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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전쟁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 비극적 운명까지 책임지다 / 유재원 외국어대 교수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7. 22. 21:16

국제국제일반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 비극적 운명까지 책임지다

등록 :2016-07-21 19:14수정 :2016-07-21 22:00

유재원 교수가 길에서 만난 그리스 사람, 역사, 문화
(14) 테르모필라이의 콜로노스 언덕에서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대왕이 지휘하는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과 결사대 300명, 테스피아이의 전사 700명이 싸워 그리스연합군이 전멸한 테르모필라이 전투가 벌어졌던 콜로노스 언덕에 그리스 국기가 놓여 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대왕이 지휘하는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과 결사대 300명, 테스피아이의 전사 700명이 싸워 그리스연합군이 전멸한 테르모필라이 전투가 벌어졌던 콜로노스 언덕에 그리스 국기가 놓여 있다.

기원전 480년 여름, 건너편에 에우보이아 섬이 보이는 테르모필라이의 해발 15m의 낮은 언덕 콜로노스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대왕이 직접 지휘하는 페르시아 대군이 언덕 북쪽의 평원에 진을 치고 있었고, 언덕 위에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과 그의 결사대 300명이 죽음을 각오하고 길목을 막고 있었다. 크세르크세스는 나흘 동안 매일 자신의 군대들로 하여금 시위를 하게 하여 그리스인들이 전투를 벌였다가는 중과부적으로 절대 살아 갈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 스스로 물러가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후퇴를 모르는 스파르타의 결사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크세르크세스는 닷새째 되는 날 총공격을 명령했으나 통로가 좁아 수적 우세를 이용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전투력에 있어 스파르타인들이 월등히 우세하여 피해만 보고 물러나야 했다. 두번째 날에는 페르시아의 최고 정예 부대이자 대왕의 근위병인 ‘아타나토이’(죽지 않는 자들)를 보내 공격하게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페르시아인들은 매번 공격 때마다 엄청난 전사자가 나오자 사기가 떨어졌다. 이렇게 이틀 동안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크세르크세스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중에 에피알테스란 그리스인이 산중에 양치기들이 다니는 오솔길이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오자 크세르크세스는 아타나토이를 그길로 보내 포위 공격을 하게 했다.

당시 테르모필라이를 지키던 그리스 폴리스의 연합군 수는 3930명이었다. 배반자 에피알테스의 안내를 받은 페르시아군이 자신들의 배후로 돌아 들어와 포위할 것이 확실해지자 레오니다스는 다른 나라 병사들에게 훗날을 기약하라며 후퇴하라고 말했다. 다른 폴리스의 군대는 그의 말을 듣고 떠났지만 그 근방에 자신들의 조국이 있는 테스피아이의 700명의 전사들은 어차피 그곳이 뚫리면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잘 알았기에 물러나지 않고 스파르타인들과 함께 최후까지 싸웠다. 전투가 시작된 지 사흘째 되는 날, 페르시아군에 포위당한 1000명의 그리스인들은 모두 장렬하게 산화했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뒤 아테네의 유명한 서정 시인 시모니데스는 여기에 와 조국의 자유를 위해 산화한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을 기리는 시를 남겼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라케다이모니아인(스파르타인)들에게 전하라.
그들의 명령에 따라
우리가 여기에 누워 있다고.

기원후 1세기에 이곳에 온 유명한 철학자 아폴로니오스는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느 산이 가장 높으냐고 물었을 때 “가장 높은 산은 바로 이곳의 콜로노스 언덕이다. 왜냐하면 자기를 희생한 고매한 자들이 법에 복종하여 하늘의 별에까지 닿는 기념비를 이곳에 세웠으니까”라고 대답했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를 아는 군대를 이길 군대는 없다. 자유를 위해 싸운 자들, 그들은 자유가 피가 낭자한 곳에서만 피어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유는 투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 없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테르모필라이에 있는 레오니다스 왕의 동상.
테르모필라이에 있는 레오니다스 왕의 동상.
■ 제2차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의 정치 상황: 아리스테이데스와 키몬

같은 해에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에서 탁월한 장군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의 활약에 힘입어 그리스 해군은 페르시아 함대를 궤멸시켰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기원전 479년, 스파르타의 왕 파우사니아스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은 플라타이아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페르시아 장군 마르도니오스의 10만 대군을 고전 끝에 물리쳤다.

