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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과학자들에게 기억이란...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8. 10. 19:26

과학과학일반

신경과학자들에게 기억이란 빙산, 생채기, 정체성…

등록 :2016-08-10 11:01수정 :2016-08-10 11:39

[오철우 기자의 사이언스온]

‘기억의 집’은 뇌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을까? 기억의 메커니즘을 밝히려는 신경과학 연구가 활발하다. 픽사베이
‘기억의 집’은 뇌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을까? 기억의 메커니즘을 밝히려는 신경과학 연구가 활발하다. 픽사베이

“기억이란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해요.”

30년째 ‘기억’을 연구해온 신경과학자인 정민환 카이스트 교수(생명과학과)는 기억 연구자한테 기억이란 무엇인지 묻자, ‘나’의 인성과 세계관을 만드는 기억의 의미를 이렇게 전해주었다.

기억은 역사, 철학, 문학의 오랜 주제이지만 한 세기 넘는 생물학적 연구 덕분에 이제 신경과학의 관점에서도 좀더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됐다. 정 교수는 30년 전에도 기억 연구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당시는 기억 연구의 황금기로 기억되는데, 기억과 관련해 (신경세포들을 잇는) 시냅스에 생기는 여러 물리적, 생화학적 변화의 메커니즘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심리학이 주도하던 기억 연구에 생물학이 등장하던 시기이었습니다. 기억 연구자들이 ‘유레카’를 경험한 시절이었죠.”

근래 몇 년 새 또다른 변화가 오고 있다. 한진희 카이스트 교수(생명과학과)는 “지난 10년 동안 기억 연구가 비약적 발전을 이뤄 기억 세포의 존재를 입증하고 기억 저장 세포가 결정되는 원리가 발견되고 기억 세포를 직접 조절해 기억이 변형될 수 있음이 밝혀져왔다”며 “앞으로 자극과 반응 식의 단순 기억을 넘어 시공간의 의미를 담는 복잡한 기억에 대해 답을 주는 연구들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기억은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연결이며 한 사람의 성격, 정체성을 이루는 기록 저장이기도 하다. 기억은 신경세포들의 연결이며 신호의 생성, 저장, 복원(회상)이다. 기억은 수많은 신경세포의 활성과 억제가 빚는 협주다. 기억은 소통과 공감의 원천이고 집단기억을 공유하는 자원이다.

신경과학자들은 기억 연구에서 새로운 발견이 잇따르지만, 여전히 기억의 실체와 메커니즘을 한마디로 충분히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 기억은 어디에 어떻게 저장될까? 다양하고 복잡한 기억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기억이 저장되는 ‘기억의 흔적’ ‘기억의 장소’를 뜻하는 엔그램(engram)은 100여년 전 가설적인 개념으로 등장해, 이제 분자와 세포 수준에서 그 실체를 약간씩 드러내고 있다.

기억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들은 과연 기억을 어떻게 설명할까? 기억 연구자들한테 물어보았다.

① 기억이란 ______이다. 왜냐하면 _______.

② 기억 연구자로서 흥미롭고 중요한 주제 또는 물음을 꼽는다면?

기획·정리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


‘나’의 과거이자 미래이다

① 기억이 없다면 나에게 어제란 없을 것이며 내일을 계획할 수 없기에 미래도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이 없는 나는 늘 현재에 머물게 된다. 실제로 해마를 포함한 내측두엽 손상 환자는 서술기억을 만들지 못해 항상 현재에 머물러 있는 듯한 행동을 보인다.

② 단순한 하나의 사실이나 장면이 아니라 시간 속에 진행되는 스토리나 멜로디 같은 정보가 어떻게 저장되고 회상되는지 알아내는 것이 흥미로운 다음 주제가 될 것이다. 강봉균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바다에 흘러가는 빙산이다

① 빙산의 일각이란 말처럼 기억의 일부는 우리가 의식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의식할 수 없다. 오랫동안 독특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빙산은 개인이 지닌 독특한 의식적, 무의식적 기억이다. 각 빙산이 독특한 모양으로 서로 달리 흘러가듯이 개인의 독특한 기억형상은 삶의 바다에서 각자 행동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때로는 충돌을 만들지만 때로는 건설적인 진화의 힘이다.

② 무의식 기억과 의식적 기억의 형성과 상호작용이다. 김형 성균관대 글로벌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

뇌에 생기는 생채기와 같다

① 기억이 형성되고 변형되고 사라지는 것은, 울창한 숲을 맨몸으로 걸어갈 때 생기는 상처들, 그리고 상처가 감염이나 치유에 의해 번지거나 아물어 흉터로 남는 현상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기억은 환경을 겪고 이를 그대로 저장하거나, 경험한 외부 환경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고를 하거나 기존 기억을 변형한다. 몸 상처와 달리 뇌에 생긴 경험의 상처(기억)는 능동적으로 새로운 상처(기억)와 기능을 만들 수 있다.

② 뇌에 존재하는 비신경세포와 신경-혈관단위체가 기억 형성과 유지에 어떻게 관여하는가이다. 박형주 대구경북과학기술원, 한국뇌연구원 겸무교수

생존이다

① 추억을 간직하는 것도 기억의 일부이지만 기억은 낭만적인 이유만으로 존재하진 않는다.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이뤄지는 모든 운동과 행동은 기억에 의존해 이뤄진다. 단순하게는 방문을 열고 닫는 법과 냉장고에서 그릇을 꺼내는 방법부터 복잡하게는 직장을 찾아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 등 우리는 뇌세포의 기억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선 한순간도 생존할 수 없다. 따라서 기억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진화의 산물이라고 본다.

② 그것은 ‘기억의 자연스러움’이다. 이인아 서울대 뇌인지과학과 교수

나의 정체성이다

① 평생 쌓아온 기억에 의해 우리의 인성과 세계관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기억이 없다면 유전자에 프로그래밍 된 본능적인 행동만이 가능할 것이다.

②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이 시간이 흐르며 일부는 망각되고 일부는 재구성되어 오래 지속되는 장기기억으로 변환되는 과정이다. 정민환 카이스트 교수, 기초과학연구원 시냅스뇌질환연구단 부단장

순서 정하기이다

① 일상에서 좀더 중요한 사건이나 단서는 우리 마음에, 뇌의 기억회로에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건이나 단서는 뒷자리로 밀리다가 나중에 그 자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개체가 태어난 뒤 경험하는 다른 사건들에 의해 변화하면서 기억의 서열은 끊임없이 그 위치를 바꾸게 될 것이다.

② 우리가 경험한 외부 사건이 어떻게 신경세포 활동으로 부호화하며 표상되는가일 것이다. 최준식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테세우스의 배’이다

① ‘테세우스의 배’는 실체에 대한 철학적 패러독스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배를 구성하는 부품이 낡아 하나씩 교체하다가 다 바뀌면 그건 과연 같은 배일까, 다른 배일까? 기억도 비슷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을 지탱하는 생물학적 물질은 하나씩 교체되지만 우리는 이를 다른 기억으로 인지하진 않는다. 기억 자체는 동일하겠지만 그것을 장식하는 색깔은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하는 게 아닐까.

②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기억은 과연 같은 기억일까, 하나의 기억에 대한 엔그램은 몇 개가 존재할까, 기억도 이식이 가능할까 등이다. 한진희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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