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Life)

“비구와 비구니 차별없던 초기불교 ‘평등’ 되찾아야” / 금릉사 주지 본각 스님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9. 14. 08:20

사회종교

“비구와 비구니 차별없던 초기불교 ‘평등’ 되찾아야”

등록 :2016-09-13 17:02수정 :2016-09-13 20:40

 

[짬] 금륜사 주지 본각 스님

본각 스님
본각 스님

“저도 한때는 다음 생에 비구(남자 승려)로 태어나게 해달라는 서원(불교에서 소원을 비는 일)을 세웠어요.” “불교에서 비구니(여자 승려)에 대한 차별이 심해서 그랬나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어요. 다만 해인사에서 수행하고 싶었어요. 해인사에는 비구니가 머물 수가 없어요. 너무 아름다운 사찰인 해인사에서 중 노릇 하고 싶었어요.”

1987년 12월31일, 일본 유학을 다녀온 35살의 본각 스님은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3천배를 하며 서원을 빌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비구니는 특별한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 귀한 자리에서 다음 생에는 비구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니, 한국 불교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성차별을 볼 수 있다. 신도는 여자가 훨씬 많지만 비구니는 비구에 비해 많은 제약을 받는다. 비구니는 ‘조계종 종정과 총무원장, 25개 본사 주지를 맡지 못한다’고 종헌은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본각 스님은 “부처님 살아생전에는 불교에서 성차별이 없었다”고 말한다.

큰오빠 성철 큰스님 상좌로 출가
어머니와 다섯남매도 같은 길
“세살때 나도 출가하겠다 했죠”
일본 유학해 박사 받고 교수로

“종회의원 81명 중 비구니 10명뿐
불교계 성차별 제도개선 노력”

본각 스님은 최근 출판된 <불교 페미니즘과 리더십>(불광출판사)에 실린 ‘여성 수행의 의미와 가치’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석가모니에 의해 불교 교단이 만들어진 기원전 4세기경의 초기 불교에서는 남성과 동등하게 출가하는 여성 수행자가 있었고, 교단 내에서도 그 사람의 과거나 사회적 계층을 전혀 묻지 않고 남자 수행자와 평등하게 비구니로 자격을 부여했다”고 밝혔다. 당시 사회적으로 성차별과 신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교 수행에는 남녀가 평등했다는 것이다.

지난 6일 경기도 고양시 금륜사에서 만난 주지 본각 스님은 “초기 경전에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 있는 것은 후대의 경전 편찬자들이 기존 인도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에 대한 편견을 기록한 탓”이라고 설명했다.

“초기 경전엔 여성에 부정적인 기록이 많아요. 여인은 집착과 탐욕이 심하고, 여성의 몸은 부정하다며, 여성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경계하는 기록이 많아요. 여성을 수행의 장애물로 취급한 거죠. 심지어 여인은 남성을 유혹해 악을 짓게 하는 죄의 근본이라고도 표현해요. <열반경>에서도 모든 여인은 악이 모이는 장소로, 대승 불교의 대표적 논서인 <대지도론>에서도 여성의 성품을 애욕과 질투심에 차 있는 악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어요.”

본각 스님은 이런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은 ‘후대에 성립한 경전이나 초기 대승불교 경전’에 나타난다며, 부처 생전의 불교 교단 분위기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스님은 초기 경전에는 여성에 대한 긍정적인 기록도 많다고 말한다. 여자가 출가해서 교단 내에서 아라한(불제자가 도달하는 최고의 자리)으로 활동한 기록도 있다는 것이다. “초기 경전 <수마제녀경>을 보면 수마제가 여성의 몸으로 성불하길 서원하는 기록이 있어요. <아라한구덕경>에는 석가모니가 비구나 비구니를 공평하게 칭찬하고 선지식으로 인정해요. 성차별이 없던 거죠.”

본각 스님은 2남4녀인 6남매가 모두 출가한 집안으로 불교계에서는 유명하다.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장남이 성철 스님의 맏상좌로 출가한 1년 뒤, 어머니는 온 가족을 모아놓고 함께 출가하자고 권했다. 그때 막내로 겨우 3살이었던 그 역시 흔쾌히 “출가할래요”라고 답했다. 그래서 장남 천제 스님에 이어, 차남 삼소 스님, 장녀 혜근 스님, 차녀 적조 스님, 삼녀 보명 스님(지난해 입적) 그리고 본각 스님까지 모두 출가했다. 어머니도 ‘성종’이라는 법명까지 받아 놓고는 입산 3년여 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함께 출가하면 함께 살 줄 아셨나봐요. 출가한 뒤 뿔뿔이 흩어지는 자식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셨어요.”

본각 스님은 14살이 되도록 한글을 깨치지 못했다. 뒤늦게 학구열이 불붙었다. 중학교 졸업장이 없었지만 사형 스님의 도움으로 야간 여고에 입학했다. 그의 삭발 머리에 무명초(머리카락)가 자랐다. 고교 2학년 때부터 장학생이 됐다. 3학년이 되자 꼬박 10개월을 학원 기숙사에 틀어박혀 공부한 그는, 마침내 동국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졸업반이 되자 한 남학생이 스님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스님인 줄 몰랐기 때문이다. 본각 스님은 “결혼하게 되면 당신과 하겠지만, 결혼엔 뜻이 없다”고 정중히 편지를 써서 거절했다.

대학 졸업 뒤 일본으로 유학해, 릿쇼대에서 석사를, 고마자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스님은 승가대학 교수가 됐다. 비구니종회의원을 거쳐 전국비구니회 부회장도 맡고 있는 그는 “불교계에 존재하는 남녀 사이의 불평등한 제도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81명의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중 비구니는 10명뿐이다. 총무원장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비구니 역시 중앙종회 의원 10명과 각 교구에서 선발되는 선거인단 1~2명이 전부다.

“비구와 비구니의 평등은 불교의 근본사상을 되찾는 일입니다. 비구와 비구니의 대립으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비구니가 사회와 소통하며 사회로부터 인정받아야 할 때입니다.”

마침 그날 금륜사에 두 명의 언니 스님이 놀러 왔다. 정겹고 수다스런 자매 모습이 묻어난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