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라플라스의 뉴턴주의에 진짜 뉴턴은 없었다 / 맹성렬 우석대 교수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9. 3. 21:07

과학과학일반

라플라스의 뉴턴주의에 진짜 뉴턴은 없었다

등록 :2016-09-03 14:32수정 :2016-09-03 14:36

[토요판] 과학
뉴턴과 라플라스, 그리고 피라미드의 비밀

뉴턴, “하늘·땅 모두 자연법칙 적용”
2천년 유지된 서구 믿음체계 깨버려
정확한 달의 공전 반경 알 수 없어
성경 근거해 지구 크기 추정하기도
유대인 지식 피라미드에 도움 주장

라플라스, ‘뉴턴주의화’에 앞장서
신과 무관한 완전한 자연법칙 제시
성서 유대신화 허상 지우려 노력
고대 이집트 문명 수준 높이 평가
기독교 연대기 무력화하려는 의도

아이작 뉴턴
아이작 뉴턴
▶ 완벽한 자연법칙에 의해 스스로 돌아가는 결정론적 세계관. 우리는 흔히 그 출발점을 뉴턴으로 삼곤 한다. 분명 뉴턴은 자연법칙이 하늘이나 땅 구분 없이 동일하게 적용됨을 증명해 보였다. 서구에서 2천년 이상 지속된 공고한 믿음체계를 깨뜨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엔 라플라스의 색채가 강하게 입혀져 있다.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관이라고 알려진 사상은 뉴턴의 생각과 어떻게, 얼마나 다른 걸까.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영국 왕립학회는 2005년 일반인과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인슈타인 대 뉴턴’이라는 대토론 행사를 벌인 뒤 두 가지 설문 내용으로 투표를 실시했다. 첫째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기준으로 누가 과학에 더 큰 기여를 했는가였고, 둘째는 누가 인류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쳤느냐였다. 그런데 두 가지 모두에서 뉴턴이 아인슈타인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아인슈타인이 현대물리학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잘 알고 있는 과학자들도 압도적으로 뉴턴을 꼽았다. 아마도 광속에 근접하는 속도에서나 적용되는 상대성이론보다 실생활에서 사람들이 흔히 접할 수 있는 고전역학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는 이유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이어받은 중세시대 학자들은 성스러운 속성을 지니는 천상에서의 자연법칙과 세속적인 속성을 지니는 지상에서의 자연법칙이 다르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뉴턴은 자연법칙이 하늘이나 땅 구분 없이 동일하게 적용됨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서구에서 2천년 이상 지속된 공고한 믿음체계를 깨버렸다.

그런데 이처럼 인류 지성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과학자에게 숨겨진, 아주 엉뚱한 면모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가 죽은 지 2세기가 지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주로 신학과 연금술에 관한 그의 글들은 대과학자의 면모와 걸맞지 않은 아주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뉴턴의 유고, 그중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신의 섭리를 강조한 신학 저술 내용은 널리 알려진 그의 과학과 너무 동떨어진 것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등 주류 신학과도 크게 충돌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그나마 과학적인 측면을 다룬 내용이 있긴 한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성한 큐빗’과 ‘왕의 큐빗’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은 그가 <프린키피아>를 출판하기 수십년 전에 이미 머릿속에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법칙이 옳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방도가 없었다. 그는 사과처럼 달 또한 지구 중력에 의해 끌어당겨지며, 그 힘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증명하려면 무엇보다도 정확한 달의 공전 반경을 알아야 했다. 달의 공전 반경은 지구 중심에서 달 중심까지의 거리로, 당시엔 이 값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았다. 천문 관측을 통해 지구 표면에서 수직 상방에 위치한 달까지의 거리는 측정할 수 있었지만, 지구 중심에서 지표면까지의 거리, 즉 지구 반지름을 측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 에라토스테네스에 의한 지구 둘레 길이 측정치인 25만2천 스타디아가 있긴 했다. 이 값을 이용하면 지구 반경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30%까지 차이 나는 여러 고대 그리스 스타디움 단위들이 존재한 탓에, 지구 크기가 정확히 얼마인지를 알 수 없었다.

