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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의 남자에게] 시간이 미쳤다!

이윤진이카루스 2011. 1. 27. 09:13

[김정운의 남자에게] 시간이 미쳤다!
» 김정운 명지대 교수·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벌써 한달이 지났다. 2011년 달력을 새로 걸고, 의미있게 살아보리라 새롭게 마음도 고쳐먹었지만, 벌써 한달이 지난 거다. 말도 안 된다. 깊은 한숨까지 나온다. 정말 시간이 미쳤다.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자꾸 빨리 가는 걸까? 심리학자들의 대답은 아주 단순명료하다. 기억할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내용이 많으면, 그 시기가 길게 느껴지고, 전혀 기억할 게 없으면 그 시기가 짧게 느껴진다. ‘회상효과’(Reminiscent Effect)다. 인생에서 어느 시절의 기억이 가장 뚜렷하냐고 물으면 대부분 학창시절을 언급한다. 노인들도 학창시절의 기억은 아주 생생하게 기억해낸다. 가슴 설레는 기억이 많은 그 시절의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렀다. 모두가 새로운 경험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시기부터 시간은 아주 미친 듯 날아가기 시작한다.

지난 한달은 더 그랬다. 당연하다. 정신없이 바쁘기만 했지, 기억할 만한 일들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죄다 반복적으로 어쩔 수 없이 처리해야 하는 일들뿐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2011년도 불 보듯 뻔하다. 1년 뒤, 난 또다시 머리카락 쥐어뜯으며 미친 시간에 한숨 쉴 것이다.

한 집단의 역사는 집단적 기억이다. 기억을 통한 의미부여의 과정을 통해 한 집단의 아이덴티티는 유지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역사를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기억을 통해 지속적으로 의미부여를 해야 한다. 그래야 살만해진다. 기억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는 내 삶에 전혀 의미부여가 안 된다는 뜻이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죽기 직전의 그 짧은 몇 초의 시간이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지며, 인생의 중요한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짧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본능적 행위다.

시간이 빨리 지난다고 느낄수록 긴장해야 한다. 의미부여가 안 되니 쉽게 좌절하고, 자주 우울해지고, 사소한 일에 서운해진다. 이런 식이라면 ‘성격 고약한 노인네’가 되는 것은 아주 순식간이다.

삶의 속도와 기억의 관계에 관한 심리학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이 ‘미친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기억할 일들을 자꾸 만들면 된다. 평소에 빤하게 하던 반복되는 일들과는 다른 것들을 시도하라는 이야기다. 인생과 우주 전반에 관한 막연하고 추상적인 계획은 아무 도움 안 된다. 아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들을 시도해야 한다.

오늘도 술잔 앞에 두고 부하직원들에게 한 이야기 하고 또 하지 말자는 거다. 이제 다 외우는 윗사람 이야기 참고 또 들어줘야 하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면서 도대체 왜들 그러는가. 이 추위를 뚫고 집까지 한번 걸어가보는 거다. 올레길을 걷는다며 돈 들여 제주도까지 갈 일이 뭐가 있겠는가. 오늘 직접 해보는 거다. 너무 무모하다 싶고, 추위가 두려워져 비겁해지면 한강 다리라도 한번 걸어서 건너본다. 도대체 평생 살면서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본 기억이 있긴 한가.

시립미술관이나 덕수궁미술관에 들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요즘 좋은 전시회 정말 많이 한다. 해설방송 헤드폰 끼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자세하게 그림을 감상하는 거다. 눈과 귀로 느껴지는 새로운 문화적 경험은 침대에 누워 늦게까지 텔레비전 채널이나 돌리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여자 속옷 광고 홈쇼핑에 채널 멈추고 집중하다가 제풀에 흠칫 놀라는 촌스런 행동은 이제 그만 하자는 거다. 우리 주위에 그런 야한 속옷이 어울리는 여자는 이제 없다. 아, 과거에도 없었다. 미안하다. 아무튼….





심리학의 창시자인 빌헬름 분트는 인간이 경험하는 ‘현재’의 길이를 측정했다. 약 5초 정도라고 한다. 우리는 불과 5초만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과거나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재’를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5초의 객관적 단위는 주관적 경험에 의해 얼마든지 팽창될 수 있다. 제발 현재를 구체적으로 느끼며 살자는 이야기다. 그래야 시간이 미치지 않는다. 명지대 교수,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기획연재 : 김정운의 남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