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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 맞서 서양철학 탄생시킨 탈레스의 땅 / 유재원 외국어대 교수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7. 1. 21:09

국제국제일반

신화적 세계에 맞서 서양철학 탄생시킨 탈레스의 땅

등록 :2016-07-01 11:28

 

그리스 가장 오랜 흔적 품은
소아시아 터키 땅 ‘밀레토스’
만물의 근원 탐구
인간이성 믿은 자연철학의 산실

트로이전쟁 땐 트로이편에
페르시아 지배하 BC 499년엔
아테네민회에 도움 청하며
이오니아 12도시 반란에 앞장

아테네군 철수뒤 반란 초토화
온도시 잿더미 ‘밀레토스 참사’
아테네 시민 부채의식 자극
민주파 정치적 도약에 밑거름

기원전 499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이오니아 지방의 12개 폴리스가 반란을 일으키고 그리스 본토에 도움을 청했다. 496년 아테네는 함선 20척을 파병했고, 이오니아와 아테네 연합군은 일부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결국 후퇴했다. 494년 이오니아 반란은 진압됐고, 반란에 앞장섰던 밀레토스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사진은 파괴된 밀레토스의 원형극장의 모습이다.
기원전 499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이오니아 지방의 12개 폴리스가 반란을 일으키고 그리스 본토에 도움을 청했다. 496년 아테네는 함선 20척을 파병했고, 이오니아와 아테네 연합군은 일부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결국 후퇴했다. 494년 이오니아 반란은 진압됐고, 반란에 앞장섰던 밀레토스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사진은 파괴된 밀레토스의 원형극장의 모습이다.

⑬ 밀레토스 폐허에서

지금은 터키 땅인 소아시아에서 그리스의 가장 오래된 흔적이 발견된 곳은 밀레토스다. 기원전 1600년쯤부터 이곳에는 크레타의 미노아인들이 진출하여 교역을 했음을 보여 주는 토기가 발굴되었다. 기원전 1400년부터 1200년 사이에는 당시 아카이아인이라 불리던 그리스인들이 도시를 세우고 거주하면서 히타이트 제국과 교역을 했다. 호메로스는 <일리아드>에서 밀레토스가 거친 말투를 쓰는 카리아인들의 도시로 트로이아(트로이) 편에서 싸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폴리스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정신 유산은 철학이다. 바로 이곳에서 신화적 우주관에 대해 의심을 품고 만물을 이루는 기본 원소가 무엇일까 하는 자연철학이 시작되었다. 세계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설파했다. 그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 아니라 ‘무한자’라고 반박했다. 그의 주장도 만물의 근원을 ‘공기’로 본 제자 아낙시메네스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이와 같이 스승의 권위에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전통을 세운 곳이 밀레토스다. 인간이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진정한 지식으로 받아들이겠다는 학문이 시작된 것이다.

겨울철 밀레토스는 바닥에 물이 질척하여 돌아다니기가 매우 불편하다. 고도가 거의 1~2m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웅덩이에 비친 폐허를 보고 있노라면 하늘의 별을 보고 가다가 우물에 빠진 탈레스를 끌어 올려 주며 노파가 했다는 “제 발밑도 모르는 것이 하늘의 비밀을 알겠다고 꼴값하고 있다”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그리스 세계에서도 가장 빨리 학문을 시작하고 민주주의를 시행했던 이 도시는 기원전 494년 반란을 주도했기에 페르시아로부터 철저하게 파괴당했다. 그런 의미에서 밀레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지금 이곳에는 한 명의 그리스인도 없다. 1923년 그리스가 터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맺은 로잔 조약에 따라 근 4000년 동안 이곳에 살던 그리스인들은 모두 그리스 본토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파괴된 밀레토스 도심의 모습. 밀레토스는 고도가 거의 1~2m 수준이어서 곳곳에 물웅덩이만 남아 있다.
페르시아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파괴된 밀레토스 도심의 모습. 밀레토스는 고도가 거의 1~2m 수준이어서 곳곳에 물웅덩이만 남아 있다.

■ 기원전 6세기 말의 아테네

기원전 6세기 무렵 아테네는 어려운 선택을 해야했다. 대내적으로는 참주정이 붕괴된 소수의 귀족-부자들로 이루어진 과두정을 것인가, 아니면 절대다수인 민중을 중심으로 민주정으로 것인가를, 대외적으로는 참주정의 외교 노선을 유지하여 아르고스와 테살리아와의 우호 관계를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기원전 509년에 참주정을 끝낼 도와 스파르타와 손을 잡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 아테네 대부분의 시민들은 변화를 바랐던 같다.

