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갑자기 순례길을 떠났다. 그것도 겨울에, 한국도 아닌 이국땅으로. 길이는 800㎞. 그 길은 ‘카미노’라고 불린다. 프랑스 국경마을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산티아고에 이르는 험한 길이다.
고교 시절 아버지가 자살했다. 6남1녀를 둔 성실한 직장인이던 아버지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그 뒤 30여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며, 품어온 화두였다. 그 오랜 화두를 풀고 싶어 2014년 카미노로 떠났다. 순례길을 걷다가 한국의 가족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막내 오빠가 어젯밤 자살했다’는 것이다. 가족 가운데 두 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길은 험했고,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45일만에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마침내 먼저 가신 이들을 이해하게 됐다.
문지온(54·사진)씨는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몇번 문학상도 받았다. 카미노는 그가 처음 선택한 순례길이었다. 걷기에 불편한 발에, 지독한 길치에, 낯선 상황에 많은 두려움을 느꼈다. 이전에 등산은 물론 어떤 운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몸으로 어느날 선뜻 카미노에 몸을 던졌다. 무모하고 위험한 도전이었다.
경험 부족은 첫날부터 나타났다. 배낭이 무거웠다. 피레네 산맥길을 오르면서 기진맥진했다. 배낭 물건의 반을 버려야 했다. 지난 6일 만난 문씨는 이렇게 말했다. “배낭은 제 인생의 무게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걷는 동안 남에게 신세도 안 진다는 원칙을 정했어요. 하루 만에 깨졌어요. 곁에 가던 순례자에게 배낭을 맡기기까지 했으니까요.”
우연히 동행한 순례자가 이야기했다. “카미노에는 너에게 필요한 것이 다 있어. 물건이든 사람이든 영적인 경험이든, 네가 필요해서 구하는 거라면 카미노가 줄 거야. 만약에 구해지지 않으면 너 자신에게 물어봐. ‘정말 이게 꼭 필요한가?’ 하고. 카미노에 없는 것은 진짜 네게 필요한 게 아니거든.”
“한국 사회는 누군가 아픔을 드러내면, 따뜻하게 감싸지 않아요. 그렇게 말한 아픔은 부메랑, 화살이 돼 다시 상처를 줍니다. 그런데 카미노에선 따뜻한 위로를 받았어요.”
문씨가 만난 카미노의 전세계 순례자들은 치유하기 힘든 아픔을 안고 걷고 있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길을 잃고 헤맬 때, 모진 비바람에 걷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웅크리고 앉아 있을 때, 순례자들은 마음을 나누었다.
덴마크에서 온 여성 순례자는 문씨의 아픔을 듣고 이렇게 말해주었다. “슬픔에 시간을 줘. 나중에 너의 슬픔이 원할 때 마음껏 울면 돼.” 문씨는 자신이 기다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제 안의 슬픔, 어둠 속에 가두었던 친구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어요. 외면했던 슬픔에게 용서를 구했어요. 미안하다며 이젠 만날 준비가 돼 있으니 언제라도 원하면 나오라고 했어요.”
카미노에서 만난 순례자들은 대부분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콜드 순례’로 불리는 겨울 순례는 인적도 드물고, 여름보다 고생스럽기 때문에 ‘도보여행’이 아닌 말 그대로 ‘순례’라고 한다.
독일에서 온 부부는 잃어버린 딸을 보고 싶을 때마다 왔고, 포르투갈에서 온 이혼남은 카미노에서 남을 도와주며 잊힌 행복을 찾았다고 했다.
문씨는 자살률이 세계 1위인 한국은 이제 ‘자살 유가족’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평균 33분마다 한 명이 자살을 합니다. 자살한 이의 평균 5명이 되는 유가족들은 평생을 괴롭게 지냅니다. 자신이 잘못해서 가족이 자살했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립니다. 특히 자살의 이유가 명확하지 않아 버림받았다는 느낌도 많아요.”
문씨는 최근 가까운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만약 내가 우울해하거나 죽음을 생각하는 신호를 주면 적극적으로 나에게 관심을 가져줘. 침묵에 들어가면 더 위험하니까 너의 도움이 필요해.”
문씨는 아버지가 보낸 자살 신호를 알아채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한테 인사를 드리러 갔었어요. 아버지는 ‘용돈을 주고 싶은데 약 살 돈밖에 없어 못 주겠다’고 하셨어요. 전 그 약이 지병인 뇌졸중 약인 줄 알았어요. 그 말이 저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말일 수도 있었는데요.”
문씨는 힘들었던 순례를 통해 가족의 자살은 남은 가족의 잘못이 아니고, 남은 가족들은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도와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자살 유가족의 삶은 아파요. 주변인들의 위로와 충고를 받아들이기엔 경험도 없고, 시간도 부족해요.”
그는 지난해엔 카미노보다 험한 로마로 가는 순례길(1000㎞)을 걸었다. 54일 순례길의 절반 동안은 숙소에 들른 순례자가 그 혼자였다고 한다. 이젠 불교와 힌두교인들의 성지인 카일라스 도보순례(1000㎞)를 계획하고 있다.
카미노를 걸으며 자살한 아버지와 막내 오빠와의 화해 이야기를 담은 <남은 자들을 위한 길, 800㎞>(달달한 금요일 펴냄)를 출간한 문씨는 순례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따뜻하게 닦아줄 수 있는, 순례자를 위한 숙소를 운영하는 게 꿈이라고 한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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