뉴턴은 지구 크기에 대한 정보를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보기에 성경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기원전 4000년께에 처음 에덴동산에서 문명이 시작됐다. 아담이 신 야훼로부터 우주의 진리가 담긴 지식을 받았고 이를 후손들에게 전해주었다. 뉴턴은 기원전 1700년쯤에 이집트에서 재상을 지냈던 요셉이 이집트를 잘 통치한 것은 그런 신성한 지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유대인들은 이집트인들의 박해를 받기 시작했고,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됐다. 그런데 요세푸스 기록에는 유대인들이 원래부터 피라미드 건설 기술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적혀 있어 뉴턴은 유대인들의 신성한 지식이 피라미드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했다. 모세가 유대인들을 데리고 이집트 땅을 떠나던 때인 기원전 1500년 무렵 이집트 파라오는 람세스 3세인데, 헤로도토스는 그다음 왕이 기자 대피라미드를 건설한 쿠푸라고 잘못 기록했다.(쿠푸 왕은 기원전 2500년께인 구왕국 시대의 파라오다.) 따라서 뉴턴은 유대인들로부터 전수받은 지식이 기자 대피라미드에도 남아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646년 옥스퍼드대학 천문학과 존 그리브스 교수가 기자 대피라미드의 내부를 탐사하고 쓴 책 <피라미도그라피아>가 출간됐다. 뉴턴은 그 책에서 제시한 측량 수치들 중에서 지구 크기에 대한 정보가 담긴 ‘신성한 큐빗’을 얻으려고 노력했으나 찾아낼 수 없었다. 존 그리브스의 책에는 전형적인 고대 이집트 측정단위인 ‘왕의 큐빗’만 존재했던 것이다. 뉴턴은 여러 고문헌들을 통한 추론에 의해 신성한 큐빗이 왕의 큐빗의 6/5배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기자 대피라미드의 ‘왕의 방’에 적용된 수치가 가장 정확한 왕의 큐빗이라고 가정했다. 존 그리브스는 이를 0.5239미터로 측정했으므로 이 값으로부터 0.6287미터의 신성한 큐빗이 도출됐다.

덴데라 신전 천장의 12궁도

뉴턴은 자신의 만유인력법칙이 성립하기 위해선 지구 중심에서 달까지의 거리가 지구 반지름의 60배쯤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를 만족하려면, 지구의 반지름은 6360킬로미터 정도 되어야 했다. 따라서 만일 신성한 큐빗이 존재한다면 그 값은 지구 반지름의 1천만분의 1인 0.6360미터 근처여야 한다고 뉴턴은 생각했다.(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1미터는 극에서 적도까지의 자오선 길이의 1천만분의 1로 정해졌다.) 뉴턴은 기자 대피라미드로부터 도출한 신성한 큐빗이 이 값과 비슷하긴 해도 자신의 가설이 옳음을 증명하기엔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런 방향으로의 연구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다. 지구의 크기에 대한 정확한 측정은 1671년에 프랑스 천문학자 장 피카르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지구의 평균 반경을 6372킬로미터로 측정했고, 뉴턴은 1687년에 출판된 <프린키피아>에서 이 수치를 사용해 자신의 만유인력법칙이 옳음을 보였다.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관이라고 알려진 사상은 사실 뉴턴의 생각과 다르다. 이런 세계관은 피에르시몽 라플라스에 의해 만들어졌다. 미분방정식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변환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그는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을 우리 태양계 천체들의 안정적 운행을 설명하는 데 성공적으로 적용했기에 ‘프랑스의 뉴턴’이란 호칭으로도 불린다. 그는 18세기에 라플라스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과학을 뉴턴주의화하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라플라스의 뉴턴주의에 진짜 뉴턴은 없었다. 뉴턴은 우리 태양계 행성들 간의 상호작용을 계산할 수 있을 만큼 미적분 기법을 발전시킬 수 없었으며, 이 때문에 태양계의 안정을 신의 끊임없는 간섭에 의지했다. 하지만 라플라스는 고차 미분 방정식을 푸는 방법을 사용하여 행성들 상호 간 작용하는 만유인력들까지도 고려한 궤도를 알아낼 수 있었고, 신과 무관한 완벽한 자연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관을 확립할 수 있었다. 라플라스는 우리 태양계 행성들의 운행에 대한 계산이 포함된 <천체 역학> 총 5권 중 3권을 나폴레옹에게 헌정했는데, 그 책이 사실상 당시 터부시되던 무신론적 세계관을 담고 있음을 간파한 나폴레옹이 농담조로 이를 문제 삼자 ‘신이 존재한다는 가설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선언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라플라스와 그의 학파에 속했던 일련의 프랑스 과학자들은 기독교 신학의 교리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법칙에 의해 기계처럼 돌아가는 완벽한 세계에 신이 차지할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과학과 대척점에 있는 기독교 신학을 배격하기 위해선 이 세상이 기원전 4000년 무렵에 처음 탄생했다는 성서의 유대 신화 허상부터 벗길 필요가 있었다. 마침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쫓아갔던 과학자들이 이런 움직임에 앞장섰다. 그 중심에는 당시 이집트 땅에서 프랑스 파리로 뜯어온 덴데라 신전 천장의 12궁도가 자리잡고 있었다. 조제프 푸리에를 비롯한 여러 천문학자 및 수학자들은 이 12궁도가 1만년도 넘었다고 생각했고, 이들 모임의 수장 격이던 라플라스도 이런 견해를 지지했다. 나중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에 의해 신전 건립 시기가 그레코-로만 시대인 기원전 1세기께라는 결론이 났지만, 이들은 여전히 12궁도가 가리키는 시대가 아주 오래되었다는 신념을 거두지 않았다.

