리려 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거세게 불타오른다. 이유는 이럴 것이다. 늘 갇혀 지내던 사랑의 불씨가 자신이 그토록 찾아왔던 다른 불씨를, 우주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유일한 짝을 찾아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랑의 불씨는 짝이 되는 불씨를 발견하게 되면, 어떤 힘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부모든, 다른 어느 누구든 자신들의 만남을 가로막으면, 심지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도록 만드는 힘이 사랑의 불씨 안에는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모들의 반대가 너무 강력하자, 피라무스와 티스베가 죽음으로 자신들의 사랑을 지키려고 했듯이 말이다. 이렇듯 사랑을 가로막을 힘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부모도, 국가도, 총으로도 포탄으로도 막지 못한다. 결국 양가의 부모들은 자신들의 쓸데없는 적개심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잃었다는 후회와 통절한 반성을 하게 되었고, 이와 같은 희생을 통해서 양가는 서로 화해하게 된다. 이런 화해의 바탕에는 사랑의 힘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하겠다.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자신들이 서로 원수지간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는데도 피라무스와 티스베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엔, 그들은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장님”(amor est caecus!)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신분, 재산, 학력, 고향, 나이, 피부, 국적을 따지지 않기에 말이다. 누구든 사랑에 빠지면, 이런 외적 요인들은 문제되지 않기에 말이다. 오히려 이런 외적 요인들이 사랑을 방해하려 든다면, 그것들에 맞서서 저항하고 투쟁하도록 사람을 바꾸어 놓는 힘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힘일지도 모르겠다.

이와 관련해서, 사랑의 신인 아모르(Amor)의 족보를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 멀리 태초에 우주가 생성하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주가 처음 생겨났을 때에 함께 태어났던 에로스(Eros)에 대한 헤시오도스의 보고다.

태초에 있었던 것은 혼돈이었고/ 이어서, 설백의 올림포스 산정에서 거주하는 모든 불사의 신들을 위해 (…)/ 불사의 신들 가운데에서 가장 잘생긴 에로스가 생겨났다./ 사지(四肢)를 풀어버리는 그는 모든 신들과 인간들의/ 가슴속에서 의지(意志)와 예지(叡智)를 압도해 버린다. (<신통기> 116~122행)

 

우주의 생성과 관련해서, 에로스의 힘이 인간들과 신들의 이성과 의지를 제압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헤시오도스의 언급이 흥미롭다. 그런데 우주가 생성하기 위해서는 적대적인 힘들이 서로 어울려야 한다. 예컨대 물과 불은 본성상 직접적으로 만날 수 없다. 둘이 맞붙으면, 둘 중에 하나는 져야 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 만나야만 한다. 그래야 세상이 유지되고, 생명이 지속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적대적인 것들이 서로 만나기 위해서는 이들을 묶어주는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이 사랑이다. 이렇게 적대적인 존재들이 사랑에 의해 서로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피라무스와 티스베의 사랑이다. 본디 피라무스(Pyramus)는 불을, 티스베(Thisbe)는 물을 상징한다. 이 이야기의 바탕에는 물과 불이 만나는 이야기가 내재해 있다. 그러니까 이 사랑 이야기는 한편으로 자연 세계의 생성을, 다른 한편으로 인간 세계의 정치적 화해를 상징하는 신화라 하겠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랑이 어떻게 정치적 화해를 만드는지를 살펴보자. 적대적인 세력이 서로 화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의 과거를 묻지 말아야 한다. 요컨대 “네가 먼저 잘못했어” “아냐, 네가 먼저 그랬잖아” 따지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과거에 대해 묻지 않을 때에, 용서와 이해를 위한 대화의 자리가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을 그리스인들은 암네시아(amnesia, 망각)라 부른다. 참고로, 암네시아는 국제 외교의 제일 원칙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뒤, 서로 적대국이었던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만나 유럽 통합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이 암네시아 원칙 덕분이었다. 어쨌든, 이 망각의 힘을 작동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실은 바로 헤시오도스가 말하는 에로스다. 사랑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사랑하는 이를 장님으로 만드는 것이고, 이어서 과거를 잊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피라무스와 티스베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설령 그들이 과거를 잘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 ‘앎’ 자체를 무력화시켜 버리는 힘이 사랑이기에 말이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신과 인간의 이성과 예지를 압도해버릴 정도로 강력한 힘이 에로스(Macro-Eros)다. 각설하고, 하늘, 땅, 바다가 서로가 서로를 만나 세계를 만들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도 이 에로스 덕분이라 하겠다.

하지만 주의하시길. 이 힘은 우주의 밖에 있는 무엇이 결코 아님을! 이 힘은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모든 생명의 가슴에 뿌려진 저 사랑의 불씨(semen)라는 점을 말이다. 물론 사랑하는 이들의 밖에서 에로스가 사랑의 화살을 쏴주어야 하지만, 그것에 맞아 가슴 안에서 불타오르는 사랑의 불씨(Micro-Eros)가 안에 있어 주어야 하니까 말이다.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생명들이 나누어 가진 공통의 힘이 이 사랑의 불씨라 하겠다. 들풀에게도, 꽃게에게도, 사람에게도 주어져 있고, 또한 그들에게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힘이다. 작지만 사랑의 불씨를 누구나 가슴에 품고 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도, 그리워하는 마음도, 다른 사람보다 더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도, 다른 이에게 상처 입고 아파하는 마음도, 모두 사랑의 불씨가 작용해서 일어나는 마음이기에 말이다.

사랑한다면, 세상에 서로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더욱이 만나지 못할 정도로 적대적인 관계도 없다. 다만 그것을 묶어주는 힘이 없을 뿐이다. 아니,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찾으려 하지 않을 뿐이다. 실은 그 힘이 우리 가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면 “사랑이 무엇인들 찾아내지 못하랴?”(quid non sentit amor)

안재원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