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희랍어 자료

카를 대체의 문예부흥 / 박승찬 가톨릭대 교수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7. 29. 22:08

문화책과 생각

‘교육은 백년지대계’ 서구 학문의 기초를 닦다

등록 :2016-07-28 19:21수정 :2016-07-28 20:20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6) 카를 대제의 문예부흥

카를 대제와 앨퀸, 장빅토르 슈네츠(1787~1870), 파리, 루브르박물관. 카를 대제와 앨퀸은 교육 개혁의 진정한 성과를 얻기 위해 인내심을 갖고 교육의 열매가 숙성되기를 기다렸다.
카를 대제와 앨퀸, 장빅토르 슈네츠(1787~1870), 파리, 루브르박물관. 카를 대제와 앨퀸은 교육 개혁의 진정한 성과를 얻기 위해 인내심을 갖고 교육의 열매가 숙성되기를 기다렸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다.” 수없이 들어서 당연히 여겨지는 이 말이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서는 점차 무색해지고 있다. 맞춤형 보육과 학교 무상급식은 차치하고라도 국가의 미래에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대학 교육마저 위협받고 있다. ‘링크(LINC) 사업’, ‘프라임(PRIME) 사업’, ‘코어(CORE) 사업’ 등 근시안적인 프로젝트들에 거의 대부분의 대학이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다. 이런 사업을 기획하는 이들은 소위 시장의 원리를 그대로 교육 현장에 적용하려 한다. 그래서 막대한 자본만 투자하면 교육의 성과도 짧게는 1~2년, 길어 봤자 3년이면 다 수확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듯하다. 이와 같은 교육계 풍토에 경종을 울리는 인물을 우리는 중세 시대에 만날 수 있다. 그가 바로 ‘샤를마뉴’라고도 불리는, ‘카를 대제’(Karl der Große, 742~814)이다. 프랑크 왕국을 통일한 정복자로 알려진 그가 도대체 어떤 일을 했기에 우리 교육의 멘토가 될 수 있을까?

서방 세계의 최고 통치자, 카를 대제

카를 대제는 742년께, 프랑크 왕국의 왕 피핀(Pepin the Short. Pippin)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카를 대제의 가장 큰 업적은 물론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일이다. 프랑크족의 전통적인 보병대를 중무장 기병대로 탈바꿈시켜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헝가리 지역을 손에 넣었다. 또한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무역을 부흥시키는 등 로마 멸망 이후 유럽에 등장한 가장 강력한 정부를 구성했다.

카를 대제는 군사적 승리와 문화적 업적으로 인해 서유럽인의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더욱이 800년에는 로마 교황에게서 황제의 관을 받음으로써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그때까지 황제라면 으레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황제를 떠올렸고, 그만이 로마 황제의 정통 계승자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비잔틴 황제는 대부분의 실권을 잃어버렸으면서도 여전히 서유럽을 제국의 변방 정도로만 간주했던 것이다. 카를 대제의 황제 대관은 프랑크 왕국에 통일감과 목적의식을 부여하는 데 기여했으며, 찬란한 서유럽 문화 형성을 향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군사적 승리 하고 문예부흥 일으켜
교육 쇄신 절감…학문적 기초 마련

프랑크 왕국 교육 개혁가 앨퀸 발탁
아헨 궁정학교, 국제적 아카데미로

서적 생산과 도서관 설립 진두지휘
필사본 만들어 성경·주해서 전수

카를 대제 초상화,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뉘른베르크, 게르만 국립박물관.
카를 대제 초상화,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뉘른베르크, 게르만 국립박물관.

카를 대제는 수많은 전쟁을 치르느라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왕위에 올랐을 때 글을 읽기는 하지만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렇지만 카를 대제는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고, 로마 제국의 신화, 언어, 문화 등에 매혹되어 광대한 제국을 문화적으로 쇄신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아헨(Aachen)에 있던 자신의 왕궁에 재능 있는 학자들을 모아 고대 문학의 ‘문예부흥’(Renaissance)을 일으켰다. 동시에 카를 대제는 자신을 그리스도교 제국 전체의 황제라고 생각해서 그리스도교의 제도와 신학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

이 모든 계획을 실현하려면 매우 뛰어난 지성인이 필요했으나 프랑크 왕국 내에서는 적임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카를 대제는 이탈리아 파르마의 회의에 참석했다가 눈에 띄는 학자를 발견했다. 중년에 접어든 그 학자는 모든 분야의 지식이 해박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리스어와 라틴어까지 능통했다. 카를 대제는 그야말로 프랑크 왕국의 교육을 개혁하기에 최적임자라는 확신을 가졌다. 이 학자가 바로 잉글랜드의 요크지역 출신 ‘앨퀸’(Alcuin, 약 735~804)이었다. 요크는 8세기 무렵 그리스 출신 수도자가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된 이래 학교와 도서관이 발전하면서 상당한 학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앨퀸은 782년에 카를 대제의 명으로 아헨의 궁정학교를 새로이 재건하는 일에 착수했다. 과거에는 궁정학교가 왕실이나 귀족 자제들이 기사도를 훈련하는 목적으로만 존속해왔다. 카를 대제와 앨퀸의 개혁은 궁정학교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로 인해 전 유럽에서 훌륭한 학생들이 이 ‘국제적인 아카데미’로 모여들었다. 카를 대제는 궁정학교의 지식인들에게 다양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과 함께 온천욕을 하는 동안에도 신학이나 철학 문제에 대해 논쟁을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앨퀸이 마련한 스콜라철학의 기초