전쟁 아테네의 상황은 심각했다.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식량과 주거 문제가 심각했다. 시민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집을 다시 세웠고 정부는 시민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치적 갈등은 계속되었다. 민주파의 지도자는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테미스토클레스였고, 보수파의 우두머리는 정직하고 공명정대하기로 이름난 아리스테이데스였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레이오파고스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이 득세하여 정권을 잡았다. 전쟁 중에 아레이오파고스 의회는 시민 사람당 8드라크마를 지급하여 무장을 시켜 싸울 있도록 도왔기 때문에 시민들은 이들에게 권한을 위임했다. 기원전 479년부터 기원전 476년까지 귀족계급을 지도한 사람은 아리스테이데스였다. 그는 오로지 아테네의 안정과 번영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정적 테미스토클레스의 개혁안을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진심으로 도왔다.

그러나 기원전 476 보수파에는 새로운 인물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바로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이었다. 훤칠한 키에 짙은 머리카락, 생긴 얼굴에 다정다감하고 상냥한 성격에 부자인데다 지도력이 있고 인심까지 후한 키몬은 기원전 476 장군으로 선출됐다. 그는 에우리프톨레모스 집안의 딸이자 알크마이온 집안의 손녀인 이소디케와 결혼했는데 결혼은 전통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었던 알크마이온 가문과 필라이다이 가문의 화해를 가져왔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테미스토클레스가 주도한 해군의 성장은 새로운 정치 상황을 불러일으켰다. 해군은 비싼 무구를 갖추어야 하는 중장비병과는 달리 돈이 들지 않았기에 최하위 계층도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울 있게 주었다. 전쟁 절대다수였던 서민 계층이 전쟁 중에 자신들이 공헌한 바를 깨달으면서, 도시 발전에 자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많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가난한 다수가 권력을 잡았을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알고 있었던 귀족들에게 정치적 불안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런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귀족들은 단결해야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때 적대적이던 귀족 가문을 하나로 묶을 있는 인물인 키몬이 등장하자 귀족들은 그를 우두머리로 받아들였다. 누구보다도 아리스테이데스가 앞장서 키몬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기원전 476 이후 아리스테이데스의 행적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일설에는 그가 새로 만들어진 델로스 동맹의 행정을 맡아 동맹국을 돌아다니며 할당금을 책정하고 걷는 일에 바빠 이상 국내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테네 정치에서 보수파와 민주파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던 그의 부재는 심각한 불행을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야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남들을 쉽게 무시하는 태도 때문에 많은 사람의 시기와 불신을 불러일으키는 테미스토클레스에게는 아리스테이데스의 부재가 치명적이었다.

엘레우시스에서 본 살라미스 섬. 기원전 480년 그리스군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휘 아래 살라미스 해협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궤멸시켰다.
엘레우시스에서 본 살라미스 섬. 기원전 480년 그리스군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휘 아래 살라미스 해협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궤멸시켰다.
■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의 최후

페르시아 전쟁끝난 직후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끈 테미스토클레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민중과의 소통을 게을리하는 성격을 가진 그는 명성과 인기를 이용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아테네의 미래는 바다에 있다는 확신에 있었기에 과감한 해양 정책을 추진했다. 정책은 시민들에게 가장 커다란 이득을 안겨 계획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의 시대에는 이해되기 어려운 이상적 계획이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의 해양 중심 정책이 미래에 갖는 의미와 중요성을 알려 민중의 이해를 돕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오직 결과로 이야기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시민들을 위해 옳은 일을 하는 민회가 자기를 지지할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들은 시민의 의심과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그의 정책이 스파르타를 불안하게 만들어 충돌을 일으킬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도 불안의 요소였다. 그럼에도 테미스토클레스는 민중에게 자신의 극단적인 계획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남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자유분방한 성격이 문제였다.