기원전 506 이사고라스와 클레이스테네스의 갈등과 대결은 시민들을 진영으로 나누어 내전 상태로까지 끌고 갔다. 여기에 스파르타의 클레오메네스 왕이 차례에 걸쳐 개입하면서 사태는 더욱 꼬여갔다. 그러나 위기에 하나로 뭉친 민중들은 과두정 지지 세력과 스파르타의 공세를 이겨내고 기원전 504년에는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주의 개혁 조치들을 하나씩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501년에는 오늘날 국회에 해당하는 500인회와 행정부에 해당하는 프리타네이아를 출발시켰고, 외교정책에 대한 권한을 국회에서 민회로 넘기는 개혁을 완성했다. 이때부터 아테네의 모든 시민들에게 병역 의무가 부가되었다. 병역은 자유 시민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기에 조치는 민권 확장에 의미가 있었다.

폐허가 된 밀레토스의 옛 건물의 잔해가 쓸쓸히 들판에 서 있다.
폐허가 된 밀레토스의 옛 건물의 잔해가 쓸쓸히 들판에 서 있다.

■ 이오니아 반란과 아테네 정치상황의 변화

기원전 501년, 이런 개혁을 누가 했는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때 클레이스테네스는 이미 실권한 뒤였다. 아마도 다음 세대의 정치 지도자로 부상하는 테미스토클레스와 아리스테이데스, 그리고 페리클레스의 아버지인 크산티포스가 주도한 듯하다.

기원전 499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이오니아 지방의 12 폴리스가 반란을 일으키고 그리스 본토의 강국인 스파르타와 아테네에 도움을 청했을 스파르타의 클레오메네스 왕은 이를 거절했으나, 아테네의 민회는 이를 받아들여 기원전 496년에 함선 20척을 파병했다. 이오니아와 아테네 연합군은 소아시아 지방의 페르시아의 지방 수도르데이스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같은 아테네에서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친척이자 참주정파의 지도자였던 히파르코스가 아르콘으로 당선되어 실권을 잡았다. 여기에는 클레이스테네스파와 다른 과두정파가 힘을 보태 듯하다. 아르콘이 주도한 아테네 민회는 원정에 실패한 아테네 함대에 즉시 귀환을 명령했다. 2 뒤인 기원전 494, 이오니아 반란은 진압되었고 반란에 앞장섰던 밀레토스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오니아 지방에서 가장 부유했고 강력한 중심지였던 폴리스는 이후 다시는 옛날의 명성을 되찾지 못했다.

밀레토스의 참사는 아테네에도 심각한 후유증을 가져왔다. 우선 아테네 시민들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들의 동족을 돕지 않은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페르시아의 위협에 아테네의 모든 해외 무역이 거의 마비 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다음해인 기원전 493년 연극제에서 프리니코스의 ‘밀레토스의 점령’이라는 비극을 본 아테네 시민들은 슬픔을 못 이겨 집단적인 히스테리 증상을 보였다. 이에 과두정 정부는 작가에게 무거운 벌금을 내리고 연극 공연을 금지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정부의 이런 졸렬한 조치에 분노를 느끼고 다음해(기원전 492년)의 선거에서 민주파의 테미스토클레스를 아르콘으로 뽑았다. 그는 페르시아를 대적하려면 땅이 아니라 바다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계획은 그리스의 중장비병을 신뢰하는 보수파 우두머리 밀티아데스가 출현함으로써 당장 이루어지지 않았다.

밀티아데스는 아테네의 귀족 집안 출신으로 아테네로 돌아오기 전에 다르다넬스 해협의 유럽 지역인 갈리폴리 반도에 있는 아테네의 식민 폴리스의 참주였다. 그는 이오니아 반란 때 페르시아와 맞서 많은 전공을 세운 장군이었고, 렘노스 섬과 임브로스 섬을 점령하여 아테네에 병합시킨 공로로 아테네의 유력 인사로 떠올랐다. 페르시아에 의해 이오니아 반란이 진압되자 위협을 느낀 밀티아데스는 기원전 492년, 자신의 모든 재산과 추종자들을 5척의 배에 싣고 아테네로 귀환했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곧바로 보수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의 정적 민주파는 그의 참주 경력을 문제삼아 그를 고소했다. 그러나 아리스테이데스를 비롯한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리고 기원전 492년 아르콘으로 선출되었다.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해 폐허가 된 밀레토스는 지대가 낮아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다.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해 폐허가 된 밀레토스는 지대가 낮아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다.