둘의 가정은 근본적으로 달라

라플라스학파가 이런 주장을 제기한 이면에는 기독교 연대기를 무력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만일 이 당시에 뉴턴이 살아 있었다면, 기독교 연대기를 신주 모시듯 했던 그는 자신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던 라플라스와 그 일파들을 몹시 싫어했을 것이다. 덴데라 12궁도가 가리키는 시대가 언제인지에 대해선 아직까지도 논란이지만, 그 연대가 그리 오래지 않더라도 라플라스가 고대 이집트 문명에 대한 경외감을 거두진 않았을 것이다. 라플라스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지구 둘레 길이를 고대 이집트 단위로 계산할 경우 실제와 1% 이내로 아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말년의 저서 <우주 체계에 대한 설명>에서 에라토스테네스가 고대 이집트의 아주 오래된 측지 지식을 가로채 자신의 업적으로 포장했다고 쓰고 있다. 이렇듯 라플라스도 뉴턴처럼 고대 이집트에 지구 크기에 대한 매우 정확한 지식이 존재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이 둘의 가정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뉴턴은 그런 지식이 유대인들이 이집트 땅에 들어가면서 전파되었다고 생각한 반면 라플라스는 유대인들과 무관하게 만년 이상 오래된 고대 이집트 문명이 아주 오래전에 놀라운 과학 수준에 도달했다는 증거라고 여겼다. 이는 라플라스가 완벽한 자연법칙에 의해 스스로 돌아가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신봉한 데 반해, 뉴턴은 그런 자연법칙이 불완전하여 끊임없는 신의 돌봄이 필요하다고 믿었던 것만큼이나 큰 견해차였다.

맹성렬 우석대 전기전자공학과 교수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뉴턴은 달도 지구 중력에 의해 끌어당겨지며 그 힘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생각했으나, 정확한 달의 공전 반경을 알지 못했다.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 주변 상공을 비행하는 해군 헬기 뒤로 멀리 보름달이 떠 있다. 나사 누리집
뉴턴은 달도 지구 중력에 의해 끌어당겨지며 그 힘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생각했으나, 정확한 달의 공전 반경을 알지 못했다.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 주변 상공을 비행하는 해군 헬기 뒤로 멀리 보름달이 떠 있다. 나사 누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