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이정모의 내 인생의 책](1) 숲에서 우주를 보다 |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 / 경향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9. 20. 22:26

[이정모의 내 인생의 책](1) 숲에서 우주를 보다 |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

이정모 | 서울시립과학관장

입력 : 2016.09.18 23:00:00 수정 : 2016.09.19 00:14:08

ㆍ장자보다 4억년 먼저 깨달은 이끼

[이정모의 내 인생의 책](1) 숲에서 우주를 보다 |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은 생태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다. 그는 학교 근처의 오래된 숲속에 지름 1m가 조금 넘는 가상의 원을 그리고 이것을 ‘만다라’라고 칭했다. 숲 전체를 내다보는 창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이곳을 한 해 동안 찾아와 소란 피우지 않으면서 숲의 순환을 지켜보았다. 아무것도 죽이지 않고, 땅을 파헤치지도 않고 오직 눈과 귀로만 관찰했다. 1년 동안 만다라를 관찰하면서 일기를 썼다.

1월1일의 일기 제목은 ‘결혼’이다. 겨울 숲은 음침하고 무기력하다. 그의 눈에는 겨울에도 생리기능을 발휘하며 생기를 뿜어내는 이끼가 보인다. 이끼는 온기를 얻기 위해 연료를 태우지 않고 주위 온도에 따라 생명 활동을 조절한다.

이 모습을 보고 해스컬은 세찬 폭포수 아래에서 헤엄치던 남자가 말하는 <장자>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천명에 따라 이뤄지게 한 것입니다. 나는 소용돌이와 함께 물속에 들어가고 솟는 물과 더불어 물 위에 나오며 물길을 따라가며 전혀 내 힘을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이끼는 장자보다 4억년 앞서서 원리를 깨달았다”고 덧붙인다.

이끼 색깔은 수억년 전 시작한 공생의 결과다. 예를 들어 엽록체는 1억5000만년 전 조류 안에 둥지를 튼 세균의 후손이다. 미토콘드리아 역시 한때는 자유롭게 살아가던 박테리아였다. 해스컬은 결국 우리 몸도 수많은 세균의 결혼의 결과물인 셈이라고 말한다.

한때 내가 일했던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는 서울 한복판의 안산(鞍山) 기슭에는 산을 빙 둘러 나무 데크를 깔아 놓은 ‘자락길’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둘레길이 있다. 점심때 이 길을 걸으면서도 내 머리는 온갖 잡다한 일로 가득했다. 이 책을 읽은 후에는 풀과 나무와 새가 보였다. 내게도 우주를 보여주는 작은 숲이 생긴 셈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609182300005#csidx27e04849e9a4f30ac36c1b5883d93f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