페르시아 패퇴시킨 테미스토클레스
‘옳은 일 하면 지지받을 것’ 망상에
이상적 계획 쫓으면서도 소통 소홀
귀족파에 의심사 도편추방 당해

적과 내통했다 혐의로 페르시아 망명
조국 침략하라 명령, 목숨 끊어 거부
‘영웅은 비극적 운명까지 감당한다’
그리스인 정신 마지막까지 지켜

그의 반대파들이 이를 이용했다. 보수파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야심이 끝이 없고, 야심이 아테네에 불행을 가져올 것이라고 공격했다. 여기에 앞장선 사람은 키몬이었다. 그리고 자리에는 그를 두둔하고 지켜줄 아리스테이데스가 없었다. 키몬이 등장한 이후 테미스토클레스는 정치적 힘을 급속히 잃어갔다. 그리고 기원전 471 아테네인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도편추방을 결정했다.

추방당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처음에는 스파르타의 천적인 아르고스에 몸을 맡겼다. 그러는 사이에 스파르타에서는 페르시아 전쟁의 다른 영웅인 파우사니아스를 배반죄로 처형했다. 테미스토클레스를 변호해 명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스파르타는 자신들에게 공공연하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테미스토클레스를 처벌할 것을 아테네의 보수 정권에 요구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469 키몬은 테미스토클레스를 페르시아와 내통한 죄명으로 고발했다. 아테네 시민들이 테미스토클레스를 부당하게 대하는 것을 분하게 여긴 그의 친구 명이 페르시아와 내통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것이 일의 발단이었다. 친구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음모에 가담하라고 이야기했을 그는 펄쩍 뛰며 말렸다. 그리고 그쯤에서 음모를 포기할 것으로 생각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친구를 고발하지 않았다. 테미스토클레스가 망명 있는 동안 음모가 발각되어 친구는 사형을 당했다. 그리고 그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테미스토클레스에게도 혐의가 있음이 밝혀지자 그를 소환한 것이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재판 소환에 응하지 않고 여러 폴리스를 전전하다가 끝내는 페르시아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그는 개의 그리스 폴리스의 참주로 임명되어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그가 자신에게 복종만 하는 노예들 사이에서 행복할 수는 없었다. 그의 영혼이 바란 것은 아고라와 극장에서 그를 보고 환호하는 시민들의 “브라보” 소리였다.

기원전 450 페르시아 황제가 페르시아 함대를 이끌고 아테네를 침략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희대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의 생애에 조국으로 쳐들어가는 불명예를 덧붙이기를 거부하고 친구들과 마지막 향연을 벌이면서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망명을 하고 쫓기는 동안에도 그는 자신을 배반한 아테네 시민들이 원망스러웠겠지만 조용히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받아들일 조국 아테네를 배반하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하기에 그의 성품은 너무 고매했다.

그의 유일한 유언은 자신의 뼈를 몰래라도 조국에 가지고 가서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기원전 395년에 아테네 시민들이 유언을 들어주어 그의 뼈를 가져와 그가 건설한 페이라이에우스 항구에 모셨다고 믿는다. 뒤늦게나마 그의 공적이 인정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의 일부는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리스의 자유와 이상을 위해 온몸을 던져 나라를 구한 2 페르시아 전쟁의 명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와 파우사니아스는 이렇게 순전히 정치투쟁 때문에 희생되었다. 그리고 사람의 영웅은 운명까지 책임진다는 그리스인들의 정신에 따라 담담히 자신의 죽음을 맞았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