■ 제1차 페르시아 전쟁과 마라톤 전투 이후의 정치적 상황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군의 약점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았다. 페르시아군의 주무기인 활은 그리스의 중무장병(hoplites)의 방패와 갑옷을 뚫지 못할 것이고, 페르시아군의 주특기인 기마병은 그리스 산악 지역에서는 그리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유 시민으로 구성된 그리스 군대가 한 사람의 눈치만 보고 싸우는 군대에 비해 훨씬 강한 정신력을 발휘하기에 군 사기 면에서 그리스군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그가 기원전 490년 제1차 페르시아 전쟁 때 장군으로 선출된 것은 아테네와 그리스로서는 행운이었다.

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오스를 대장으로 하는 페르시아 함대의 그리스 원정은 마케도니아의 아토스 반도에서 풍랑을 만나 실패했다. 기원전 491년 다레이오스(다리우스)는 그리스의 모든 폴리스에 사신을 보내 ‘물과 땅’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대부분의 폴리스는 이에 굴복했지만 스파르타는 사신을 모욕하여 내쫓고, 아테네에서는 통역한 사람을 처형까지 하면서 거절했다. 이에 다레이오스는 기원전 490년 대규모 원정군을 보냈으나 마라톤 평원에서 밀티아데스가 이끈 아테네 중장비병에게 참패를 당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밀티아데스는 전보다 훨씬 더 큰 권력을 쥐고 폴리스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예전에 식민 폴리스의 참주였던 그가 혹시 독재자로 변신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의심이 밀티아데스로 하여금 어느 정도 이상의 권력을 얻는 것을 방해했다. 더욱이 이번에는 예전에 그를 지지했었던 귀족-과두정파의 일부도 민주파와 힘을 합쳐 그를 견제했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군사적 성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밀티아데스는 키클라데스의 페르시아군 거점인 파로스 섬을 점령하기 위해 기원전 489년, 70척의 전함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이 원정에 실패하고 무거운 벌금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얼마 있다가 그는 전투 중에 부상당한 상처가 곪아 죽었다.

밀티아데스가 떠나고 남은 힘의 공백을 차지하기 위해 민주파의 테미스토클레스와 참주정파의 히파르코스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이때 양 진영이 사용한 대결 방법은 도편 추방 제도였다. 기원전 487년부터 기원전 485년까지 3년 동안 아테네 시민들은 도편 추방 투표를 통해 참주가 될 위험이 있는 세 인물, 즉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친척인 히파르코스와 과두정파의 지도자이자 클레이스테네스의 조카인 메가클레스, 그리고 역시 클레이스테네스의 조카이며 알크마이온 집안의 우두머리인 칼리크세노스를 추방했다. 참주정으로 복귀할지 모른다는 일반 시민들의 불안을 잘 이용한 민주파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기원전 484년에는 페리클레스의 아버지이자 민주파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크산티포스가 추방을 당했다. 아마도 참주정파의 공격과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이라는 신분에 불안을 느낀 일부 민주파 사람들의 견제 심리가 빚어낸 결과인 듯하다. 그리고 기원전 482년에는 엉뚱하게도 정의롭고 공명정대하기로 이름 높은 아리스테이데스의 추방이 결정되었다. 도편 추방 투표가 독재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견제하기 위한 원래의 목적을 벗어나 ‘남들보다 잘나 보이는인물을 추방하는 데에 이용된 번째 예다.

이런 일련의 도편 추방의 결과로 테미스토클레스가 아테네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남게 되었다. 그는 페르시아군을 막기 위해서는 해군력을 크게 증가하는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아테네의 해군력을 증강시켰다. 그리고 그의 예측은 정확한 것이었다.

기원전 480 페르시아 제국의 크세르크세스 황제는 몸소 250만명이라는 천문학적 숫자의 군대와 1207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2 그리스 원정을 떠났다. 헤로도토스가 말하는 숫자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군대와 함대가 동원된 것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실험은 아테네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최대의 제국의 침입이라는 외부의 위협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 페르시아 전쟁의 운명은 곧바로 민주주의 운명과 맞닿아 있었다.

밀레토스 원형극장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밀레토스 원형극장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