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만든 평화’ 얼마나 갈 것 같은가? | |
고전 오디세이 22 야누스 신전과 평화
내전의 원인은 다름 아닌 정의의 실종이었다. ‘각자의 몫이 각자에게’돌아갔다면, 로마는 내전을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 ‘분배 정의’가 작동할 때 평화의 진짜 얼굴 ‘화평’이 드러나고 화합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헌 해의 문이 닫히고, 새 해의 문이 열렸다. 이 문을 열고 닫는 신이 야누스다. Ianus라는 말은 “오고 가는” 의미의 동사 ire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야누스는 연말연시의 변환만을 관장하지 않는다. 세시를 관리하면서, 아울러 세상사 가운데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전쟁(Bellum)과 평화(Pax)”의 전환을 알리는 일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야누스가 이 업무까지 맡게 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사연인즉, 로마가 건국한 기원전 7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비우스의 이야기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고, 아이들은 청년이 되었다. 그들은 외양간과 소들을 돌보는 것으로 성이 차질 않았다. 산과 계곡을 휩쓸고 다니면서 사냥에 열중했다. 사냥을 통해서 몸과 마음이 강해졌다. 때로는 산짐승을 사냥하기도 하고, 때로는 강도떼의 약탈물을 빼앗아 자신들을 따르는 무리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리비우스, <로마사> 제1권 4장)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재위 기간 기원전 753~716년)의 성장기다. 그가 사냥과 약탈을 일삼았던 일종의 ‘조폭’ 집단의 두목이었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출발이 어떠했든 간에 로마는 세계를 통치하는 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로마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건국자인 로물루스의 강병(强兵)에 입각한 강국(强國)정책 덕분이었다. 로물루스는 실력이 있을 때만 평화가 보장된다고 믿고 있었다. 또 이를 제대로 실천했다. 물론 그의 강경 정책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로마를 방어하는 데에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한계도 금방 드러났다. 주변 국가들이 로마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리적 군사력에 의존하는 로마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깡패 집단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런 사정으로 말미암아, 로마는 상시적 전쟁의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전쟁의 상시적 위협에 압박받고 있었던 로마에 평화를 가져다준 이가 있었다. 바로 로마의 제2대 왕이었던 누마(재위기간 기원전 715~671년)다. 로마가 이탈리아의 중심부를 차지하고서 주변 국가들을 위협했기에, 이들 국가는 로마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단지 산채를 차지하고 있던 무리 정도로 간주했다. 그런데 주변 국가의 시민들이 로마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든 시민이 하나로 뭉쳐 신들을 경외하고 무서워할 줄 아는 국가로 성장한 로마를 폭력으로 상대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리비우스, <로마사> 제1권, 21장) 인용은, 로마가 처음엔 국가로 인정받지도 못했다가, 나중에 주변 국가의 존경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탈리아에도 평화가 깃들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어쩌면 서양의 정치사에서 평화의 힘(vis pacis)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고, 가장 잘 활용한 이가 바로 누마일 것이다. 원래, ‘누마’(Numa)라는 이름은 이성 또는 규범을 뜻한다. 그리스말로 규범을 뜻하는 ‘noema’와 친척 관계에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누마가 로마의 통치 방식을 로물루스의 강경 정책에서 평화 정책으로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상시적으로 치러야 하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로마인들의 심성이 너무 포악해지고 사나워져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였다. 도저히 한곳에서 얼굴을 맞대며 살기 어려울 정도였다. 강경 정책이 주변 국가와의 영구적 평화는 물론, 로마 시민들의 내적 평화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누마로 하여금 평화 정책을 추진하게 만든 이유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조폭 집단’ 로마를 바꾸기 위해 누마가 펼친 평화 정책은 이렇다.