프랑크 왕국 안에 훌륭한 교사가 부족한 것도 문제였지만 교육에 필요한 인프라도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앨퀸이 왕국 내의 도서관 전체를 조사해 본 결과, 장서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앨퀸이 우선 도서관부터 건립하자고 제안했을 때, 카를 대제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앨퀸은 도서관을 건립하기 위한 예비작업으로 우선 값비싼 양피지를 확보해 줄 것을 청했다. 결국 카를 대제의 명으로 프랑크 왕국 전체에서 생산된 양피지들은 아헨의 궁정학교와 투르에 있는 성 마르티누스 수도원 필사실로 운반되었다. 이 모든 일을 총괄한 앨퀸은 경험이 없는 새내기 필경사들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솔선수범하는 태도로 서적의 생산과 도서관의 설립을 진두지휘하여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앨퀸은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한 제국을 만드는 데 적임자는 카를 대제라 여겼기 때문에 그의 개혁을 돕는 데 헌신했다. 앨퀸은 교육 개혁에 필요한 회의에 참석할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어두운 필사실에서 보냈다. 필사 작업은 추운 겨울에는 손이 동상에 걸릴 정도로 고생스러웠지만, 그리스도교 제국이 완성되는 이상을 꿈꾸면서 펜을 놓지 않았다. 현재 서양 문화가 자랑하는 양피지 필사본들 중 가장 오래된 사본 상당수가 그 당시 카를 대제의 명으로 작성된 것이다.

특히 앨퀸은 이 작업을 위해 코르비(Corbie) 수도원에서 개발된 새로운 문자체를 활용했고, 여기서 현재 사용되는 알파벳의 소문자가 유래했다. 카를 대제 이전까지만 해도 대문자만을 주로 사용했고, 각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카를 대제는 새로 개발된 글자체의 활용을 적극 장려했다.

카를 대제의 대관식, 프리드리히 카울바흐(1822~1903), 19세기, 뮌헨, 막시밀리안 박물관. 카를 대제의 황제 대관은 프랑크 왕국에 통일감과 목적의식을 부여하는 데 보탬이 되었고, 서유럽 문화 형성의 이정표가 되었다.
카를 대제의 대관식, 프리드리히 카울바흐(1822~1903), 19세기, 뮌헨, 막시밀리안 박물관. 카를 대제의 황제 대관은 프랑크 왕국에 통일감과 목적의식을 부여하는 데 보탬이 되었고, 서유럽 문화 형성의 이정표가 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 많은 고전 저작들이 사라져서 전수되지 못했다. 그러나 카를 대제가 명한 필사작업을 통해 서유럽에 남아 있던 필사본의 숫자는 네 배 이상 증가했고, 그 후에는 전수된 책이 사라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때 필사된 책들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했던 것은 역시 성경과 그 주해서들이었다. 그런데 카를 대제의 교육 개혁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은 여전히 문맹으로 남아 있었다. 이들에게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은 성경 앞표지를 금과 보석, 또는 상아 조각으로 아름답게 장식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이게 되었다.

카를 대제와 앨퀸이 함께 이룬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통해 스콜라철학이 태동되었다. 그러나 이 문예부흥은 귀족과 수도자라는 소규모 사회 집단의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에 머물렀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 교육 개혁의 효과가 유럽 사회 전반에 미치기 위해서는 백년 이상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빠른 시간 안에 변화되는 부분도 있지만, 교육의 진정한 성과는 오랜 기다림과 인내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카를 대제는 자신의 대제국이 진정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발전해야 함을 절감했다. 그는 조급해하지 않고 백년 뒤에야 꽃피게 될 학문적 기초를 마련하여 교육이 ‘백년지대계’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또한 앨퀸은 사심 없이 자신을 희생하여 교육을 쇄신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교육 정책 입안자와 교수들에게 표본이 되었다. 교육자들은 앨퀸과 같이 뚜렷한 사명의식을 지니고 스스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한편 교육당국과 학부모는 카를 대제와 같이 인내심을 가지고 교육의 열매가 숙성되기를 기다려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노력할 때에야 비로소 미래 세대에 희망을 주는 교육이 실현될 것이다.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