아직 로마는 물리적 힘과 군사력에 기초해서 건설된 신생 국가였다. 그래서 누마는 법과 법률과 예법의 정비를 통해서 나라가 온전히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제도의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전쟁을 하느라고 사람들의 심성이 사나워져 있었기 때문에, 특히 전쟁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이런 제도를 친숙하게 여기고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간파한 누마는, 사나워져 있는 시민들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무기를 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중략) 따라서 국가도 법과 처벌의 두려움이 아닌 신의와 서약에 기초해서 다스려져야 한다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다. (리비우스, <로마사> 제1권, 19장-21장) 누마의 평화 정책을 통해서, 로마는 주변 국가와 평화 체제를 구축하고 더 나아가 단지 “힘만 센 나라”가 아니라 “존경받는 나라”, 이른바 ‘국격’(國格, dignitas)을 갖춘 나라로 거듭났다고 리비우스는 전한다. 이렇게 형성된 평화 체제에 입각해 로마는 주변 국가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였고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통일하였으며, 마침내 지중해 세계의 통치자로 우뚝 서게 된다. 만약 로마가 군사력에 입각한 힘만 내세웠다면 이런 역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로마가 주변 국가로부터 “존경받는 나라”로 인식되고, 그렇게 자리잡았기에 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모두 누마가 기초를 닦은 평화 정책 덕분이리라. 어찌되었든 누마는 평화를 염원하는 신전을 하나 세우는데, 그게 바로 야누스 신전이다.
누마는 (중략) 전쟁과 평화의 시기를 구분해주는 표시로 야누스의 신전을 세웠다. 야누스 신전의 문이 열려 있으면 국가가 전쟁 중임을, 닫혀 있으면 로마와 주변의 모든 나라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음을 표시한다. (리비우스, <로마사> 제1권, 19장) 하지만 누마의 이런 염원에도 불구하고, 로마 역사에서 야누스 신전의 문이 닫힌 것은 단 두 번 밖에 없었다. 한 번은 누마의 재위기간이고, 다른 한 번은 아우구스투스가 황제로 등극했을 때였다. 결국 로마는 상시적으로 전쟁을 벌인 셈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누마가 미처 보지 못했던 사실이 하나 있다고 본다. 그것은, 평화(平和)를 뒤집으면 전쟁이 아니라 화평(和平, concordia)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누마는 평화를 뒤집어볼 줄 몰랐던 것이다. 누마는 법률과 제도를 잘 정비해 놓으면 평화가 깃들 것이라고 생각했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하지만 야누스 문은 닫히지 않았다. 평화는 법률과 제도를 정비한다 해서 저절로 찾아오는 것도, 그렇다고 전쟁에서 승리한다 해서 찾아오는 것도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평화는 결코 전쟁의 전리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외부세계와 벌인 전쟁의 전리품으로 쟁취한 평화를 여러 번 누렸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또다른 종류의 전쟁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이 바로 내전(Bellum civile)이다. 내전을 피하는 방법으로 로마가 끊임없이 외전을 벌였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쩌면 내부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로마는 외부의 적을 끊임없이 이용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로마 내부의 갈등과 긴장을 치유하는 방법은 근본적으로 외전이 아니라, 내부 세계의 화평 정책이었다. 참고로, ‘화평’은 라틴어 concordia를 옮긴 말이다. 원래는 화합(和合)을 뜻하지만, 나는 ‘화평’으로 옮기고자 한다. 왜냐하면 화합이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이 제대로 돌아갈 때”, 그러니까 정의가 제대로 작동할 때 드러나는 부수적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화합의 원인으로서 실천적 행위와 활동을 뜻하려 할 때에는 ‘화평’이 더 나은 옮김일 것이다. 어찌됐든 로마는 내치를 할 때 화평 정책을 취하지 않았다. 대신에 전쟁을 선택했다. 따라서 외전의 전리품으로 평화를 잠시 누렸더라도, 로마는 외전보다 더 무서운 내전에 끊임없이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로마를 위협한 것은 외전보다 내전이었다. 다음은 화평 정책의 실패로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시기에 호민관을 지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연설이다.
이탈리아를 위해서 몸 바쳐 싸운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동으로 주어진 공기와 햇빛뿐이오. 쉴 보금자리도 돌아갈 고향도 없소. 처와 자식을 이끌고 이곳저곳으로 떠돌고 있을 뿐이오. 만약 로마의 장군들이 전투에 앞서서 로마 군인들에게 조상들의 묘지와 신전을 사수하라 명령한다면, 이는 거짓말에 불과할 것이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고 굳게 사수해야 할 사당과 분묘를 가지고 있는 군인이 몇이나 된단 말이오? 대부분의 군인들이 지켜야 할 것을 모두 잃어버렸기에 말이오. 그들은 [결국] 다른 사람들의 부와 사치를 위해 싸우다 죽을 뿐이오. 그들은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그들은 손에 한 줌의 흙도 쥐지 못했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제9장)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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